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희망은 있다"
        2008년 04월 16일 08: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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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국회의 출현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이라는 약점 투성이의 전직 기업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9 총선은 한나라당에게 153석을 가져다 주었다. 언론에서는 대운하의 추진여부가 진보세력과 사회운동이 아닌 자유선진당(18석)과 친박연대(14석), 그리고 일부 박근혜 계열의 무소속 의원의 손에 달려 있는것처럼 보도한다.

    그만큼 보수세력의 승리는 압도적이다. 모두 합치면 보수세력이 차지한 의석은 200석에 육박한다. 이 정도면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바꾸어 놓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완화, 상속세를 포함한 각종 세금 감면, 공기업 민영화 등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다.

    한국의 독점자본은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후 염원했던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스스로를 국가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국적 자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꾸준히 민주주의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1997년 IMF 위기 이후 사회의 양극화가 한국사회를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가치에 역행하고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정당이 다수당 되어 버린 이런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던 재벌들이 경제적 독점을 넘어서 정치적 권력까지 좌지우지 하게 된 것일까?

    불리한 조건들

    좌우파를 넘어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런 상황의 원인 제공자는 두 번의 자유주의 정권들이다. 두 번의 자유주의 정권들은 스스로의 정치기반에 배치되는 정책노선을 추구하면서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토대를 상실했다. 정권을 창출해준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친재벌적인 시장중심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지기반을 급격히 이반하게 했지만, 이러한 정책의 수혜자인 기득권층은 굳건한 한나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았다.

       
    ▲ 통합민주당 선대위 해산식 (사진=통합민주당)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화의 성과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절차적’ 민주주의로 제한하고 시장적 경쟁강화를 민주주의의 심화로 오도함으로써 보수가 원하는 것을 진보의 이름으로 완성했다.

    보수파는 이러한 조건을 이데올로기투쟁에 이용했다. 신자유주의적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낙인찍고, 보수파가 공유하고 있던 시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양극화를 좌파정권의 무능으로 몰아부쳤다. 보수층을 겨냥한 대북한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강화시키는 유효한 무기였다. 자유주의 정부는 결코 진보적이지 않은 시장자유주의를 진보로 내세웠고, 보수적 야당은 그것을 좌파로 낙인찍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진보는 말뿐이었고, 보수파들의 진보는 실체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적 이데올로기투쟁은 진보의 가치를 공동화시켰다. 자유주의자들의 ‘내용 없는’ 수사로서의 ‘진보’는 진보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자유에 근거한 경쟁력제고와 등치시킴으로써 시장의 실패가 필연적으로 초래할 극단적인 사회양극화의 원인에 대한 ‘진보적’ 비판 담론, 즉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이 형성될 공간은 급격하게 축소시켰다.

    보수파의 ‘실체 없는’ 대상으로서의 ‘좌파’에 대한 공격은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를 시장논리의 전면화와는 별개인 무능한 진보 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진보를 시장논리에서 찾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을 정부의 무능과 동일시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사회적 기반(신자유주의적 정책의 희생자들)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운동, 특히 민주노동당은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제한된 절차적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행을 넘어서는 대안을 찾으려 했지만, 일상생활과 대중에 깊이 뿌리박지 못한 상층 중심의 정치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민주화 이전에는 대단히 배타적인 소수의 정치집단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상황,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이들은 소위 재야를 형성했는데, 민주화 이후에 이들이 체제내로 포섭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재야는 소수의 정치집단이었고 상징적인 정당성을 넘어서는 사회적 기반이 대단히 약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억압적 정치구조가 이같은 상징성만으로서 대중을 움직일 수 있었을 뿐 그들을 대중정치집단 또는 사회운동집단으로 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김근태를 보라).

