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사회의 급진화가 필요하다
    2007년 10월 22일 04: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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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초 전개되었던 ‘진보논쟁’ 당시 조희연 교수는 ‘대중의 급진화 – 민중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했었다. 조희연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월간 『인물과사상』 5월호에 대중의 급진화를 목표하는 것 같은 민중주의 정치, 동원정치는 참여정부에서 이미 많이 이루어졌으므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비판을 하였다.

이에 조희연 교수가 이번에 발간된 『인물과 사상』 11월호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조희연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 악법, 한미FTA와 같이 민중 이익에 반하는 정책은 전투적으로 밀어붙인 ‘엉터리 파퓰리즘’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이 제기한 민중주의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제적 민중주의’라고 밝힌다.

또, 조희연 교수는 자신의 급진화 전략과 헤게모니 전략이 상호 모순된다는 강준만 교수의 지적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양 전략의 관계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제도정치의 차원, 풀뿌리 지역운동의 차원 등에서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한데, 이런 것을 헤게모니 전략이라 일컬은 것이고, 교착과 병목의 한국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헤게모니 전략을 부수적인 것으로 급진화 전략을 중심적인 것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는 ‘대중 급진화’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반론에 그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경계횡단자’로 역할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와 달리 자신은 ‘전투적, 급진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조희연 교수의 글, 「한국 민주주의의 병목 지점과 그 돌파구는 무엇인가 : 강준만 교수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겸하여」에는 강준만 교수에 대한 반론 뿐 아니라, ‘진보논쟁’에 참여했던 최장집, 손호철 교수 등의 주장에 대한 해석도 담겨 있다.

조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가 제도정치적 위기라는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보수정당과 중도정당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정치권에 사회경제적 의제를 수용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계급지형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킨다. 이런 점에서 조희연 교수의 이번 글이 ‘진보논쟁 2’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2백자 원고지 136매의 원고를 56매로 요약해 나눠 싣는다. 원문은 <레디앙> 독자게시판에 올린다. <편집자 주>

 

   
 
 

강준만은 최근 진보논쟁 과정에서 필자가 주장한 ‘사회의 급진화’ ‘대중의 급진화’,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민중의 분노와 위협이 필요하다’는 논지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인물과사상』 5월호에 실었다.

강준만은 필자의 ‘사회급진화’ 혹은 ‘대중급진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민중의 분노와 위협을 동원정치의 동력으로 쓰자”는 것으로 이런 류의 동원정치는 참여정부 정부에서 이미 과잉이므로 넘어서야 한다는 점, 필자가 주장하는 헤게모니 전략(유연한 포용전략)이 필자의 또다른 주장인 급진화 전략과 모순된다고 하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강준만의 글은 우리가 참여정부의 패착의 어느 지점을 어떻게 반성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참여정부 말기의 상황을 해석하고 어떤 대안적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대단히 중요한 쟁점을 담고 있다.

이는 2007년 1~2월 이른바 진보논쟁의 연속성 상에 있는 중요한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한 해석

한국 사회는 일종의 거대한 교착(膠着) 국면에 처해 있다. 이 교착에는 두 가지 주체가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개발독재 및 87년 이후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 거대한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민주화 20년, 반독재 ‘민주정부’ 10년에 실망하는 대중이 존재한다.

여기서 교착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러한 국면이 타개되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힘이 부치는’ 상황이며, 반대로 우리 사회의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적 재편의 방향으로 대중들을 끌고 가고 있고 그것이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지만 대중들의 평등주의 의식이나 기대수준이 높아 그런 방향으로 일관되게 가기가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필자는 현재의 교착이 진보적인 방향으로 타개된다면 한국 사회는 지난 20년 동안의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의 단계에서 넓은 의미의 ‘사회(적) 민주주의 개혁’의 단계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반대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타개된다면 한국 사회는 신시장주의, 신개발주의적 경로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현 교착 국면의 진보적 돌파를 위해서는 87년 6월 ‘민주항쟁적 대중’을 뛰어넘는 더욱 급진화된 대중주체의 출현을 포함하여 ‘사회의 급진화’가 필요하다. 현재 그것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이 전개되고 있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신계급사회 출현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의 거대한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은 개발독재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20년을 통해서 이러한 거대 계급적, 사회적 구조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경제위기 10년은 거대한 양극화 질서(이것은 거대한 계급적 질서이다)를 보다 강화하였다. 필자는 이를 ‘민주적이고 투명한 신(新)계급사회’가 출현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그 불평등한 질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하고자 하는 ‘순치된 대중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에는 ‘순치된 대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민주화 20년, 반독재 ‘민주정부’ 10년에 실망하는 대중이 존재하는 것이다.

