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무능의 네 가지 기원
    2008년 08월 06일 04: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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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은 이 회의에서 특히 △기물파괴 방화 폭행 감금 등 과격한 폭력행위가 따르는 불법집회 △사회질서를 크게 어지럽히거나 사회불안을 초래하는 학원 밖 시위와 야간집회 △헌정질서의 문란을 초래할 불순집회와 시위 등에 관련된 주동자 극렬행위자 배후조정자 등은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엄단하라고 시달했다.”

낯설지 않은 신문기사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2008년 ‘촛불집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화국면을 지나 공안정국으로 향하던 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 대학생시위에 대한 검찰대응을 전하는 한 일간지(<중앙일보> 1984.4.24) 기사다.

요즘 이 정부가 시민들의 항의에 대처하는 태도를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10년 이상 후퇴한 것 같다는 세간의 얘기가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체감 민주주의 지수’를 계량화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촛불집회’를 두고 정부와 여당은 한 목소리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민주정부에 대한 반민주적 행태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체감 민주주의 지수’가 있다면 …

   
  ▲ 사진=청와대

돌이켜보면 이명박을 대통령의 자리에 앉힌 17대 대선에서 나타난, 사상 최저 투표율(63%)과 최고 득표율(48.67%)간의 간극은 이명박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예측해 주었다.

즉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대중들의 가혹한 평가는, 부패했지만 유능한 보수(혹은 산업화세력) 대 도덕적이지만 무능한 진보(혹은 민주화세력)라는 이상한 대결구도를 낳았고, ‘유능한 보수’에 대한 검증작업은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안티테제 속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요컨대 적을 통해 이미지화했던 가공의 능력은 적이 사라진 현실세계에서 바로 그 무력함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집권 정치세력, 즉 정부의 유능함은 ‘위기관리 능력’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통’이 바로 이것이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소통은 정치세력이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치적 능력 또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강부자 고소영 내각’에서 출발하여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결정을 거치면서 ‘촛불에 대해 자행하는 무자비한 공권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들은 위기관리는커녕 위기를 스스로 조장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무엇보다 정치를 바라보는 그(들)의 협소한 시각을 꼽을 수 있다. 그들에게 정치세계는 ‘한나라당(및 그 지지세력)과 민주당(및 그 지지세력)의 권력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촛불집회는 노무현 정권의 잔당들이 벌이는 한풀이고, 국회 미쇠고기 청문회를 통해 들고 나온 논리라는 게 고작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은 이전 정권이 이미 계획한 일정에 따랐다는 ‘설거지론’인 것이다.

반대세력을 거의 더블스코어 차이로 이긴 ‘민주’대통령에게 패배한 잔당들이 벌이는 한풀이에 가장 ‘확실한’ 처방은 ‘몽둥이’밖에 더 있겠는가? 왜? 이미 끝난 게임은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현 정권의 정통성이니까.

두 번째 이명박이라는 개인에게 더 초점을 맞추어 보면 이미 여러 사람들이 얘기했듯이 리더십의 문제다. 그런데 흔히 얘기하는 ‘CEO리더십’이 문제가 아니라, ‘리더십의 부재’가 문제다.

이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읽었다는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의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에서 필자는 서문을 통해 “나쁜 리더십은 없다. 나쁜 리더십은 리더십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단언한다. 리더십은 소통과 이해를 근본으로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것을 리더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민주주의 사회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백번 양보해서 이 대통령을 ‘CEO리더십’의 범주에서 평가하려 한다면, 그는 벌써 해고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고 했던가. 포기를 할 줄 아는 것이 그들 세계의 정치다. 그래야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은 적어진다.

해고되었어야 할 CEO

다음은 한나라당과 정부와의 관계 문제이다. 이는 정치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시 행위자의 정치력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좀 교과서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집권당은 정부에 대한 내부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동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명박 정부의 위기는 고스란히 한나라당의 위기로 전이될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은 지지층 결집을 위한 정치이벤트에 골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종부세 감면’, ‘검찰의 PD수첩 수사에 대한 측면 지원’, 그리고 ‘건국절 논쟁’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는 정권 초기에 무너져 버린 보수지지층의 재결집을 노린 것이기는 하지만, 반대자들의 결집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독재적 통치행태의 배경에는 이른바 ‘뉴라이트’로 불리는 보수적 시민사회세력의 역할도 컸다. 뉴라이트가 진정한 시민사회세력이라면, 정부 혹은 집권당과의 관계맺기 방식은 보수다운 보수이념의 제공이나, 시민사회와 교류의 활로를 뚫어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뉴라이트를 표방한 시민단체와 보수기독교집단이 가진 정치적 시각과 행태의 협소함은 현재의 보수정부와 대동소이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더욱 극우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사회단체를 ‘홍위병’으로 비난했던 이들이 이제 그들 스스로가 그 자리를 꿰차고 정부의 정치적 대리인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권의 독재적 행태와 이에 따른 시민과의 직접적 충돌 양상, 그리고 시민들의 호소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정당정치의 부재를 ‘의사(擬似)민주 대 반민주 구도’라는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보수정치세력은 현실정치세력으로 강력하게 존재하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방어할 진보정치세력의 부재,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형성된 통제할 수 없는 ‘공권력’에 의한 통치행태는 ‘민주화 20년’의 한국정치에서 다시 민주주의 문제를 도마 위로 올려놓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행’ 문제는 주로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대응’ 그리고 방송장악 음모 등으로 상징되는 권력감시기구의 제거와 통치수단화에 모아지고 있다. 물론 국가의 폭력성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는 것이고, 견제세력의 제거는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정권의 그것이 너무나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정치학자인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원조 뉴라이트인 대처 정권이 12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로 ‘이데올로기적 통합성’을 꼽았다.

즉 포클랜드 전쟁과 같은 민족주의적 이슈를 선점하고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영국적인 것’(Englishness)으로 경제위기와 영국민들의 불만을 ‘관리’하는 고도의 이데올로기 전술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물의 선진화와 실용’을 부르짖는 이명박 정부에게 이러한 고도의 정치력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이것이 진보세력에게 축복인지 또 다른 저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사진=손기영 기자
 

‘촛불들의 연대’가 절실

무엇보다 이러한 구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명박 정부의 ‘독재’에 대항하는 운동의 구도가 과거와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진짜 같은 가짜’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바로 광화문과 청계광장, 여의도 KBS본관 앞의 촛불들 속에 비정규직의 촛불들이 묻히는 ‘광장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도 이러한 본질을 지배하는 현상의 전도된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들의 연대’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것은 단순한 의제의 확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라는 소모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는 민주주의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 ‘촛불’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넘어 그 반대진영, 특히 진보진영의 정치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부실하고, 민주노동당은 불안하다. 시민사회세력과 노동운동은 정권의 물리적 탄압에 위축되어있어 있는 것이 객관적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펼쳐놓을 정책 하나하나가 암초이며, 자충수들이다. 진보정치세력은 더 이상 촛불에 기대지 말고 자신들의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앞서 얘기한 촛불들간의 연대, 민주주의간의 연대를 위한 ‘목소리’를 만드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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