    민주화 이후의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러한 정치 엘리트들의 상징적 정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항담론은 아직 한 번도 정치세력화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잠재적 불만이 표현되고 토론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세력, 즉 체제내로 흡수된 정치엘리트와는 차별화된 정치세력으로서의 좌파는 위에서 지적한 새로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제한된 절차적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행을 넘어서는 대안을 찾으려 했지만, 사회적 기반을 가지지 못하는, 그래서 상징적인 정당성만으로 정치를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강을 건너간’ 정치엘리트들과 큰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당성 정치의 한계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절차적 민주주의 진전과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복합적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한계 즉 일상생활과 대중에 깊이 뿌리박지 못한 상층 중심의 정치라는 한계는 공유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한계와 진보세력의 무능은 국민, 특히 젊은 층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했다. 이번 총선에서 54%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포기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보수층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투표용지에 인쇄된 후보자들과 정당들에서 자신들의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참여의식을 대체한 것은 정치적 무관심을 넘어선다. 시장만능주의가 유포시키고 있는 경쟁과 이윤의 논리에 의해 구성된 극단적 개인주의적 의식이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권들에 의해 ‘완성된’ 신자유주의체제와 진보세력의 무능은 한국사회전체에 시장원리가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비록 스스로는 비정규직으로 고통받고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그것을 개인의 경쟁력 문제로 돌린다. 국민은 대한민국의 ‘시민’이 아니라 ‘한국주식회사’의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요, 그것에 투자하는 ‘투자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다. 성공하는 소수가 모든 것을 독식함에도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투자한다면 그것이 도박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도박’은 주식시장을 넘어서 사회 곳곳을 카지노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와 투자자로서의 주체성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팽배와 도덕적 불감증을 만연시켰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출현은 극단적인 사회양극화를 정당화할 있는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자유주의 정권의 태생적 한계와 실패, 진보세력의 무능, 그에 따른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 그리고 시장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개인주의적/소비주의적 주체성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보수파가 절대 다수를 이루는 국회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정권 재창출의 조건이 국민의 불만과 저항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상의 불만과 저항은 제도정치의 제한된 공간(특히 투표소)에서 표현되기에는 너무 복합적일 뿐 언제나 존재한다. 제도정치를 넘어선, 그리고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넘어선, 인간의 권리와 필요에 근거한 대안적 정치실천의 공간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불만과 저항은 집단적인 저항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 부르주아 정치의 한계와 저항의 가능성

    문제는 잠재적이고 맹아적인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과 보수적 역사적 블록의 형성이라는 ‘비관적’ 상황 인식이 서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는냐는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보수파가 권력을 장악한 조건에서, 그리고 그것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 대중의 개인주의적/소비주의적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맹아적으로 존재하는 저항의 가능성이 현실적인 저항으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곧 진보정치의 전략을 재구성하는 출발점일 것이다. 우선 원론적인 답을 제시하고 좀 더 구체적인 정치적 기획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먼저, 대선과 총선의 결과만으로는 국민정서의 보수화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국민의 불만과 저항은 제도정치의 제한된 공간에서 표현되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선거 또는 투표행위는 다양한 불만과 저항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기 보다는 억제하고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국민은 그것 말고는 다른 정치적 통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양한 맹아적 저항(맹아적 헤게모니라고 부르자)이 카운터 헤게모니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잠재적인 맹아적 헤게모니가 발아할 수 있는 실천의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천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통의 의제에 도달할 수 있는 연대의 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부재한 상태에서 제한된 투표행위가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맹아적 헤게모니가 대안적 실천의 공간을 창출하고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맹아적 헤게모니가 발생하는 국지적 갈등을 넘어서는 총체적 인식이 필요하다. 총체적 인식이 부재하다면 다양한 불만은 공통의 적을 찾기 보다는 상호 충돌함으로써 그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생산과 분배구조에 대한 비판적 접근보다는 제한된 자원에 대한 배타적 경쟁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국내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배타적 경쟁의 상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약간의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끊임없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한 지속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규직,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의 배타적 경쟁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총체적 인식의 장애물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원과 정보, 그리고 지식의 불평등한 분배다. 우리는 대형 할인매장이 어떻게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제약회사들이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불필요한 약품을 양산하고 중독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다.

    제조업체들이 제3국으로 진출해서 그곳의 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그곳의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공무원·관료집단과 건설자본이 어떻게 유착되어 개발이라는 명목하게 우리의 삶의 기본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정보와 지식은 전문가들에게 독점되어 있고, 언론은 그것을 왜곡한다. 이런 조건에서 맹아적 헤게모니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보, 지식, 자원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또 다른 장애물은 우리들 일상의 구조적 조건이다.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은 문화와 생활방식, 즉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이런 이유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불만과 저항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무리 지배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완벽하게 자본주의화 또는 상품화할 수는 없다. 지금은 이것마저도 붕괴하고 있지만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자본의 논리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공동체들에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리는 상호이해와 존중 그리고 협동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수세에 몰려 있는 기존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안적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생활공동체, 생활협동조합 같은 대안적 운동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더 나아가 당활동이 선거운동을 넘어선 대안적인 실천의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제기되고 그것들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데 앞정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진보운동은 이러한 대안적 생활, 실천의 공간을 지키고, 만들고 확장시켜야 한다. 그 속에서 대안적 인간관계, 타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적 윤리와 더불어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그 내부 안에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을 가능하게 할 균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시장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는 자율(autonomy)과 자유(freedom)다. 이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다양한 담론을 발전시켜왔다. 자율과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경제가 개개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가장 최적으로 충족시키는 제도라는 것이 시장자유주의자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나 시장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시장이 초래한 파국적 현실과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이 시장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이윤추구와 경쟁에 맞추어진 경제적 동물로서의 개인들의 자율과 자유가 대다수 인간의 자율과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 내적인 문제도 지적되어야 한다.

