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노조사무실, 나를 붙잡은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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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21일 06: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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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오전 7시 10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4공장문. 오토바이를 타거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 시내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신호등을 기다렸다 물밀듯이 공장안으로 활기차게 들어간다. 한 여성노동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손가락 사이에 사원증을 끼고 들어간다.

4공장문 앞에서

공장 안, 구내버스 타는 곳에서 사람들이 차를 기다린다. 곧이어 ‘명촌행’이라는 팻말을 앞에 건 구내버스가 오고 사람들이 차에 오른다. 버스가 떠나고 금방 사람들이 그 자리를 다시 채우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버스가 온다. 트럭 한 대가 오자 사람들이 트럭 위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간다. 덤프트럭보다 더 큰 차들이 공장안에서 빠져 나온다.

시간이 갈수록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발걸음이 빨라진다. 천천히 걷다가, 종종걸음을 걷다가, 달려오다가. 정문으로 반짝이는 검은 차가 들어온다. 양쪽에 서 있던 나이 든 경비노동자들은 손에 날을 세워 경례를 한다.

사원증을 내보이며 들어가는 노동자와 경례를 받으며 들어가는 간부. 차창이라도 내렸을까, 고개라도 까딱여 답례를 했을까. 눈인사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차려 자세로 경례를 하는 건 확실히 회사도 분명 계급사회이고 군대문화라는 걸 말하는 걸까.

   
  ▲사진=진보정치
 

어제 완주에서 보았던 민주노총 차를 오늘 울산에서 다시 본다. 11월 11일 노동자대회와 민중총궐기를 알리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조합 간부들이 건네는 홍보물을 거부하지 않고 손에 받아든다. 손에 쥔 채 핸들을 잡는다. 자전거 타고 가면서 고개 돌려 노동자들과 손잡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바라본다. 그대로 가지 않고 고개 돌려 바라보는 건 왜일까.

자전거에서 내려 무리 지은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내준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 반대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저 사람들은 여느 아침 풍경과 다른 지금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대통령 후보와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면서 그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노동자들은 어떤 기대를 갖고 있을까.

7시 53분이다. 공장 경비실 앞, 건너 하늘에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퇴근하는 길 자전거를 끌고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 자전거 뒤에 신문이 실려 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쌀쌀한 날, 장갑을 끼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는 사람. 스물 중반이 아직 안 되었을 것 같은 어린 얼굴들도 보인다.

신호등 앞에서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무슨 꿈을 꿀까, 까만 밤을 하얗게 새며 일하고 나온 그이들이 꾸는 스무 살 꿈이 궁금하다.

7시 58분. 이제 출근하는 사람들보다 퇴근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이들에게 낮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권영길 후보. 저 낮게 허리 굽힌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낮은 모습으로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을 찾아 낮은 목소리를 듣는 일, 멈추지 않아야 하리라.

8시 1분. 출근시간이 지났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을 딱 한 사람 보았다. 아침 출근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이 많은 노동자들을 먹여살려주는 게 아니라 이 많은 노동자들이 더 많은 것으로 회사를 먹여살려준다는 것을.

   
  ▲사진=진보정치
 

아주 작은 노조사무실

9시가 조금 넘어 한 건물이지만 문이 다른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사무실로 갔다. 들어가는 입구 벽에 류기혁 열사 영정이 시간처럼 바래간다. 좁은 계단을 올랐다.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와 민주노동당 당원들, 서울에서 내려온 한겨레신문 기자, 진보정치 기자, 민중의 소리 기자, 사진기자들, 영상기자들, 지역 방송국 기자들. 이 사람들이 올라간 비정규직 노조 사무실은 좁디좁은 방 하나였다. 안에 다른 방이 더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왔다. 좁은 방에 사람들이 가득 차 두 노동자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들리지 않는 그 말에 귀 기울여야 할 터이지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었다. ‘공간’이, 비정규직 노조 사무실이라는 그 공간이 더 많은 것을 내게 말하기 때문에. 다 말하기 때문에. 가슴이 먹먹한 건 내가 지나치게 감상에 잘 빠지는 인간이어서일까.

류기혁 열사(현대자동차비정규노조 조합원으로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 쟁취 투쟁에 함께했다. 2005년 9월 4일 고인이 됨) 영정 아래, 탁자. 탁자 위에 먼지 앉은 침낭, 가방, 확성기, 지회장 선거 홍보물. 탁자 아래 의자.

의자에 걸쳐진 투쟁구호 적힌 조끼. 모두 먼지 앉아 빛바랜 듯 보이는데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 만든 ‘비정규-미조직 조직화사업 안내서’라고 적힌 파란색 얇은 책자가 내 눈을 붙잡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목 위에 누군가 검은 사인펜으로 적은 ‘질긴’, ‘질기면 이긴다’라는 글귀가 나를 붙잡았다.

들고 보니 뒷장 표지에도 안쪽에도 흔적이 있다. ‘불법파견 힘의 균형 바깥세상 총연맹 삶의 질 향상 갑옷 마법 주문서 철 태양 달 별 천진난만 전국민주노동조합 현대자동차 대한민국 국민헌장 쏭바강 군대 회사 체력회복제 문제 답 마력의 돌 잉크 연필 분필 책상 용기 물약 파란물약 도시 시골 농촌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목포 강릉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특별시 세상살이 천군만마’.

열아홉 번 반복해 쓴 ‘운동’, 열여섯 번 반복해 쓴 ‘공부’, 여섯 번 반복해 쓴 ‘직업’, 열네 번 반복해 쓴 ‘업보’. 그 아래 쓴 ‘정규직 비정규직’.

무얼 하던 시간이었을까. 혼자였을까. 노조에서 회의를 하던 시간일까. 여럿이 있어도 혼자 섬으로 남는 시간이었을까. 답답했을까. 떠나고 싶었을까. 앞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힘을 내자고 다짐했을까. 자신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쓰는 동안 머릿속이 정리되었을까. 한숨을 쉬었을까. 일자리를 찾아야 할 상황이었을까. 고향이 떠올랐을까. 가족이, 친구가 그리웠을까.

저 낱말을 쓴 이는 낱말 하나 하나를 쓰면서 내가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생각과 고민과 시간을 담았을 것이다. 낱말이지만 머릿속에서는 분명 문장으로, 문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알아채지 못한다. 잊히고 버려진 작은 책자에 쓰인 낱말들을 나는 왜 붙드는가.

줄 쳐진 공책은 아니었어도, 짧게 끊어진 낱말 숲을 더듬는 동안 나는 서른일곱 해 앞서 전태일 열사가 남겨놓았던 일기장을 떠올린다. 모범 기업체를 구상하고,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 곁으로 돌아갈 자신을 벼리고,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편지를 쓰고 꽉 막힌 사회에 어떻게든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멍 하나 내야겠다고 온몸과 온 마음으로 시대와 사회에 자신을 내던지려 했던 한 노동자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한껏 밀고 나가던 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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