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이상 없이 사민주의 불가능
    2007년 11월 27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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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답변이 늦어진 점 죄송하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고민할 일이 많았고, 또한 이 논쟁이 대선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지라 어떻게 하면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좀 늦어지게 되었다.

전문가들 참여 토론 수준 높여주기 바란다

한가지 전제를 하고 넘어가자면, 사회주의-사민주의 체제 논쟁과 같이 주요한 논쟁은 최병천 동지(이하 존칭 생략)나 필자와 같은 활동가들이 지나치게 폭넓게 가져가기에는 부담이 되는 논쟁이다. 필자는 이러한 토론에는 가급적 주요한 전문가들이나 이론가들이 참여하여 토론의 수준을 높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다.

사실 필자와 같은 활동가는 지금까지의 연구와 탐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필자와 최병천은 2006년 지방선거에 함께 출마한 적도 있는 대중정치운동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적 과제까지 자신의 과제로 가져간다는 것은 한국 진보운동의 발전에서 그닥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덧붙여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진보적 이론가, 지식인들도 필요하다면 이 토론에 개입해주어 토론의 수준과 <레디앙> 독자들과 관심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올려주었으면 한다.

사민주의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핵심은 사회주의

최병천이 지난 기고에서 필자에게 물었던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하여는 마지막에 답변을 하기로 하겠다. 글의 시작은 조금은 구체적인 논의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먼저 최병천과 독자들께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한 사회의 소득불평등도를 측정하는 주요한 지표로서 지니계수가 있다. 이 지니계수는 0부터 1사이의 값을 가지는 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것이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민주의의 대표적 국가로 꼽히는 스웨덴, 핀란드, 독일의 지니계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정답은 ‘세금을 떼기 전에는 우리나라보다 높고, 세금을 뗀 후에는 우리나라보다 낮다’는 것이다.

필자가 몇몇 자료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비록 비교시점의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세금을 떼기 전에는 0.449이고, 세금을 떼고 나면 0.218이 된다. 핀란드의 경우는 0.379와 0.209이고, 독일의 경우는 0.395와 0.249이다.

한국의 경우는, 2000년 통계에 따르면 0.374와 0.358이 된다. 달리 말하면 사민주의 국가들이 세금을 떼기 전에는 한국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민주의 국가 세금 떼기 전엔 한국보다 더 불평등

   
  ▲정부의 실업급여 삭감에 항의하는 스웨덴 노총 조합원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 사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높은 세금과 그것을 통해 달성되는 주요 사회서비스의 무상제공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 서비스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교육, 의료, 주택, 보육, 노후보장 등이 사회주의적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있다는 사실이다.(물론 독일의 의료는 조금 복잡한 체제이지만)

만약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교육, 의료, 보육 등의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세금만 스웨덴처럼 많이 걷어서 지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뻔하다. 그렇게 증세된 재원이 고스란히 교육자본, 대형의료자본, 사적보육자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여 만약 오늘날의 스웨덴 사회가 세금제도는 유지한 채 교육, 의료 등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걷어내면 맞이하게 될 결과와 동일한 것이다.

즉, 사민주의 국가를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것은 높은 세금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높은 세금이 민중의 권익을 신장시켜주는 제도, 즉 사회주의적 제도에 있다는 것이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없으면 성립이 불가능한 체제다. 역사와 현실이 모두 그것을 입증한다.

그런 면에서 잠깐 한마디만 하자면, 이번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공약 중에 대학평준화, 국공립화, 공공의료 확충 방안 등이 부각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개혁은 민중들의 삶에 이미 가장 절실한 요소가 되었다.

스웨덴 사민주의, 그 계급타협 모델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사회를 희구하고, 그 대안사회가 자본주의의 운영원리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나 경쟁원리, 시장만능주의와는 다른 사회운영원리로 운영되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갖춰졌을 때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사회체제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체제가 꼭 가져야 할 요소가 있는 데 그것은 ‘불가역성’이라는 요소다. 마치 봉건시대에 왕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정치영역에서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이것이 ‘불가역성’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의 운영원리에 대해 ‘불가역적’인 사회운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며, 이 민주주의는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경제 영역의 민주주의를 뜻한다. 이것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강령이다.

필자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그 ‘민주주의’는 단순히 급진적 사회주의를 순하게 보이기 위해 장식품으로 단 수식어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실내용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각설하고, 이러한 ‘불가역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민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민주적 사회주의

사민주의 모범국가인 스웨덴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정완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스웨덴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지 않지만, ‘어떤 자본주의가 좋은가’하는 문제의식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스웨덴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사민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타협을 전제로 한다. 즉, 타협적인 자본주의 체제인 것이다. 스웨덴 사민당은 지난해 야당이 되긴 했지만, 1932년 집권한 이후로 약 10년 가량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권력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정당이다.

