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열할 때 발전했다”
    2008년 02월 16일 12: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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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은 7포인트로 A4 두 페이지.” 최기영이 내게 대해 이북에 보냈다는 보고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확인해두자면, 이는 국가정보원의 ‘일심회 조작’이 아니다. 잡혀가기 훨씬 전에 최기영이 떠벌리고 다니던 말이다.

최기영이 떠벌리고 다니던 말들

이런 말을 들은 민주노동당의 당직자들은 ‘참 실없는 사람일세’라고 생각했고, 더러는 “그럼 나는 뭐라고 보냈어?”라고 우스개로 되물었다. 어떤 신문 취재팀은 이른바 ‘일심회’를 이중간첩 사건이라고 결론 냈다지만, 적지 않은 민주노동당 간부들은 그런 ‘웃기는 007’ 사건이 곧 터지지 않을까 내심 저어했었다.

어쨌거나 최기영은, 농담인 척 ‘공화국 전사’를 자처하며 그리 인정받길 바랐다. 그런 점에서 “조작이다, 억울하다”는 민주노동당 당대회의 결정은 최기영의 소중한 꿈을 짓밟은 것이다.

   
▲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의 극명한 의견 대립 (사진=진보정치)
 

주체사상파인 민주노동당의 한 당직자는 ‘일심회’를 “자주파 내부에서의 조직적 열세를 이북의 권위로 상쇄하기 위한 투기적 맹동”이라 규정했었다. 그들은 ‘최기영 보고서’라는 걸 돌려보며 자신들에 대한 혹평에 비분강개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지 지난 2월 3일 민주노동당의 당대회에서는 자신들의 신심(信心)을 극구 부정했다.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수십 번이나 “종북 없다”고 외쳤다. 왜 그랬을까?

북쪽의 ‘라이선스’

첫 이유는 공범 의식이다. 대한민국의 끔직한 상황은, 그리고 젊은이들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제도교육은 수많은 주체사상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태권도장이 동네 초등학생들 모두에게 노란띠 주는 것처럼 모든 주체사상파들의 충성심이 증명되는 건 아닌지라, 북쪽 ‘라이선스’가 가지는 권위와 신망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 ‘라이선스’는 대단히 위험하다. 따라서, 선망하고 탐하되 비기(秘器)를 가졌다 말하지 말라! 이것이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다시 확인된 종북 공범들의 불문율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조금 복잡하다. 국가를 넘어 외부와 소통하는 정치세력 모두가 자신을 숨기지는 않는다. 서유럽의 여러 공산당들은 ‘소련 대사관’으로 행세했었고, 대만의 진보정치 세력은 모택동주의를 추종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 왜 유독 남한 주체사상파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숨기는 것일까? 국가보안법이 무섭다지만, 유럽이나 대만에서 그런 법에 피해받은 정도 역시 현재의 남한에 못지않다. 그렇다면 왜?

이북이 실제로 위협적인 세력이었던 과거에는 소련이나 중국처럼 ‘든든한 빽’ 삼아 행세하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남한에서 북한이란 낙후, 가난, 몰상식, 비인간의 상징이다. 즉 조롱과 희화의 대상이다. 남한 국민은 북의 핵무기가 자위(自慰)용임을 인정한다.

주체사상파도 이런 정황을 너무도 잘 안다. 솔직히, 유럽 공산당과 대만 진보정치 세력과 민주노동당 주체사상파의 차이는 탄압받는 정도가 아니라, 인민으로부터 비웃음 받는 정도와 스스로의 떳떳하지 못함에 의해 갈리는 것이다.

분열 없었더라면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없었다

‘양식 있는 식자’들은 분열을 걱정한다. 안 그래도 작은 세력이 나뉘어 공멸할 것을 걱정하며, 화해와 통합을 주문한다. 걱정 마시라. 자주파와 평등파의 분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 뿐더러, 그런 분열을 겪을 때마다 한국 진보운동은 발전을 이루었다.

1987년 인민노련은, 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선거에 대한 방침을 두고 갈렸다. 이때부터 NL이니 PD니 하는 노선이 실천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했다. 1990년 전국노운협 중앙위원회에서는 민중당에 대한 태도를 두고 다시 분리가 일어난다.

이 두 번의 분열을 통해 자유주의 정당 지지 노선에 대립되는 진보정당 건설 노선, 한국노총 민주화 노선에 대립되는 민주노조 건설 노선이 독립적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그 분열의 산물이다. 87년과 90년의 분열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NL이 주장하는대로 한국노총과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신당파’조차도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1987년에 분리됐던 민주노동당 정책 책임자 이 모씨 등의 세력, 1990년에 분리됐던 정 모씨 등의 세력을 중앙당에 불러들임으로써, 그 노선의 올바름을 역사적으로 증명했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분열되며 사멸하는 것은 그 실패가 아니라, 낙후 운동을 합류시키는 과제가 조직 형식적으로 완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새 과제를 찾으려면 다시 갈라서야 한다. 분열만이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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