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방의 "사람 잡아먹는 인권 논리"
    박노자 "진짜 인권과 사회주의는 불가분"… 북한 인민과 탈북자 인권
        2012년 05월 04일 04: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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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에 돌아가신 제 아버지의 쏘련 시절 “취미 생활” 중의 하나는 영국공영방송사(BBC) 등 ‘적성 자본주의 열강’ 방송의 청취였습니다. 그는 쏘련의 신문들도 열심히 읽었지만 “양쪽의 주장을 알아야 양쪽이 감추려는 어떤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다소 회의론적인 지론대로 “적”의 소리에도 자주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저도 덩달아 영국 방송이나 미국 방송을 엿듣곤 했는데, 거기에서 단골메뉴로 나오는 이야기는 “사회주의 국가 인권 탄압” 이야기이었습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등 “인권 투사”들의 이름들이 자주 들리고 그들의 요구사항도 들렸습니다. “자유 의사에 의한 출국의 권리 보장!”, “검열제 폐지와 언론의 자율화!”, “기업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자유, 자율, 자유…

    사진 맨 왼쪽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이렇게 하다가 미제와 대치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산산조각나지 않을까 조바심도 냈지만, 어린 마음에 그 “자유”라는 매력적인 말에 아주 이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국가라면 왜 출국하려는 인민들에게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를 부여하는가?”, “정말 서방의 신문들은 이쪽보다 더 자유롭지 않을까?”, “저들 말대로 개인이 배짱과 의욕을 가지고 기업소를 운명하게 되면 서비스의 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이런 식의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했습니다.

    친척 중에 당 간부로 경력이 있는 어르신들에게 가끔 제 의심들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자네는 아직 삶을 모르네. 지식인들에게 우리가 해준 무상 교육을 갖고 자유로이 나가도 된다 그러면 상당수가 노동자들을 배반하고 서방으로 바로 가지 왜 우리에게 붙어 있겠어? 노동자는 갈 데도 별로 없는데, 지식인은 출세가능성부터 계산하잖아. 우리가 우리보다 몇 배 더 강한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탈영자들을 쉽게 품을 수 없지. 소수 개인들의 의사만 생각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사고해보라”.

    일면 그들의 논리가 이해되기도 했는데, 또 일면으로 그들이 과연 “자유의 맛”을 아느냐,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좌우간, 이렇게 해서 결국 1991년에 구쏘련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출국에 대한 제한과 검열제, 그리고 중앙계획적 경제의 사망은 새로운 “인권 천지”의 탄생을 알렸는가요? 부디 이렇다고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망국과 급속한 자본화가 촉발시킨 경제의 와해 속에서는 “출국”은 인제 “인권/자유”가 아니라 수백만 명의 인민들에게 “생계”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나마 서방에서 “중산층”으로서의 위치를 득할 가능성이라도 보였던 고학력자들은 앞장섰습니다. 특히 학자, 그 중에서도 20~40대의 자연과학도와 이공계 전문가들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러시아 고등학위 보유자인 학계 구성원의 약 50만 명 중에서는 대체로 10만 명 정도는 이미 (주로 서방에서) 해외 취직하거나 적어도 단기 계약으로 해외체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학문 분야에서는 그저 “기동성”이 있는 “모두”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수학 같은 부문에서는 전체 학자들의 약 40%, 즉 50대 이하의 다수의 학위 보유자들이 썰물이 밀려나오듯이 증발되고 만 것이죠.

    물론 황폐화된 나라를 벗어나고 싶은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그들의 출국이 “인권”임에도 틀림없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중앙계획적 경제의 와해와 다수 고학력 인력의 출국으로 인해 교육 질의 저하를 감당해야 하는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았던가요? 오랫동안 희생을 해서 첨단과학 발달의 가능성을 만들어주었다가 인제는 두뇌 유출로 더이상 자주적 학술 발전이 불가능해진, 황폐해진 곳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닌가요? 전체로서의 사회가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아닌가요? “인권”으로서의 개인의 출국 보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주변부적 상황에서 중앙계획적 경제만이 보장할 수 있는 공공교육에의 충실한 투자는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미 망국된 이상 이런 질문을 제기해봐야 소용도 없습니다. 늦었습니다.

