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
    2008년 06월 24일 02:02 오후

Print Friendly

현란한 언어의 향연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라,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농어민의 아들딸입니다. 농업, 농촌, 농민 걱정이 곧 나라 걱정입니다.”

“어떤 경우든 친환경, 친문화적 기조를 유지하여 국토의 건강성과 품격을 높여나가겠습니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농민에 대한 사랑’, ‘친환경-친문화’,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구절구절이 따스하다. 그 중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구절은 ‘행복의 조건’에 대한 성찰을 자극한다.

경제발전이 최우선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경제 대통령’이라고 지칭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에 이런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의외이다. 이 취임사의 문구는 한미 FTA를 포함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조하는 현정부와는 어울리는 않는다. 더구나, ‘미국 쇠고기 수입 개방’ 상황과 대비해 볼 때, 이 구절은 수사적 울림만이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뿐이다.

   
  ▲ 김우창 교수(왼쪽)와 최장집 교수.
 

취임사의 현란한 언사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의 괴리를 보면서, 과연 어떻게 이 문안이 작성되었는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8700자 분량의 취임사는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등 실무진이 작성했다고 한다.

이를 송호근(서울대 교수), 권영빈(전 중앙일보 사장),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서지문(고려대 교수), 배규한(국민대 교수), 변희재(인터넷칼럼니스트), 김범일(가나안농군학교장) 등이 자문을 했다. 조금은 정치적 입장과 세계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 있는 이들이 자문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김우창 교수가 자문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의외였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의 일부는 김우창 교수의 손길이 스민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최근 김우창 교수가 ‘생태친환경적 미래’를 강조한 것과 ‘친환경, 친문화적 기조’의 어구는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선거를 통한 국민의 합의에 의해 탄생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사’ 기초 작업에 존경받는 지식인이 참여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취임사가 개인의 포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김우창 교수의 참여가 왠지 섭섭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자아낸다.

김우창 교수는 존경받는 문학평론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변화에도 비교적 초연한 채 사회적 발언을 해 왔던 분이다. 김우창 교수는 1960년대부터 한국문학비평에 기여했고,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은 시대와 문학의 관계를 일제 강점기의 문인들을 포함해 여러 문인들의 작업에 빗대어 탐구한 의미있는 책이었다. 김우창 교수는 그 필력과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은 힘을 발산하는 지식인이며, 지금도 여전히 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래서 김우창 교수에 대한 후학들의 비판은 더욱 예리해야 한다.

김우창 교수의 ‘합리주의 함정’

김우창 교수는 5월 22일 <경향신문>에 「쇠고기, 국제협정, 정치와 정치 너머」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김우창 교수는 ‘사회관계, 국제관계의 상식으로 보아 재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김우창 교수의 태도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가치중립성을 견지했다. 그래서 이번 정부의 쇠고기 협상을 ‘이익 교환의 실패’로만 바라보고 있다.

김우창 교수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책으로 한국 수입업자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제안했다. 즉, 수입업자에게 “원산지나 소의 나이 등을 명시”할 것을 “법적으로 요구”하고, 더불어 “소비자 운동 등을 통해” 자율규제를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이른바 정부가 주장하는 ‘자율규제’와 너무도 흡사하다.

김우창 교수의 글은 다음 몇 가지 부분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는 “이루어진 일에 입각하여 거기로부터 헤쳐 나갈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정부가 잘못된 협상으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문제는 정부가 ‘미국 쇠고기 수입’을 잘못된 협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국민의 역할이다. 그것을 괄호 친 채 시민사회가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잘못된 협상은 협상대로 인정하고, 한국 시민 사회가 ‘자율규제나 소비자운동’ 등으로 책임만 떠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으로, 김우창 교수가 단지 쇠고기 협상을 국가 간 협상으로만 바라본 것도 문제가 있다. 그는 “거래나 협상이란 이쪽에도 이익이 있고 저쪽에도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서, 설마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려고 했겠느냐고 옹호한다. 또한 미국도 “인간적 희생을 완전히 무시하고 쇠고기를 강매”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온정주의적 태도로 정부의 협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국가 기구는 가치중립적이지도, 원천적으로 공익적이지도 않다. 어떤 권력(주권)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국가기구에 자본의 이익이 작동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지금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간 이익의 손익계산 차원에서 한미 FTA와 쇠고기 협상이 이뤄졌다고 보지 않는다. 한미 양국의 정부는 특정 자본의 이익과 밀착된 상황에서 자국 자본의 이익을 계산하며 협상에 임하고 있다. 그 자본의 싸움 와중에는 ‘생명과 건강’이 희생되기도 하는 무자비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끊임없이 공공성을 희생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우창 교수는 단지 국가의 협상과 협정으로 사태를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이한 태도로 ‘쇠고기 협상’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김우창 교수는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도 “중고등학생 또는 더 어린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긍정적인 일일까?”라는 미심쩍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방식은 이명박 정부가 제기하는 ‘배후론’과 닮아 있다. 김우창 교수는 미성년자의 인간적 능력의 미숙함을 거론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는 일정한 보호구역에서 정치로부터 거리”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도 본말이 전도된 보수주의적 시각이다. 잘못된 협상으로 인해 문제를 야기한 정부를 질타하기 이전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에 나선 중고등학생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가? 더군다나 중고등학생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사안은 일종의 정치공방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다.

