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의 통일전쟁, 그 처절한 실패
        2008년 01월 08일 05: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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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4월 중국 공산당은 미군의 개입을 우려한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자강을 건넜다. 미군은 개입하지 않았고 몇 달 뒤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해 6월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8월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했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 병력이 북한으로 들어가며 군사력의 균형은 깨어졌다. 50년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은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면 전국의 공산 저항세력이 봉기하여 전쟁은 3일 만에 끝낼 것이라고 호언하며, 6월 25일 개전하였고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공군은 이미 6월 26일 한반도 상공에 나타났고 전국적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7월 1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며 김일성의 남침은 개전 후 일주일 만에 실패임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9월 15일 이후 미군의 북진이 본격화되며 11월이 되면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북한 정부는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김일성의 남침, 오판과 실패

    이것이 김일성의 한국전쟁에서의 역할이다. 이후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은 위기를 넘겼지만 작전지휘권을 상실한 김일성은 전쟁 도중 특별한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 전쟁 중, 인민지원군 총사령 팽덕회(彭德懷)와 김일성
     

    한국전쟁의 개전은 많은 신화를 낳았다. 첫째, 한국전쟁은 북침으로 개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이 개전을 위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으려 할 때 스탈린이 제시한 조건이었고 전쟁 직후 북한의 공식발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현재 북한의 공식입장이다. 북한 저작물 『력사가 본 조선전쟁』은 한국전쟁을 “한국을 아시아 반공 전초기지로 만들고 전쟁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는 미국과 선거 패배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야합해 먼저 북을 침공해 발발한 전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일부 한국전쟁 연구 학자들이 이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이러한 신화는 북한 이외의 지역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남침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료가 너무도 많이 나타났다.

    와다 하루끼의 『한국전쟁』,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이 점을 사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2005년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강정구 교수의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또한 북의 남침을 인정하고 있다.

    둘째, 김일성은 50년 6월 25일 ‘기습남침’ 했으며, 북한은 여전히 한국 공산화를 위해 ‘기습남침’을 조만간 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김일성이 미군의 불개입을 확신하고 전쟁을 개시했음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한 조선인 병력의 귀환, 소련의 군사원조 등으로 군사력 균형이 무너져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은 미군의 개입여부였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공산화를 위한 남침을 준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한 위험이 존재했던 시기도 없다. 그러나 남침의 가능성은 정치적 이유로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런 논의가 사라진 것은 98년 정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북한의 기아 실상이 알려짐으로써 북한 위협론이 대중적으로 근거를 잃었다는 것, 그리고 외국 자본 도피를 현실로 경험하면서 북한의 남침 가능성 제기가 국내 금융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는 점 등 때문으로 보인다.

    정규전을 경험하지 못한 김일성

    셋째, 김일성이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신화화했고 남쪽에서도 북한 위협론을 강조하려는 측면에서 이를 그다지 반박하지 않았다. 1912년생인 그가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 유격전 등 대일항전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극히 소규모 무력 충돌을 경험했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2차대전을 겪지 않았다. 40년대에 그는 일본과 불가침 상황인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탱크, 비행기, 레이다가 동원된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고 전쟁에서 공군의 역할과 미국의 위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한 채 개전을 주장했다. 김일성의 개전에 동의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김일성의 예측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개입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고 중국의 개입이 문제가 되었을 때 공군 투입을 거부했으며 이후 공군을 투입하면서도 철저히 위장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했으나 어차피 미국과 한 번 힘으로 대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개전에 동의하였다.

    이승만 역시 김일성의 개전시 미군의 개입 불가피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38살의 김일성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충분히 통제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만나는 자리에 박헌영이 동석했고 38선 이남의 공산당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박헌영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신화화된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낙하산이었다.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의 역할이 임진왜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2차 대전에서 히틀러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은 분명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그는 갈대밭 한가운데서 총을 들고 대치하다 상대에게 화염병을 던졌다. 이후 그가 일으킨 불길은 그 자신이 가진 것들도 거의 불태웠다. 김일성을 구한 것은 중국혁명시 그의 기여,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다시 박헌영과의 경쟁에서 스탈린의 낙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에서 박헌영 간첩론은 그래서 중요하다.

    98년 이후 햇볕정책의 성과 중 하나는 한국에서 한국전쟁의 신화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등은 전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때 한국에서도 북침설이나 ‘김일성 장군’의 신화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의 신화 극복이 북한과는 별 관계없이 이루어졌듯, 북한의 신화 극복 역시 북한 자체의 논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그리 가까워보이지는 않는다. 각자 신화화된 전쟁을 극복하기 전에 정치적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오랜 평화가 필요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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