비지론-독자론 넘어 '연합정치'를
    2008년 09월 06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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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운동 中, 길거리에서 ‘한국 전쟁’을 만나다

   
  ▲필자
 

2006년 지방선거 때다. 당시 나는 서울시의원으로 출마하여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평소 알던 분을 통해 사람을 소개받기도 하였다.

소개받은 분은 호남 출신이셨는데 한참 말씀하시던 중에 내 소속 정당이 ‘민주노동당’이라는 것을 확인하더니 금방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국전쟁 시절 본인의 가족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등등을 이야기하시기 시작했다. 그분에게는 ‘호남’이라는 코드보다 ‘한국전쟁’이라는 코드가 훨씬 더 강렬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발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나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개중에는 민주노동당 서민정당인 것은 알겠지만, 김정일을 추종하지 않는다는 신문광고를 하면 적극 도와주겠다는 말씀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1953년에 끝난 줄 알았던 한국전쟁이 ‘지금 현재까지’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 서민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고학력 중산층이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이유

한국전쟁은 도대체 이 땅의 민중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선거 이후 나는 ‘그들’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를 비롯한 관련 책을 보곤 했다.

이런 고민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지식인들이 ‘군부독재’를 경험했다면 이 땅의 민중들은 ‘한국전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절대빈곤의 시대에, 애비 에미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 죽음만큼 굴욕적이던 시대에, 한국전쟁으로 엄마, 아빠, 형제 자매를 잃었다면, 그리하여 가난해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설움은 자연스럽게 ‘한국전쟁’과 닿게 되고, ‘북한’과 닿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1950년대 출생한 사람이 있다면 현재 나이가 50대 중반이다. 바로 이 지점이 ‘50대 이상’의 세대에게서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0%에 가깝게 나오는 근본 이유이다. 

3. ‘절반의 진리들’ – 좌파와 우파의 ‘증오의 정치학’

대한민국 좌파들 자부심의 근원은 대한민국 우파의 뿌리가 △군부독재 △친일파 △정경유착인 것과 달리 자신들은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반면, 우파들 자부심의 뿌리는 좌파들이 한국전쟁에서 책임이 자유롭지 못한 반면 자신들은 경제성장까지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헐뜯으며 ‘증오의 정치학’을 경쟁했다. 우파는 좌파를 박멸의 대상으로, 좌파는 우파를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들은 서로 ‘절반의 진리’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실천적으로 다음의 두가지 인식 전환을 요구한다.

첫째, 안보문제(친미/북한문제)의 역사적·경험적 ‘실재성’이다. 조선일보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때문에 안보상업주의가 먹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민중적 체험’이 있기 때문에 안보상업주의가 작동한다는 <선후관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둘째,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성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후발산업화는 많았지만 대한민국처럼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비록 그가 독재자였지만 박정희의 ‘역할’도 있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 이제 ‘팩트’의 영역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 경제적 성과에 대한 최근의 진보 경제학계 논의로는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창비)에 수록된 조절이론적 접근을 한 서익진 교수와 제도주의적 접근을 한 조영철 박사의 논문을 추천한다.)

4. ‘민주화 이후’, 성찰적 대안 좌파의 모습 – “우파의 존경을 받는 좌파”

민주화를 꿈꾸던 사람들은 군부독재와 광주학살에 분노하며 열심히 싸웠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에게는 역시 중요했던 나머지 ‘절반의 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증오의 정치학’과 ‘반대의 정치학’을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더 많은 민중들이, 더 절박하게 경험했던 것은 한국전쟁과 경제성장이었다. 그것은 80년대 민주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무게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치 유럽의 저소득 서민들이 사회복지를 ‘체험’했기에 지금도 강력한 <복지동맹>의 지지기반인 것처럼, 대한민국의 저소득, 저학력 서민들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식 경제성장을 ‘체험’했기에 지금도 강력한 <안보-성장동맹>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서민대중’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렇듯 그들 주장의 합리적 핵심을 가슴으로 수용하고, 가슴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민중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적 논리 중에서 ‘합리적’ 부분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적극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치 전선을 ‘복지 대 시장만능’으로 선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5. 노동당 노선의 제출자가 쓴 노동당 평가

주대환이 <시대정신>에 기고한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와 좌파의 진로」(이하 「진로」)라는 글은 내가 지난 몇 년간 본 그의 글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잘 정돈된 글이다. 주대환의 글은 △분당사태 분석 및 평가 △NL-PD의 역사적 기원 및 공통점 △4가지 태도 전환의 필요성 △좌파의 새로운 정치 전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글에 대한 내용적 검토는 후술하기로 하고, 그의 주장은 동의 여부를 떠나 길게는 35년, 짧게는 91년 신노선 제출 이후 18년간 민주노동당의 산파 역할을 했던 ‘노동당’ 노선의 제출자답게 많은 고뇌가 담겨있고, 경청할 부분이 많은 글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레디앙>에는 「조선일보 류근일, 주대환 칭찬한 이유」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편집되고, 박노자의 팩트 확인도 없이 쓴 ‘생뚱맞은’ 3류 비판 글과 초딩스러운 댓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진보신당 게시판에도 마치 ‘이지메’에 가담하듯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해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판 대부분이 기본적인 ‘독해’조차 안 되어 있는, 논술로 치면 ‘논제’에 충실하지 않은 주장성 비판이라는 점에서 그 수준 낮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6. 주대환 비판에 대한 反비판 – 이광호 기자의 접근은 명백한 ‘오버’

주대환에 대한 비판은 크게 4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는 듯 하다.

