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질서가 힘이다”
        2008년 06월 02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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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이 끝나고 유월이 시작되던 그 밤, 시위대가 동십자각까지 진출했다. 거의 청와대 지척까지 간 것이다. 그 밤에 시위대는 사실상 청와대를 포위했다. 그 시간 직전까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건이다. 과거엔 시청 앞 광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교보문고 앞 종로 대로가 시위대가 갈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미대사관 앞에까지 진출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었다. 그나마도 다시 반복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교보문고 앞 종로 대로를 가득 메우는 것이 한국에서 시위대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의사표현 행위였다. 그 이상은 경찰이 ‘허가’하지 않았다. 경복궁 앞길은 ‘그들’의 길이었지 ‘우리’의 길이 아니었다. 2008년 6월 1일은 경복궁 앞길을 국민이 접수하면서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 때도 수만의 국민이 청와대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경복궁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경찰의 물리력을 뚫을 수 없었다. 물대포, 방패 폭력, 소화기, 버스 장벽 등 경찰이 시도할 수 있는 물리력은 다 동원됐다. 노무현 정부는 집회 자체를 원천봉쇄하기도 하고 기자회견 차량을 끌고 가는 폭거를 저지르기도 했었다.

    노무현 때는 잘 막았는데…

    그에 비하면 이명박 대통령은 물명박 같다. 시위대에게 경복궁 앞길을 내주다니. 정부가 더 착해진 것인가?

       
      ▲사진=손기영 기자
     

    노무현 정부 때의 시위대는 조직대오였다. 시위장이 열리면 노조, 농민단체, 시민단체가 조직별로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깃발 입장 행진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각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발언한다. 마지막으로 성명서 낭독이 끝나고 투쟁이 개시된다. 경찰이 대응하고 결국은 폭력사태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 언론은 노조를 대표로 하는 조직적 움직임을 국민 일반과 철저히 분리해서 보도한다. 한국사회 언론 프레임에 의하면 노무현 정부 때 우리나라엔 세 개의 행위자가 있었다. 노무현 +시위대 +국민.

    국민 입장에선 노무현과 시위대가 싸우는 것이다. 국민은 제3자다. 경찰이 폭력을 휘둘러도 시위대가 맞는 것이지 국민이 맞는 게 아니다. 그래서 경찰이 더욱 과감히 물리력 행사에 나설 수 있었다.

    대통령과 시위대라는 구도가 이번에 깨졌다. 이번 촛불집회는 양상이 다르다. 단일 지도부가 없다. 처음에 촛불집회가 촉발된 것은 인터넷의 불특정다수 여론으로부터였고, 행동에 나선 것은 누구의 지휘도 받지 않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각 조직, 단체들은 뒤늦게 가담했고 그 누구도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어느 조직이 ‘튀면’ 바로 견제당한다.

    시위 현장은 중구난방이다. 행진을 하는데 한쪽에서 “프락치에요 따라가지 마세요!”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그 말 무시하고 계속 가는 사람,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 제 맘대로다. 행렬은 찢어졌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고 그냥 집에 가기도 한다.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연령 구성도 다양하고 통일된 옷차림도 없다. 제각각 일상복에 ‘빤짝이’ 치마, 태극기 망토족, 펑크족도 있다.

    대통령 대 데모꾼, 대통령 대 국민

    이건 운동권 조직 대 대통령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의 저항이다. 노무현 정부 때 전경이 시위대를 때려 죽이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시위대끼리 싸우다 생긴 일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은 구경꾼이었다. 이번엔 시위대가 국민 그 자체다. 대통령은 갑갑하고 경찰은 부담된다. 경찰이 시위대를 때리면 노무현 정부 때는 노조를 때린 것이었지만, 이번엔 ‘국민’을 때린 셈이 된다. 행여 불상사가 터질까봐 새가슴이 된다. 시위대의 진출에 경찰이 노무현 정부 때보다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때 노조가 시내에서 데모를 하면서 군복을 입고 나와 전경과 대치했다면 경찰이 ‘매우’ 공격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시위대가 국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민 속엔 별 사람 다 있는 것 아닌가.

    유모차 끌고, 아이 안고, 교복 입고, 태극기 들고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기란 극히 힘든 일이다. 이번엔 구호도 다르고 노래도 다르다. 태극기와 애국가와 붉은악마의 ‘대~한민국’ 구호가 울려 퍼진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보다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졸지에 경복궁 앞길을 시위대에 열어준 민주적(?) 정부가 됐다.

    물론 이 건 이명박 대통령이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국민이 자신의 힘으로 대통령에게 ‘착해질 것’을 쟁취한 일이다. 과거 운동권 조직된 대오의 투쟁을 바라만 봤던 국민이 팔 걷고 가세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6월 1일 새벽에 동십자각 앞으로 일군의 여자들이 소리 지르며 나타나 “남자들은 경복궁! 남자들은 경복궁!”하고 외쳤다. 몇 명이 이동하자 “멋있다! 멋있다!”라고 외쳤다. 경복궁 좌측에도 대치선이 있었는데 그쪽 상황도 동십자각 쪽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통일된 지휘부가 없으니 자기 쪽 상황이 급박하다고만 판단해서 무작정 다른 쪽으로 와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쇠고기 고시가 있던 날 밤에도 종로 대로를 완전히 점거했었지만 지휘차량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탄핵 당시엔 막강한 스피커 설비가 모든 상황을 통제했다. 이번엔 무질서다. 단일한 힘은 막을 수 있지만 무질서를 어떻게 막나?

    이것이 민주정부에서 수만 명이 시도했어도 성공하지 못했던 경복궁 진출이 이루어진 이유다. 이런 일이 발생한 근저엔 인터넷 담론장의 역할이 있다. 과거엔 조직된 사람들에게만 언론과 다른 정보가 전달됐었는데 지금은 포털 게시판에 날마다 쌍방향 대자보가 붙고 있다. 이 대통령에겐 인터넷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일 것이다.

    조직된 시위대하고만 싸웠던 전 정부와 달리 현 정부는 국민과 싸우고 있다. 그것도 우왕좌왕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국민과. 참 난감할 거다. 애도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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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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