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개량주의자(?)의 고백
    2008년 08월 12일 01: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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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출국을 앞두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면서 이 글을 간단하게 남깁니다. 사실, 아까, 공항 버스를 타면서 머리에 든 생각인데, 저 같은 사람이 예컨대 ‘혁명’ 대신에 ‘복지국가’를 이야기하고 다니는 걸 보면서 실망하시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여전히 유효한 표어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사진=레디앙)

그러한 실망은 십분 이해가 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 가지 할 말은 있습니다. 국제적 차원 (어차피 ‘일국 사회주의’ 시대가 이미 끝난 지 오래입니다)에서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 자본주의 철폐의 실마리가 잡히면 당연히 좋지요.

또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제3차 세계대전이나 그 대전을 대신할 일련의 국지적 대리전 (현 그루지야 사태 참조)을 겪는 등 대단히 야만적인 모습을 보일 것도 뻔합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어는 지금이야말로 언제보다도 제일 유효하죠.

문제는 ‘보편’ 차원의 이와 같은 신념과 조금 다른 측면에서, 국내 정치의 영역에서 펼쳐져야 할 것은 ‘특수’ 즉 ‘신념정치’와 동시에 ‘책임정치’입니다.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고, 책임질 수 있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약속을 하는 것은 국내의 맹아적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지요.

‘복지 국가’ 정도의 약속은 100%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실현의 가능성이 비교적 높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0년 동안 실제로 국가의 사회 지출이 높아져 간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 정도를 높여 적어도 (우리 나라 관료집단의 현실적인 모델인) 일본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혁명적 이성’은 물론 ‘관료적 이성’의 차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념정치와 책임정치

거기까지는 책임 있는 약속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세계 혁명과 자본주의 철폐는 ‘나’ 내면의 희망 사항,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 모두의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어도 ‘지금, 여기’ 정치 영역의 언술로서는 약간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세계가 사회주의보다 차라리 야만으로 점차 나아갈 확률은 비극적이게도 지금으로서 훨씬 높기 때문이고, 정치란 희망이기도 하지만, 국가 예산 수지 계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진보신당은 그래도 ‘사회주의 지향’을 강령에서 똑똑하게 밝혔으면 합니다. 우리가 100년 동안 서 있을 진보의 집을 짓자면, 적어도 세계사적 차원의 ‘미래’까지도 ‘집단적 희망 사항’으로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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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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