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오지 않는다
    2008년 08월 18일 05: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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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장집과 베버

최장집 교수는 퇴임강연에서 “좋은 정당과 카리스마적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좋은 정당이 중요한 것은 좋은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글은 퇴임강연에서 밝힌 최장집 교수의 정당, 정치인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다.

   
▲ 최장집
 

6월 20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 모인 사람들은 “나는 베버리안”이라는 최장집의 고백에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현대 정치학의 이런저런 조류에 밝지 못한 나 역시 최장집의 글들에서 딱히 무슨 주의라 할 만한 편향을 발견하지는 못한 터였다.

그런데, 그의 퇴임강연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만을 놓고 보자면, 베버리안이라는 고백은 매우 진실돼 보인다.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은 베버의 퇴임강연 격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최장집이 바치는 오마주다.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에서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쓰인 관점과 용어가 텍스트 패러디된다.

“정치 현상은 … ‘양날의 칼’과 같은 극히 위험스런 병기”라는 최장집의 규정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라는 베버의 인식, 정치를 ‘필요악’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같다(이 글에서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인용은 전성우 역, 2007년 나남출판 판본이다).

“‘운동의 정치학’은 나의 학문적 정향과 맞지 않아. 민주화 그리고 이후 과정에서 운동을 강조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것은 내 기질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할 역할도 아니라 생각 … 나의 관심은 ‘레짐의 정치학’”이라는 최장집의 태도는 베버가 든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열정에 대한 비판 부분 – “‘혁명’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장식하고 있는 카니발 … ‘지적으로 흥미로운 것에 대한 낭만주의’ …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 …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다른 신체기관이나 심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을 따른 것이다.

최장집이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며 “직접 민주주의/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베버가 미국 정치를 “국민투표제적 당-기계의 엽관체제”라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장집이 “출로는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나? …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자문자답한 것은 베버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라 강조한 “비범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거한 권위”와 같은 염원이다.

2. 베버의 ‘세 유형론’과 최장집의 ‘레짐론’

베버는 그의 퇴임강연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지배 정당성의 근거를 ‘전통적’, ‘카리스마적’, ‘합법적’인 세 유형으로 나눈다.

그 첫째는 “아득한 옛날부터 통용되어 왔고 또한 습관적으로 준수되어서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 … 가산제 군주가 행사하는 ‘전통적’ 지배”이고, 그 둘째는 “선출된 전쟁군주, 국민투표에 의거한 통치자, 탁월한 선동정치가, 그리고 정당 지도자들이 행사하는 지배”이고, 그 셋째는 “근대적 ‘공무원’을 비롯하여 공무원과 유사한 모든 권력자가 행사하는 지배”이다.

그렇다면 “국민투표에 의거한 통치자, 탁월한 선동정치가”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고, 그 혈족과 가신들이 여전히 유럽의 “가산제 군주”인 나폴레옹의 경우는 둘째인가 첫째인가? “선출된 전쟁군주”에서 역시 황제가 되었던 시이저는 첫째인가 둘째인가?

   
 ▲ Max Weber
 

“가산제 군주가 행사하는 전통적 지배”인 중세 왕정들의 경우에도 오랜 과거, 개국(開國)의 때에는 예외없이 “카리스마적” 지배 정당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던가? 또한, “합법적”이라는 세 번째 유형은 전통적이든 카리스마적이든 모든 지배에 부속하는 일상화된 지배시스템이 아닌가?

지배 정당성이 전통적인가 카리스마적인가 하는 베버의 분류는 ‘유형’이 아니라, 과거에 확립되어 존속돼온 그리고 사멸하는 카리스마인가, 현재 확립 중인 카리스마인가 하는 시점(時點)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 이용은 “관습”이라고 전근대 국가를 비판하고, “피지배자가 순전히 개인적으로 헌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자본주의 국가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現在)의 시점(時點)에서 정치를 사고하는 베버의 ‘지배 정당성 유형론’과 같은 것이 최장집의 ‘레짐의 정치학’이다.