그런 사회라면 사민당이 추구한 사민주의적 개혁은 대부분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인데, 그러한 사회에서조차도 자본가들의 권력은 온존하였고 오히려 강화되기조차 하였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1970년대 스웨덴 모델에 급격한 위기가 닥쳤을 때 스웨덴 노총(LO)이 주도하고 사민당이 형식적으로 추진한 사회주의적 프로젝트인 임노동자기금이 자본가와 보수세력의 반대로 실패하면서 스웨덴 사회는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본가의 강력한 저항과 노동자 회유전략은 노동자들마저 분열시켜 스웨덴 노동운동의 오랜 전통인 ‘동일노동 동일임금’, 즉 연대임금제도를 해체시켰고, 스웨덴 노동운동의 고수익 노동자층이라 할 수 있는 금속노조(Metall)가 총연맹(LO)을 제치고, 금속부문 사용자대표(VF)와 별도 교섭을 가지게 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로 치자면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시화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각종 사회서비스의 민영화, 공적연금 운영에서의 시장원리 도입 등도 실행되었다.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러한 스웨덴 모델의 부침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자본의 권력이 온전하게 보존됨으로써 결국 신자유주의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있는 사민주의 국가의 오늘을 말해 준다.

즉, 사민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일부 사회보장 영역에서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 불가역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이것의 결과가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경도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1970년대 그들이 시도하였던 사회주의 프로젝트인 임노동자기금이 성공하여, 오늘날 스웨덴 기업 대다수가 자본가의 수중에서 노동자에게로 넘어와 있다면 지금 이러한 부침을 겪고 있겠는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임노동자 기금이 노동자 자주관리와 유사한 형태인 만큼 유고의 자주관리 사회주의가 겪었던 것처럼 새로운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다. 즉, 경제운영의 권한을 넘겨받은 대기업 노동자 집단과 지방자치코뮌이 전체 인민의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이해를 앞세우는 이기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실업의 만연, 지역별 격차의 확대 등 악순환이 시작됐고 이것이 심화되어 결국 파탄을 맞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조차도 기업들의 이러한 이기적 행동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도입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이해관계자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대안은 끊임없는 모색 속에 열려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조금 고쳐서 쓰는 데 안주할 것인가 그 차이에 있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더 많은 토론을 기약하며

오늘은 지면의 한계상 사민주의 체제에 대한 간략한 평가로 마치고자 한다. 앞으로 여러 가지 토론이 있을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시장에 대한 평가, 자주관리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 국유화에 대한 평가 등 말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필자와 최병천만의 토론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할수록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므로, 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며 최병천이 토론의 시작에 필자에게 물은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질문 자체가 엄밀해야 된다

첫째, PT독재를 인정하는가. 이 문제에 최병천이 자문자답하면서 ‘본인은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는데 필자는 ‘모든 인간은 정치사상과 결사의 자유가 있으므로 다당제를 인정한다’고 답변하겠다.

그런데 조금 사족을 달자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다당제라는 면에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라 하겠으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전제로 하는 사회라는 점에서는 부르조아 독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PT독재와 PT민주주의 역시 대립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최병천의 질문은 ‘다당제를 인정하는가’로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날 그 질문에 일당독재를 해야 한다고 답할 사회주의자가 어디 있겠는가. 극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회주의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대중이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 ‘독재’란 용어를 쓸 필요는 없겠으나, 이론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질문이라면 질문 자체가 엄밀해야 한다.

둘째, 권력획득방식에서 폭력혁명론에 대한 질문은 좀 사려 깊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사회를 꿈꾸는 운동을 폭력적이라고 잠재적으로 규정하는 질문이다.

   
  ▲칼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이..”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변혁이 그렇게 폭력적이었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한 것은 비열한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이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던 결과였고, 식민지 수탈자들에 대해 누구보다 결연히 그들이 맞서 싸운 결과가 아니었는가.

대안사회 운동 폭력적이라고 잠재 규정하는 질문

그들의 투쟁은 인민들의 염원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자는 늘 평화적으로 민중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걸 폭력적으로 탄압해온 것은 오히려 항상 자신들이 만든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요구해온 세력이다.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과거 칠레처럼 일시적인 정세에 의해 노동자,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집권한다 해도 제국주의와 구 지배세력의 폭력적 사보타주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합법적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과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배세력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셋째부터 다섯째 질문은 비슷한 질문을 나눠서 한 것 같아서 한꺼번에 대답하겠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소유를 장려해야 한다는 답변이 적절하다. 이는 이미 민주노동당 강령에도 명시돼 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사적기업과 조금 큰 규모의 협동조합기업, 지방자치단체 등이 개입된 사회적 기업, 국유기업 등 기업의 성격과 규모를 나눠서 다양한 소유를 인정하되 어떠한 경우라도 민주적 운영원리에 어긋나는 소수의 지배는 배척해야 한다.

또한, 시장은 현재로서는 인정하되 그 폭력적 성격과 불평등한 결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대체질서가 가능한 지를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 또한, 소련과 같은 중앙집중계획경제, 혹은 명령형관리경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계획이 필요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국가는 여전히 한 사회의 균형과 바람직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야 하며, 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나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지금까지의 나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고자 한다.

사민주의자들이 고민해야 할 것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타협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없이는 애초부터 사민주의는 형성조차 불가능했다. 오늘날 사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포기하고, 계급타협에 안주하며, 불가역적 사회변화를 추진하지 못했던 역사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 온건하다던 독일 사민당이 최근 당 강령과 정책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한층 강조하며, 좌파 정당으로의 선회를 추진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한국의 사민주의자 동지들도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사회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주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오늘 필자가 사민주의자 동지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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