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전태일에게
    2008년 04월 12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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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 18일, 고 허세욱 동지의 추모제 모습.
 

난 당신이 위대해지는 것도
거룩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거룩한 것들은
민중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다
거짓을 위한 동상이었고
대중을 무지로 이끄는 아편이었고
진실을 가리는 방패막이었다
누군가의 비겁과 위선과 체면을 위한 그럴듯한 수단이었다
그것을 위해 이 시를 읽어야 한다면
나는 거부하겠다. 당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안성평야에서 땅 한 평 없는 9남매 중 다섯째였고
리어카를 끌던 열다섯 어린 시장배달부였고
마흔에 갈 곳 없는 철거민이었고
쉰 넘어까지 월셋방 혼자 살며
죽어라 악셀을 밟던 택시운전수였다

더더욱 당신은 죽지 않았다
여기 살아 있다. 나는 오늘도 당신을 만난다
최저임금 쟁취 택시공영제 실시를 외치며
오늘도 콘테이너로 모여드는 가난한 운짱들 속에서
100일째 고공농성중인 인천 지엠대우 비정규직 천막에서
1년이 넘어가는 광주시청 비정규직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천막에서
노숙 1000일을 내다보는 기륭전자 천막에서
또 그렇게 싸우고 있는 코스콤에서 콜텍에서 콜트에서
한국합섬에서 코오롱에서 이젠텍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당신을 만난다
말을 아끼며 순박한 당신을 만난다
걱정스럽게 천막을 들춰보고 가는 당신을 만난다
떡봉지를 과일봉지를 놓고 가는 수줍은 당신을 만난다
당신은 그렇게 생전과 다름없이 어디에나 있다
국제반전행동의 날이 열린 서울역 앞
용산 국방부 앞, 홍제동 대공분실 앞
투쟁과 연대가 있는 곳이면 당신은 어디나 나타난다
나는 당신을 고양시 가로수에 목을 멘
붕어빵노점상 이근재 씨 빈소에서 보았고
인천에서 당신처럼 불길로 타오른
전기일용노동자 정해진 열사 빈소에서도 보았다
뉴타운개발에 밀려 외곽으로 쫒겨가는
가난한 이삿짐 일을 돕고 있는 당신을 보았고
새벽2시 시청역 노숙자들 곁에서 새벽5시 인력시장에서
오후 7시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좌판 앞에서
발길 돌리지 못하고 물끄러미 서 있는 당신을 보았다

당신은 그렇게 모든 소외된 자리
모든 투쟁의 자리에 함께 있다
자리에서마다 당신은 말한다
평등과 평화가 있어야 한다고
한미FTA는 이 모든 무장한 세계화 세력들이
노심초사 꿈꾸는 이 땅 식민의 완결판이라고
보라. 동지여. 이 거대한 자본의 감옥
폭력의 전장, 소외의 정신병동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는가라고
당신은 살아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죽어 있냐고
자본과 제국에 종속된 죽은 삶을 깨치고
이제 그만 산 목숨으로 돌아오라고
안타깝게 묻고 있다. 우리들이 알아서 죽고 죽이는 일상적 죽음들이
차근차근 금이 되고 화폐가 되고 증권이 되어
집문서 땅문서 콘도별장골프장 온갖 소유문서로 쌓여
단 몇 사람의 금고에 1조, 2조, 3조, 4조로 쌓여가고 있는데
초등학교 교과서만도 못한 상식에 절어 무얼 하고 있느냐고
세련된 족쇄일뿐인 현실에 매여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
왜 오지 않은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느냐고
왜 연대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왜 절규하며 새롭게 태어나 나아가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대답해 달라고

대답하라. 산 자여!
대답하라. 죽어 있는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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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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