    현실과 이론 내적인 부정합성으로터 우리는 진정한 자율과 자유를 주장해야한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해야한다. 그것은 시장자본주의가 결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진영의 이데올로기투쟁이다.

    진보세력 무엇을 할 것인가?

    자원, 지식, 정보의 불평등한 배분을 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급진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불충분하다.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가진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러한 조건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민주적 참여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민중의 능력제고(empowering the people)이라고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의 능력제고는 ‘정치’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는 이미 구획된 좁은 의미의 정치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규정한 ‘비공식적’ 또는 ‘비정치적’ 영역을 정치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경제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을 정치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비정치적 영역의 정치화는 좁은 의미의 정치 즉 제도정치의 확장과 변화를 의미한다. 비공식적 영역의 정치화란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의 모든 영역을 민주적 참여와 토론에 개방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에 제도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의 원리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국가의 민주화(democratisatioin of state)”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민주화의 제 1의 목표는 자원, 지식, 정보의 급진적 재분배에 의한 대중의 능력제고가 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만큼 효과적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은 이윤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 가사노동, 육아, 돌봄노동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자연자원의 낭비와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이상변화(기후변화를 보라)는 가격과 이윤을 통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 헤게모니 전략은 사회(사회운동)가 시장을 통제할 수 있도록 가능한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가능한 정보와 자원을 통해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사회(사회운동)이어야 하지만 그 자원과 정보를 민주적으로 배분하는 것은 민주화된 국가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민주화

    즉 국가의 민주화는 대중의 능력제고를 통해 국가 스스로 뿐만 아니라 시장 또한 사회의 민주적 통제에 종속시키는 전략의 일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의 두 과제는 사회(사회운동) 또는 민중의 능력(capabilities 또는 capacities)의 신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보적 정당 또는 정치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국가기구와 지방자치단체를 사회로부터의 캠페인을 통해 압박할 수 있다. 진보정치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시적(pre-figurative) 실천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가 시민사회에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 자체가 사회의 통제를 받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제고된 사회의 역능은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

    대안적 사회변혁전략의 제도화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를 의미하며 이것은 곧 제도화가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한층 진일보한 운동의 정치를 보장하기 위한 단계를 의미한다. 대중의 능력을 제고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이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운동의 정치(대중의 확장된 민주적 참여와 이를 통한 국가와 시장의 민주적 통제)는 다시 더 많은 사회의 직접적 참여를 보장하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즉 운동의 제도화를 강제할 수 있다. 이것을 제도화와 운동의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정치(institutional politics)와 비제도정치(extra-institutional politics)의 결합,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은 일상생활의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이 어떻게 과학적 분석(scientific analysis)과 결합할 수 있는가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은 모순과 갈등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고립된 개인으로서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계급(social classes) 또는 사회세력(social forces)의 구성원으로서 그렇게 한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사회계급 또는 사회세력은 현존하는 질서에 대해 도전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들의 현실 인식이 파편적이라는 것에 있다. 일상에서 얻어진 실천적 지식은 문제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총체적 분석까지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직면한 당장의 문제가 더 큰 사회적 모순가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분석이라고 부를 수 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 분석이 완벽하게 사회구조를 설명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 착취, 빈곤, 차별, 불평등 같은 사회적 모순이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드러나고 있는 양상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동시에 다양한 비판적 시각들이 접근방법이나 초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사회구조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 과학적 분석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실천적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이것을 넘어가는 ‘과학적’ 지식은 교조, 독단, 권위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합리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증거, 일관성, 적합성 등의 합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서로 토론함으로써 발전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진보정치의 새로운 원리에 따르면 과학적 분석은 각각의 행위자들(물론 사회계급 또는 사회세력에 일원으로서)이 실천에서 채득한 실천적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여성운동, 지역운동, 평화운동, 노동조합운동 등에서 축적된 실천적 지식이 없이는 과학적 분석은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과학적 분석이라고 해도 출발점이 같을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신고전파경제학을 비판하는 대안적 경제학은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부장적 질서가 자본주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가 자본주의 시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주의와 생태주의자들 모두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같은 대상을 비판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다른 면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공통의 대상이 과학적 분석을 통해 대화와 토론 그리고 지식의 발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연대의 가능성이다.

    요약하자면, 지식 구성은 실천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생산적 결합의 과정이며 (실천적 지식이 없는 과학적 지식은 공허하고, 과학적 지식이 없는 실천적 지식은 맹목이다!!), 이러한 실천적 지식이 구성되는 장은 제도 바깥뿐만 아니라 안일 수도 있으며; 제도 안팎의 동시 투쟁은 다양한 사회계급 또는 사회세력으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운동간의 연대에 의해서 가능하다.

    필자의 입장은 반자본주의적 투쟁은 최소한, 사회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적 시각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그러나 동시에 이 각각의 시각이 큰 틀 안에서 생산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정당이 해야 할 핵심적 임무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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