첫째, ‘매체’ 비판이다. 기고된 곳이 <시대정신>이라는 우파 매체이고, 류근일이라는 조선일보 대표 필진이 칭찬한 것 자체가 불순하다는 의혹이다. 레디앙 이광호 기자가 이러한 비판의 선두에 있는 셈이다.

둘째, ‘글 내용’에 대한 비판이다.(박노자) 셋째, 안티조선에 위배된다는 비판이다. 김수민의 글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 주대환 ‘노선’(?)에 대한 비판이다. 역시 김수민 등이 대표적인 듯하다. (김수민 주장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인 ‘정치전략’ 편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이광호 기자의 비판은 명백한 ‘오버’이다. 이광호 기자는 해당 매체가 “좌파에 대한 역사적 구타”를 해오던 곳이고, 그곳이 “새로 사귀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 아니냐고 의문을 보낸다. 쉽게 말해 ‘당신 변절하려고 작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독심술’에 입각한 접근법으로 올바르지 않다. 또한 “적이 칭찬하면 적의 편 아닌가”라는 전형적인 당파성의 접근법으로 옳지 않다. 우리는 오직 주장 자체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야 한다.(필자가 본 이번 류근일 글은 전적으로 동의되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조선일보의 당내 좌파에 대한 애정(?)은 단지 주대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당하다. 조선일보는 지난 몇 년간 민노당 내에서 당내 좌파들이 주체파들과 권력투쟁을 할 때마다 지면을 ‘할애하는’ 친절(?)을 베풀어왔다. 국보법 올인 논란, 북핵논쟁, 일심회 논쟁, 그리고 종북주의 논란 및 분당 사태까지.

조선일보는 심지어 총선을 불과 1주일 앞둔 2008년 4월 1일에는 눈에 잘 보이는 지면에 다음과 같은 시론을 통해 진보신당에 대한 투표지침(?)까지 내렸다.

“…….종북주의자 또는 주사파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명시한 좌파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다……이에 반해 북한 인권 개선을 들고 나온 진보신당은 민주적 좌파이다. …….. 그래도 이번 총선에서 이왕에 좌파에 표를 찍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민노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에 한 표를 주라고 권하고 싶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난다면 민노당은 병든 날개이고 진보 신당은 그나마 건강한 날개이기 때문이다. ”
「시론 : 민노당-한총련은 병든 날개」, 4월1일, 조선일보,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1/2008040101988.html

조선일보의 이러한 접근은 좌파를 통해 주체파를 공격하는 이이제이(夷以制夷) 전술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자신들도 수구꼴통의 소리가 부담스러워 ‘현대적 좌파’는 동의한다는 제스처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조선일보가 무슨 의도이건 그건 조선일보의 몫이지 주대환 또는 진보신당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7. 주대환 비판에 대한 反비판 – 박노자와 김수민의 경우

둘째,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글 내용에 대한 박노자의 글은 참으로 ‘생뚱맞은’ 비판이다.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론은 PT독재론 폐기의 2탄쯤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주대환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적’ 정통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박노자는 대한민국의 ‘현실적’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다. 오세철 및 기륭전자 사태에 주대환이 박노자와 견해가 다를 것이라 생각해서 언급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범주가 다르고, 개념의 레벨이 다른 것을 뒤섞고 있는 셈이다. 박노자는 무엇보다 비판의 기본인 ‘팩트’ 확인조차 안했다는 점에서 부끄럽고 섵부른 논평이었음을 인정하고, 주대환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셋째, 안티조선에 입각한 비판이다.(김수민) 안티조선이 일시적 ‘시민운동’의 차원에서라면 긍정해줄 여지가 있겠지만 정당에서 대표적 우파 신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상은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발상이다.

민주주의의 철학적 근본전제는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란 내가 틀리고 상대방이 맞을 수도 있다는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상대방 주장을 ‘타도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당연히 상호소통을 통한 진리의 상호침투를 승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좌파이건 극우파이건 모두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정당이 ‘안티조선’의 차원에서 기고, 인터뷰를 금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PD적 잔재’에 입각한 체제 부정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긍정성과 민주주의를 강조한 주대환의 글을 <시대정신>에 기고한 것은 오히려 적절한 행위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한때 애독자인 적도 있는 <시대정신>이란 잡지는 ‘New Right 이론지’라 불릴 만큼의 수준은 갖고 있는 잡지이지 ‘빨갱이 사냥’으로 혈안이 된 그런 잡지가 아니다. 한번이라도 읽어는 봤는지 궁금할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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