“나의 관심은 ‘레짐의 정치학’이라 부를 만한 것에 집중돼. 즉 어떤 제도와 제도적 실천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나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적 실패 즉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들, 즉, 선거, 정당, 자율적 결사체, 참여, 대표-책임 원리 등의 실패의 결과로 이해 …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 이를 통해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에 관심”

여기서 최장집은 “운동을 … 제도적 실패의 결과로 이해”한다. 즉, ‘운동’을 비정상적 특수태로 규정한다. 그런데 최장집의 ‘민주주의’에서 언제나 반복되는 1987년 체제는 1987년의 전제도(前制度) 운동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가? 즉, ‘운동’은 제도 발생의 정상적 일반태가 아닌가?

최장집이 ‘제도’에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그가 바라는 이상적 ‘제도’는 무엇인가를 이끌고 조장하는 선도(先導) 제도로 읽힌다. 그리고 현실의 ‘실패한 제도’는 무엇인가에 뒤처지고 위협받는 지체(遲滯) 제도다.

즉, 제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도하거나 지체될 수 있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고, 최장집이 ‘운동’이라 일컫는 것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학자가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지나친 “낭만주의적 / 이상주의적 정치학 관점”이 민주주의 실패의 한 원인이라는 최장집의 비판은 정당하다. 예컨대, 1987년 여름의 재야운동이 민주당 계열로 제도화한 데 비해, 1987년 가을로부터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은 정치적 투자와 노력을 등한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실패에서 “낭만주의적 / 이상주의적 정치학 관점”에 의한 제도화 병목이 책임질 몫은 매우 작다.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정치세력이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에 비례하는 제도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다수대표 선거제, 1987년 헌법 대통령제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고, 이는 진보정당 이전 제도의 포화라 할 수 있다.

또,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다양한 요구와 주장들은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 지체의 표상이다. 즉, 만약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도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민주주의 실패는 제도 실패 + 제도화 병목 + 제도 포화 + 제도 지체의 복합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제도’를 이야기하자면 구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는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신제도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데, 최장집의 제도론에는 이 제도 형성론이 빠져 있다.

제도는 설계보다는 힘의 산물이고, 결국 운동이다. 그런데 최장집은 ‘운동’과 ‘제도’를 일부러 떼어놓으려는 정태(靜態, static)의 관점에 서기 때문에 정치의 일면 만을 말한다.

3. 의회주의, 정당, 카리스마

베버는 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이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 당이 의회 밖에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하찮은 운명에 처하게 되고, 지도자들 대신 노조관료와 당서기들이 당을 지배한다고 개탄한다.

최장집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를 주창하며, “좋은 정당과 카리스마적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좋은 정당이 중요한 것은 좋은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이런 진술에 비추어 베버에게 있어 각각의 정치 기구들은 당〈의회〈지도자의 순서대로 경중(輕重)하거나 앞의 것이 뒤의 것에 대한 도구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며, 최장집에게 있어서는 당≤의회〈지도자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베버의, 의회주의를 통한 지도자 출현 주장은 지극히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베버의 주장은 “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원래부터 소수당이었으며 … 이 양당이 의회중심적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의회주의 체제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을 근거 삼는데, 베버 사후 가톨릭중앙당과 그 후신인 기민당, 사민당은 급속하게 의회주의 다수당의 길을 걷는다.

또, 베버가 “그의 사망과 함께 이런 지도자 시기는 끝이 났고, 이제 관료지배가 시작되었다”고 단언하는 베벨 이후에도 “열정과 순수성 … 지도자형 인물 … 순교자적 인물 … 대중들을 확고히 자기 편으로 만든” 걸출한 인물들은 독일 의회 안팎에서 수없이 명멸한다. 요컨대, 베버의 인식 세계 속에 있던 중앙당과 사민당의 초기 모습으로부터 의회주의를 거쳐야 지도자가 나타난다는 주장은 증명될 수 없으며, 일반화될 수 없다.

한국에 정당과 의회가 없다시피 했고 그런 정황이 민주주의 정체의 가장 큰 장애였으므로, 정당과 의회를 강조하는 최장집의 기존 주장은 일상정치의 차원에서 옳다. 그런데 그가 퇴임강연에서 새롭게 제기한 ‘카리스마적 리더’와 만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박정희, 김대중 같은 ‘카리스마적 리더’가 정당과 의회의 대체물로 기능해온 것이 현재까지의 한국 정치사이므로, 최장집의 ‘카리스마적 리더’ 주장은 기존 주장에서의 후퇴일 수 있다.