교육 갈등의 구조적 의미

교육 문제의 기저에는 대단히 평등주의적 의식을 갖는 대중들이 존재한다. 집안의 모든 경제적 자원을 자녀들의 교육에 ‘올인’하는 현재의 치열한 교육 경쟁과 교육열은 체념하지 않은 대중,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평등주의적’ 대중을 전제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필자는, 만일 교육 제도가 기득권 세력의 요구대로 서민들을 배제하는 식으로 재편될 경우 대중의 분노가 현재화하는 ‘폭발적’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교육제도를 포함하여 더욱 평등주의적 의식을 갖는 대중들의 요구를 진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떤가?

강준만이 이전부터 우리들을 교육시켰던 ‘서울대 폐지론’이나 ‘국공립대 통폐합안’이나 ‘대학 평준화’안 등 진보적인 교육개혁 등을 실현한다고 하면 어떤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사회(적) 민주주의’ 개혁의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계급적․사회적 기득권 세력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대중들은 평등주의적 의식을 지니며 분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정확히 계급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로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즉 ‘힘이 부치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가 강준만이 비판하는 ‘민중의 분노’와 대중의 급진화, 대중의 위협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더욱 급진화된 대중주체가 출현하지 않으면

그런 점에서 이제 ‘계급적 역관계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진보를 추동할 수 없는 조건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난 20년 동안의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의 단계를 뛰어넘어 ‘사회(적) 민주주의’적 개혁의 단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과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하는 대중들의 관계, 즉 넓은 의미의 ‘계급적 역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더욱 높은 수준의 계급적, 정치적 의식을 갖는 ‘급진적 대중주체’의 형성 혹은 출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강준만은 필자를 비판했다.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진보적 학자가 ‘대중의 분노와 위협’을 기껏 대안이라고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너무 근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염원을 계급적・정치적 요구로 표현하고 기득권층이 ‘위협’을 느끼는 어떤 상황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정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선일보에 대한 시각도 바뀌어야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의 ‘시각’ 혹은 ‘현실 인식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이 점에서 강준만이 가르쳤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대한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즉 조선일보는 이제 독재적 유산을 옹호하고 민주개혁을 반대하는 ‘반(反)개혁지’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옹호하는 새로운 ‘계급지(階級紙)’로서의 성격을 지배적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들은 강력한 평등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양극화와 비정규직화, 사회경제적 삶의 하락 등에 분노하면서도 그것을 신개발주의적, 신시장주의적 방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신보수적’ 의식으로 경도되고 있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상징화되는 보수적 계급지(紙)로부터 매일매일 ‘계급적・정치적 교양’을 받으면서 일종의 ‘신보수적’ 의식으로 경도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필자를 포함하여 진보적 지식인들도 1950년대 이래의 반공주의적 의식 제약을 고려하면서 온건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관례로 해왔다. 그러나 요즘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즉 대중의 의식적 급진화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보다 분명한 계급적・정치적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너 좌파지’ 하면 ‘나는 좌파가 아니에요’ 하는 것이 아니라 ‘새는 좌우로 난다’ ‘좌파는 좋은 것이야’ ‘좌파는 평등을 지향하는 적극적 가치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식 말이다.

필자는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뒤 계급적, 사회적 기득권 세력의 지향을 적극 관철하여 신개발주의적 정책이나 친시장주의적 정책을 펴더라도 그것은 대단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손호철 교수가 2007년 1~2월 진보논쟁에서 지적한 것처럼 만일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정권 하에서 대중들이 더욱 큰 사회경제적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이는 더욱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의식으로 이행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부동산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사회적 갈등

종합부동산세금 같은 것도 ‘좌파적’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한나라당 등에 의해 ‘환매조건부 주택’이나 ‘토지임대부 주택정책’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응하여 대중들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계급적․사회적 기득권 세력의 ‘한가한’ ‘좌파타령’이나 무능한 참여정부 주체들의 대응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고, 대중들이 더 높은 요구를 하게 되면서 더 높은 수준의 공공적 주택정책들이 실현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도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보건의료, 주택, 노후생활, 교육, 육아 등등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에 밀접한 의제들에 대해서 대중들이 계급적․사회적 기득권 세력 ― 그들의 목소리는 보수 언론이 잘 대변하고 있다 ― 의 ‘해석’과 ‘선동’에 귀 기울이지 않고 더욱 높은 수준의 요구와 ‘위협’을 할 때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공공재를 통해서 해결하는 공공적 복지국가로의 길은 가속화될 것이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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