    “검열제 폐지”와 “개인 소유의 언론 허용”은 자유주의적인 “인권 투사”들의 또 하나의 요구이었습니다. 국가적 검열은 1991년 이후에 대체로 사라진 듯했지만, 사유화된 매체들은 쏘련 시대에 그나마 있었던 기층 민중에 대한 관심을 바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다녔던 연구소가 문을 닫아 (물론 “서비스 질 좋은” 그 뭔가로 거듭나지도 않고, 그저 그 건물이 부동산 시장에 나와 어느 은행에 팔리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와 그 동료들이 다 실업자가 돼 생계가 막막해졌을 때에 그 어느 “민주화된” 언론도 이걸 단신으로라도 언급한 적은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구쏘련에서 문닫아 폐허가 된 공장과 연구소들은 약 7만 개 정도 됐는데, 거기에 다녔다가 본의아니게 타율적으로 백수가 되어 인제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 그 모든 민중들에 대해서 그 어느 언론이라도 신경썼습니까? 자본이 소유하게 된 언론들도, 한 때에 “인권운동”으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던 거물 자유주의자들도 1993년 10월에 옐친 정권이 불법적 기업 사유화를 중지하라고 요구한 국회에 탱크로 발포했을 때에 그저 박수를 쳤을 뿐입니다. “공산주의 박멸이 우선”이라고 하면서요. 자본의 검열이 국가 검열보다 백배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실은 바로 그 때에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권”은 서방 열강들의 “동구권 흔들기”의 한 낱의 도구로 이용됐다가 그 이용가치가 다 됐을 때에 폐기처분된 셈이었습니다. 탱크로 국회에 발포하는 것도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을 만들어 기아선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인권과 아무 관계 없었지만, 1991년 이후에 러시아에서 집권한 백색강도와 도둑들의 이 범죄행각들에 대해서는 서방언론과 자유주의적 “인권 활동가”들은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빨갱이”가 아닌 “우리 편”이 한 사회를 황폐화시킬 때에는 이는 “인권 유린”이 아니고 그저 “필요한 개혁의 부산물” 정도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인권” 타령을 하는 자유주의자 무리에게는 주변부의 사회로서 자주적인 발전을 영유할 권리라든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직장을 가질 권리, 적어도 굶지 않을 권리, 즉 사회적/개인적 생존권은 “인권”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합니다.

    서방에서 쓸만한 “인력”이 될 수 있는 지식인의 “출국 권리”는 “인권”이 돼도, 그 지식인으로부터 수업들어야 할 주변부 국가 학생의 학습권은 분명 “인권”이 아니라는 논리죠. 결국 서방 열강들의 유산층에 유리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는 권리들이 “인권”으로서 신성화돼도 그들에게 약간이라도 불편할 것 같은 주변주 사회의 생존권은 아예 생각밖에 나 있는 것입니다. 주변부에서 태어나게 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핵심부 열강들이 이렇게 해석한 “인권”은 정말 “사람 잡아먹는 인권”일 것입니다.

    저는 “인권”에 대한 제 개인적 환멸에 관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왜 씁니까? 요즘 북조선 “인권”이 남한 보수들의 거의 “전가의 보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내놓고 있는 “인권”의 해석을 보면 그저 기가 찰 뿐입니다. 그들이 북조선의 장기적 생존권, 그리고 자주적 발전권의 영유에 기여할 로켓, 우주공학 프로그램을 비난할 때에 그들이 과연 생존권이 인권의 기반이라는 부분을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계획적으로 망각하나요?

    자꾸 “시장 개혁”을 거의 “인권 신장”의 동의어로 쓰는 것인데, 오히려 모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배급제야말로 빈곤한 사회에서 인권의 기초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북조선 인구의 대다수는, 오히려 (1990년대의 참사들 이후에 지방에서 거의 유명무실해진) 배급제의 내실화를 바라고 있지 않는가요? 탈북자들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돼야 되지만, 과연 대다수 북조선 주민들의 문제들은 소수의 “출국”, “월경”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요?

    또 “월경”을 감행한 이들이 중국이나 (특히) 남한에서 당해야 할 무시와 착취, “주류”로부터의 고립, 여기에서 발생되어지는 온갖 심신상의 곤란들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과연 악질적인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에서 2등, 3등 시민이나 “불법적인” 타자로 산다는 것은 인권의 실현일까요?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이미 탈북하신 분들의 권리들도 귀중하지만, 이와 동시에 북조선 주민 다수의 생존권, 공공의료 이용의 권리, 공공교육을 받을 권리 등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부분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진정한 인권의 시발점은 집단적 및 개인적 생존권, 자주적 발전의 권리, 그리고 공공부문을 평등하게,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나, (국외 이동을 포함한) 이동권도 중요하지만, 생존권/평등권/공공부문 이용권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 개인적인 자유권들은 무의미화되기가 쉽습니다.

    가난에 이기지 못해 노르웨이에 가서 은밀히 성매매하는 라트비아 여성 같으면, “이동권”을 영위한다기보다는 그저 황폐화된 사회에서 살 길을 도모하다가 국내외의 착취자들에게 이용 대상이 되는 케이스일 뿐이죠. 살인적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계획경제만이 모두들에게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안정부터 인권의 시초가 아닐까요? 제게는 이런 측면에서 (진짜) 인권과 사회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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