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 아동문학와 통일이 만났을 때
        2007년 12월 07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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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에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언론은 앞을 다투어 2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보도를 쏟아내기에 바빴고, 한미자유무역협정과 비정규직법을 서둘러 밀어붙이며 노동자들을 잇달아 분신하게 만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2차 남북 정상회담 덕으로 오랜만에 올라갔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민들에게 남과 북이 만난다는 것은,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욕을 먹던 대통령의 지지율이 갑자기 올라갈 만큼 특별한 그 무엇이다.

    이 땅의 인민들은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걱정 속에서 반백년을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통일을 뜨겁게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상의 공동체와 현실

    또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인민들은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 말한 ‘민족’이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떠한 성격의 통일이든지 상관없이 어서 통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통일지상주의는 민족주의와 맞물려 널리 퍼져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러온 이 땅의 인민들에게, 분단을 넘어서 통일을 이루자는 말은 그들의 감정에 쉽게 호소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통일이 감정만으로 되지 않는 문제임은 확실하다. 통일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 속에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남과 북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이제 통일도 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전에 비해 대화가 늘어나고 직접 만나는 횟수도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남과 북의 만남은 오로지 정권과 자본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일은 오로지 남한의 자본이 북한 땅에 공장을 세우고 북한의 노동자들을 싼 임금으로 착취하는 것뿐이다. 이른바 경제 협력이라는 문제에 비하여, 남과 북의 민중이 서로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사정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뒤주』(이준호, 사계절, 2007)는 이러한 현실에서 나온 작품이다.

    한국판 판타지의 전형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실수로 인민군에 끌려간 큰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의 주도 아래 개성에 공단이 생기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어도 북에 있는 식구의 소식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전화가 울리면 바로 받을 만큼 큰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소식을 기다리는 일 말고도 정성을 다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새벽 두시 오십분만 되면 뒤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민제는 뒤주 안에 들어가 보는데, 덕분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뒤주 안에 들어가면 과거의 어떤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현실과 환상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를 뒤주로 설정한 것은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돋보이는 설정이다.

    해리 포터에게 구와 이분의 일번 승강장이 있다면, 민제와 할아버지에게는 뒤주가 있다. 뒤주라는 지극히 토속적인 소재를 통하여 서구 판타지의 소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닌, 한국 판타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소재의 전형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뒤주』의 판타지는 한국 역사 속의 비극들과 만난다. 일종의 역사 판타지인데, 이는 김기정의 『해를 삼킨 아이들』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해를 삼킨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동화의 특성이 두드러진 데 반하여, 『할아버지의 뒤주』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분명하고 그 매개체로 뒤주가 존재함으로써 판타지 소설의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판타지와 비극의 역사가 만날 때

    흥미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비밀을 밝히면서 전쟁과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비극과 겹쳐진다. 할아버지는 큰할아버지의 사건보다 앞선 시간으로 되돌아가 큰할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가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계속하면서 모든 사건은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벌어졌던 과거의 사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민제에게 이러한 인과론에 대하여 말을 하지만, 어린 민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민제는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뒤에 갈수록 위험해지는 시간 여행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과거 속에 들어가 행했던 일들이 현재의 결과로 나타남을 깨닫는다. 민제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연속성, 그리고 역사의 인과율 등을 깨달아 간다.

    그러나 민제는 큰할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큰할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갔다는 이미 벌어진 사건에는 개입하지 못하더라도, 끌려가고 난 뒤의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결국 큰할아버지를 구해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끌려가기에 앞서서나 끌려간 뒤에나 과거의 사건에 개입한 것은 같은데, 인과율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큰할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갔다는 과거의 사실이 큰할아버지가 도망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할아버지가 우려했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개입이 아니던가?

    만약 과거가 이런 식으로 수정되었더라면, 할아버지는 민제에게 처음부터 큰할아버지가 끌려간 것이 아니라 끌려갔다가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어야 옳지 않을까?

    통일은 판타지인가

    아무튼 이 작품은 시간 여행이라는 흥미 있는 소재가 역사의 비극들과 맞물리는 독특한 구성을 가진 판타지이다. 특히 전쟁과 분단 현실의 아픔을 느끼게 하며, 인과율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등 여러모로 생각해볼 문제들을 던져준다.

    특히 서구 판타지의 답습이 아닌, 한국의 역사와 지금의 슬픈 분단 상황까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독창적인 판타지의 창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통일은 일종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통일이 이루어진 세상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그러나 간절히 바라는 세상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뒤주』를 통하여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간절히 바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인과율을 따져보지 않고 무작정 뛰어들면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간절히 원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통일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통일이냐 하는 점이다.

    곧 대선이 치러진다. 누가 되면 통일에 유리하고 누가 되면 통일에 불리하다는 식의 예측들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정답은 누가 되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북과 만날 것이며, 필요하다면 통일이라도 추진할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이 주도하는 통일이 이루어져서 북한이 남한과 똑같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통일의 상이 될 수 없다. 통일이 이루어진 세상은 지금의 남한과도 혹은 북한과도 다른 정치경제 체제를 갖춘 사회여야만 한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 통일지상주의에 빠져 무작정 통일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통일 뒤에 올 대안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할아버지의 뒤주』는 훌륭한 판타지 작품이지만, 통일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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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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