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감옥의 아들에게
        2008년 05월 15일 05: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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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9월 18일, 한국 정부는 전격적으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허용 방침을 발표했다. 2001년 12월 오태양의 병역거부선언 때부터 2007년 9월까지 6년 간 모두 30명이 병역을 거부해 감옥으로 갔고, 그들의 수감기간은 37년, 1만 3,500시간에 이른다. 물론 이 수의 수백 배 많은 여호와의 증인의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

    ‘전쟁없는 세상’이 엮어 ‘철수와 영희’에서 5월 하순경 출판 예정인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1만 3500시간을 담고 있다. <레디앙>은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 실린 병역거부자들의 글 몇 편을 게재한다.

    이번에는 임재성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쓴 글과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싣는다. 임재성은 법대를 다녔지만 법은 잘 모르는 데모쟁이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이후 평화운동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병역거부자들, 평화운동가들과 새로운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먼저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바보같지만 전쟁과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작이라는 깨달음으로 병역거부을 택했다. 서울구치소와 충주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 이후에는 평화주의에 관한 공부를 하고자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재는 한국 평화운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 편집자

    어머니, 엄마, 화해

    지난번 어머니와의 접견 이후에 나와 어머니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나에게 조금씩 느껴졌었고, 오늘 어머니가 넣어주신 접견민원서신을 통해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나라에서 법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다.”

    처음 접견을 오셔서 7분 내내 울다 가시고 나서 얼마 후 어머니는 다시 접견을 오셨다. 미리 확인을 안 하셨기에 다른 이가 예약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접견민원서신을 통해서 본인이 오셨다 갔음을, 지금이라도 한 번만 부모의 말을 들어줄 수는 없는지를 전하셨다. 그 서신과 함께 어머니는 접견물 한도액인 3만 원을 꽉꽉 채운 만큼의 음식을 차입해 주셨다.

    영장실질심사 전날 전화기를 뽑아 던지시면서 이럴 수는 없다고 하시며 오열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수감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나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면회고 자시고 절대 가지 않겠다고, 부모를 이렇게 만들고 가는 자식이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시겠다고, 까지 하셨던 어머니.

       
     
     

    시간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해결책인 시간, 하루하루는 쓰디쓴 약이었다. 포기. 인정. 어쩔 수 없기에. 이렇게 볼 수도 있는 어머니의 변화지만 난 용서, 화해, 사랑이라 부르고 싶고, 생각하고 싶다.

    월요일 날 접견을 오셨지만 역시 다른 이가 예약되어 있었기에 접견을 하지는 못하셨다. 본인이 예약을 하면 다른 이가 접견을 못하기에 그냥 온다는 말씀과 함께 넣어주신, 간절하게 대체복무가 통과되기를 바라신다는 글.

    엄마는 무식해서 병역거부고 평화고 모른다, 남들 다 하는데 왜 너만 이러냐고 하셨던 어머니. “이제는 하느님도 너의 마음과 신념을 아셨으니깐 들어주실거다. 부모는 0.1%의 희망만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

    남은 수감 기간 동안 어머니께 잘 해야겠다. 어쨌든 어머니의 마음을 풀고 날 이해하시게 만드는 것 역시 내 병역거부의 ‘중요한’ 몫이기에. 이젠 날 봐도 울지 않을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빨리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뵙고 싶다. 2005. 3. 29

    사랑하는 아들에게 1

    그제 네가 동네 경찰서에서 인덕원으로 옮겼다고, 오래 전부터 연습(?)한 이별과 앞으로의 과정 중 하난데, 어쩌는가. 어쩌는가. 낮도 밤도 얼기설기 매듭지어져 대책 없고 그래 지옥이다. 여기 지금이 지옥이다.

    아직 네 주소 모르고 이 넋두리 편지는 아마 제 몫을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맘 놓고 써본다. 아마 너한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인지도.

    ‘불구속 수사가 받아들여지면 내일이라도 다시 뵙게 될 거예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하느님. 안 됩니다. 저 아이가 풀려나면 안 됩니다. 지금도 지옥이지만 지난 몇 달을 어떻게 말로 합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헤매고 다닌 아이엄마의 절망을. 다녀오겠습니다 큰절 등 돌려 울음 참던 불쌍한 엄마를.’ 나는 그러고 있었다.

    이 편지는 여기서 끝이 났고 보내지 않았다. 2005. 2. 3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2

    토요일에 받아서 오늘은 기대 안했는데, 편지함에서 재판 전날 쓴 네 편지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그날 오전 9시 전에 법원에 도착했다. 출근하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들과 섞여 안쪽으로 들어왔다. 입구 컴퓨터에서 10시 반 너의 시간 확인하고, 사연 득실했을 법원 뜰을 서성였다. 시간 맞추어 올 것을. 아버지가 항소심 재판에 와 주었으면 좋겠다 해서 오긴 했지만 공연히 온 것 아닐까…. 시간은 더디 갔다.