어쩌면, 정당과 의회, 언론이 순기능하는 현대 정상정치, 최장집이 바라는 합리적 온건 정치에서는 더 이상 카리스마적 리더가 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일시적 출현은 가능하겠지만, 민주적 동질화에 기초한 지속적 통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카리스마적 모습을 어느 정도 보였던 지도자들 – 부시, 고이즈미, 노무현, 이명박, 사르코지는 권좌에 오르는 과정과 그 이후의 몰락 내지 좌절에서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일련의 정치인 현상에는 하나의 법칙이 작용한다.

이들 모두는 탈정치 탈정당 기류에 개인을 내세워 영합했고, 개인 카리스마를 조작하기 위한 이미지 중심 선거전략을 통해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집권 초기 이들은 정당과 의회를 대신하는 카리스마적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만, 곧 정상정치의 기능에 의해 지지세력의 조기 이탈을 겪으며, 개인숭배자, 종교인, 대기업, 정치엘리트 등 소수 지지자에의 ‘관료적’ 의존이 심화된다.

즉, 현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정당의 후퇴에 의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정당은 가지고 정치인은 가질 수 없는 것 – 안정된 지지세력, 일관성 있는 이념과 정책, 권위 손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복원력의 부재로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정당은 자당 정치인을 구원해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요컨대, 현대 정치에서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란 정당 약화의 퇴행적 현상이고, 그들의 일시적 성공 요인인 정당 약화는 그들의 구조적 실패 요인이기도 하다.

4. 베버, 칸트 그러나 니체

베버가 신칸트주의 서남학파를 자처했던 것처럼 최장집은 자신이 “독일의 관념론 철학으로부터 강한 영향. 특히 신칸트학파”라고 술회한다. 그런데 철학은 모르겠으나 정치학으로 따지자면 최장집의 주장에서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최장집은 베버에 의해 니체로 인도된다.

   
 ▲ Friedrich Nietzsche
 

베버는 어딘가에서 개인만이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는 “지도자이면서 또한 영웅인 자만이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장집은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에 이르러 그동안은 불가능했던 의회주의와 정당정치를 실현할 주체, ‘출로’로 ‘카리스마적 리더’를 고대한다. 이에 따라 ‘좋은 정당’은 ‘카리스마적 리더’를 위한 배출구로 위치하게 된다. “혁명은 나폴레옹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이 혁명의 합리화이다(『권력의지』)”라는 니체의 관점과 같은 것이다.

물론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베버와 최장집에게 영향을 준 독일 낭만주의는 계속되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런데 베버는 ‘합리’로, 최장집은 ‘온건’으로 그 원천을 부정한다.

니체는 파리코뮌을 격렬히 비난하고, 베버는 뮌헨대학에서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연에서 1919년 혁명을 무시하고, 최장집은 촛불시위의 물결 가운데에서 의회주의를 주창한다.

최장집은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대해 평등의 가치를 통한 분배의 효과를 부과하는 기능 … 정치의 역할은 경제적 관료적 합리화에 대한 견제력을 부과하는 것 … 정치는 신자유주의 시장에 대해 정치적 제약을 부과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의 정치는 경제성장, 경제적 관료적 합리화, 신자유주의 시장이라는 비가역적 물리에 제한적 효과를 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초인적 신탁(神託)인 카리스마는 자본주의 경제운동의 하위 보조자로 물러앉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Godot)는 오지 않았다. 박정희 비서실과 김대중 정부에서 일하고, 노회찬을 지지하는 최장집에게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사천(四川)의 신들은 선인(善人)을 버리고 떠났다. 최장집은, 맑스를 인용하며 세속 대중정당을 기다리는 후학들로부터 벗어나 베버와 니체의 비범함을 맞이하러 떠났다. 퇴임이 최장집의 펜을 꺾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많이 외로울 것이다.

눈빛은 아직 젊은이, 머리카락은 때아닌 흰머리
그러나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맡은 일 충실히
너는 조국에 몸 바쳤고, 힘써 몸 바치고자 했다.
그리고 너는 말한다. “안녕히 주무셔요 왕자님”, “호레이쇼도 안녕히” 
                                                          – Antoni Slonimski, 「햄릿의 병」

* 이 글은 <텍스트> 2008년 9월호에 「고도는 오지 않는다 : 최장집 퇴임강연 비평. 베버, 칸트 그러나 니체」라는 제목으로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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