사회적인 현안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에 연령과 세대의 구분이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억압하는 것이 청년기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최장집 교수의 ‘대의민주주의’만이 촛불을 구원할 수 있는가

김우창 교수의 촛불집회에 대한 인식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최장집 교수의 논의도 토론이 필요하다. 최장집 교수는 6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글에서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최장집 교수의 논의는 ‘촛불집회를 비정상 상태’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정상적인 상태는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해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이 이뤄지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책임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가 이러한 책임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사회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해 권위주의적 권력행사,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하고 있기에 민주주의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촛불집회 이후를 생각하는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현대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면서 그는 “시민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 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과 같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은 ‘제도정치’에만 갇혀 있기에 문제가 있다. 최장집 교수는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만큼 적어진다”고 본다. 즉, 대의민주주의 제도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촛불집회와 같은 사회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학자 그룹에 속하는 최장집 교수가 ‘대의민주주의 제도’만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제도는 끊임없는 대중의 요구와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왔다. 완전한 제도는 없으며, 항상 불완전한 제도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주권자들의 요구 속에서 변경되어 왔을 뿐이다.

현재, ‘미친소 사건’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정당제도와 같은 제도정치 속에서 해결될 수 없었기에 광장의 정치가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장의 정치가 요구하는 제도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의 수렴의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정치학자는 ‘광장의 정치인 촛불 집회’의 요구를 수용할 만한 새로운 제도의 변화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올바르다.

다음으로, ‘촛불집회’로 일컬어지는 사회운동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보수적 면모를 내비치고 있어 위태롭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와 같은 운동이 1) 대안 형성이 어렵고, 2) 이슈의 위계질서를 세워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기 힘들며, 3) 정책 이슈 때마다 거리 시위에 나설 수 없는 일이고, 4) 장기적 유지될 수 없고, 5) 시민사회 내 갈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분석으로서는 올바를 수 있으나, 대의정치로의 수렴을 주장하는 근거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논거들이다. 이는 현재의 상태를 ‘정상에서의 일시적 일탈’이냐, 아니면 ‘비상사태’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시각 차이이기도 하다.

정당질서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비상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다. 군주제 시절에도 시민의 동의는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요구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동의 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시민의 저항에도 무심할 뿐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동의의 원칙’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최장집 교수의 태도는 ‘교과서적 강박’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최장집 교수의 시각이 현 상황을 오로지 정치영역 만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정치질서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중시하는 일상인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역주권을 포함해, 건강권 생명권을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단지 ‘정치 투쟁’으로만 수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명의 정치, 일상의 정치, 광장의 문화정치가 싹트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도정치라는 온실 속으로만 옮기려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희망은 원래 낯선 것이었다

최근 지식인 사회에서 촛불집회의 의미를 과장하지 말자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 사이에서 촛불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고 있다’(박상훈)는 의견도 있고, ‘촛불집회는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 현상인 만큼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정해구)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지난 6월 21일에는 한미 쇠고기 추가 협상에 따른 결과가 발표되었다. 쟁점이 되었던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는 ‘미 농무부의 품질시스템평가(QSA) 프로그램’에 내맡겨졌고, 일부 쇠고기의 위험부위 수입이 차단되었으며, 한국 정부의 검역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선에서 추가협상은 마무리되었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추가협상 결과는 자화자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촛불집회를 통해 일상의 생활정치가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고(김원), 제도정치의 종언을 통한 삶의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며(이명원),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필요성(하승우)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진취적인 면모는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일면 보수적인 태도와 대비된다.

간단히 말해서, 촛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권 건강권을 확대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그간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국가기구들이 오히려 ‘주권자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자각이기도 하다.

촛불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시민 연대’이다. 이 고귀한 실천 행위가 단지 이성적 질서로 귀환하지 않는, ‘감성의 교감과 연대’로 이어질 때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진화하는 촛불집회를 놓고, 지식인 사회는 ‘덜 진화한 학습노트’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현재, 촛불 집회의 현장에서 구현되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실험들은 제도정치가 ‘새로운 제도로 변신’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애당초 ‘농민에 대한 사랑’, ‘친환경’, 그리고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와 같은 청사진은 대통령 취임사에 어울리는 문구가 아니었다.

희망은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의 직접 행동’을 통해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질 때, 그 언어에 찬란한 후광(aura)이 쓰일 수 있다. 희망은 원래 이전까지 없었던 낯선 것에 대한 ‘미래 이미지 만들기’인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