    서너 명의 판결이 끝나고, 재판정에 들어왔다. 쿵쾅이는 가슴을 양손으로 누르고 힘주어 붙잡고 있었다. 지금 기억나지 않는 어떤 말들이 잠시 오갔고, 네가 ‘최후진술입니까?’ 물으니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하는 동안, 외로운 깃발을 들고 무지 넓은 광장에 서있는 너를, 있는 그대로 내 생각 없이 보려 애썼는데, 네가 울컥 말 잇지 못했을 때, 그저 그 자리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는 아버지 하기 싫었다.

    찬성, 반대 그것의 개념이 없어, 확신이 없어 회색의 상태. 그래서 야속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요즘 그렇지 않아도 감정조절이 안 되는데, 진술 중간부터는 내 심장소리에 아무 정신이 없었다. 옆에 앉은, 아마 너를 보러 온 듯 한 하얀 옷을 입은 여자애가 내 떨고 있는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여기에 와주신 아버지’ 그 말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내가 듣는 내 울음소리는 참혹했다. 그리고 이미 너는 떠났고, 또 한 번의 슬픈 축제가 끝이 나있더라. 거기 벌어지고 있는 세상일은 분명 꿈이 아닌, 바로 내 일인 것을. 맘은! 몸은! 정신 못 차리고 허공에 둥둥 떠서…. 내겐 답이 없었다.

    토요일 편지에서 ‘재판 날이 좋아요. 버스 타는 것이.’ 그래. 아들아 다음에 죽을 것 같이 버스 타자. 어디든 가자. 재판정에 와준 너의 사람들이 많이많이 고마웠다. 너의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시작인 여기서 저만큼 계속 같이 가주고 편지 주고, 하여 세월을 공유해 주면 좋겠다. 꼭 그러리라 믿는다. 계획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라. 아프면 안 돼. 운동하고 많이 자고 양치질 꼭하고 함께 건강하자. 다음 주 만날 때까지 안녕. 2005. 5. 23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3

    사람의 방식으로 금 그어 놓은 시간의 형식. 2005년 마지막 날이다. 가는 해를 어쩌고 오는 해를 종치어 대며 요란법석. 그래 잘 가라. 잘 가라. 세월의 법을 만드신 신께 감사. 너에게 지금 서신 보낼 수 있어 감사.

    여한 없이 사랑한, 온통 사랑만으로 그득하였던 2005년. 그 마지막 날이다. 아들아 수고했다. 축하하자. 네가 구속되는 날, 널 보내면서 정신 반쯤 나간 아버지. 창살 안에서 삶은 달걀이랑 우유 맛있게 먹어주던 내 새끼. 규정이 아니라면서도 허용한 성북서의 순경 아저씨. 추운 날 성냥팔이 소녀처럼 떨면서 널 기다리던 지연이. 이제 생각하면 전설이다.

    서울 구치소가 있는 인덕원의 봄날, 여름, 코스모스 꽃길까지 거긴 철철 넘치는 사랑의 바다. 8월 엄청 뜨거웠던 날, 대법원 판결. 오전부터 증권방송에서 토막소식으로 전해지더니, 저녁 라디오에서 너의 실명이 나오고, 신문마다 네 기사 났다.

    엄마는 방송국에 전화해 9시 뉴스담당자를 바꿔 이름만이라도 빼달라고 부탁하시고, 비를 맞으며 네 기사 난 신문들 뭉치를 가슴에 안고 오셨다. 그 때 우리는 네 기사 난 신문 전부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모르셔야 합니다. 하느님,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잘 넘기게 해주시면 남 탓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기도했고 엄마는 행동하셨다. 그래, 너랑 엄마는 꼭 닮았구나. 새삼 느꼈었지. 2005년 8월 2일이었다.

    고맙게도 이제는 기억으로, 그렇게 세월이 갔다. 충주 쪽으로 이감. 버스, 전철, 고속버스, 다시 고속버스 갈아타면서, 널 만나러 가던 아버지의 여정. 널 만난 후, 30년 전의 추억을 더듬어 충주 시내를 서성이기도 하고, 터미널 벤치에 앉아 집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 먹으며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익명의 자유’. 그 갈증을 달래고. 가을 늦가을 겨울을 살았다.

    살며 사랑하며, 살며 기다리며, 지난 번 널 만나러 가면서, 충주터미널 화장실에서 안구건조증에 넣는 인공눈물을 넣으며 평생 운 것보다 더 많이 울었는데 안구건조증이라니. 거울 속의 날 보며 사는 것이 이런 거지, 뭐 별 수 있겠는가 푸념하며 비실 웃었다.

    아들아. 혹사하지 마라. 네 말처럼 운동도 공부도 잘 먹으면서 하는 거야. 건강하게 돌아와서 해.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네가 고맙다. 알아. 왜 힘들지 않았겠니. 힘든 내색 안 한, 어쩌면 못한 네가 매번 안쓰러웠다.

    ‘아버지. 힘들어요.’ 그랬으면 내 심장이 터졌을 거야. 그걸 너도 아니까 아무 내색 없이 눌러 참은 네 속은 어떨까?

    아들아. 많이 왔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꼭 꼭 건강해라. 2005년 마지막 날에,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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