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로동당 규약이 성역인가
        2007년 10월 16일 05: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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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민중의소리> 김태환 기자가 「법과 규약이 같나요? – 국가보안법, 조선노동당 규약 상호 폐지 주장의 모순」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런데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일단, 김태환 기자가 국가보안법과 조선로동당 규약의 상호철폐, 상호주의 논리를 비판하려 한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는 북한의 태도 여하나, 한반도 정세 등의 안보환경과는 완전히 별개로 다루어야 할 인권 사안이다. 극우세력 일부를 제외하면 굳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도 이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방어를 위한 무리한 논리

    따라서 이명박 후보가 “북한은 적화통일을 담은 노동당 규약이 있는 만큼 우리가 그것(국보법)을 없애기 보다는 상호 같이 (폐지를) 검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한 비판은 온당하다. 더욱 날카롭게 상호철폐, 상호주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김태환 기자는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을 하려다가 살짝 논점을 옮겨 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계 및 법률전문가들은 국가보안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본다. 사실 조선노동당 규약은 ‘국가’의 법이 아니라 ‘정당’의 규약이다.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등 이남의 정당에도 규약이 있고 이 규약은 당원들에 의해서 재·개정 된다.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정치 간섭’, ‘정치 탄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노동당 당원이 이북 전체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조선노동당 규약의 사회적 영향력은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규약은 규약이다.”

       
      ▲ 조선노동당 창건탑.
     

    김태환 기자는 법은 법이고, 규약은 규약이기 때문에 상호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논증 방식을 택했다. 그렇지만 이 방식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한국 정당들의 규약과 조선로동당의 규약은 전혀 다른 위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적 비교를 따르자면, 대통령과 국방위원장 사이의 10.4 남북공동선언도 그 자체로 웃긴 일이 된다. 이 선언문은 한국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 북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관계자들이 머릴 맞대고 기초한 것인데, 이 또한 격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필자는 김태환 기자가 왜 이런 논리를 끌어들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이 북한 체제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로동당에 대한 ‘정치 간섭’, ‘정치 탄압’을 방어하기 위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에서 가장 상위의 법은 헌법이지만, 북한에서는 가장 상위의 규범이 조선로동당 규약이다. 왜 그런지 잠시 살펴보자.

    북한의 정치체제는 ‘당-국가체제’다

    북한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규약 46조는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계승한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임을 명문화하고 있다.

    북한은 실제로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를 통해 당적 영도를 체계적으로 가동시켜왔다. 당적 영도를 통해 국가기관과 인민군대를 통제해 온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에 들어 10여 년간 당적 영도의 핵심 기구인 당 중앙위원회가 작동되지 않고 있다. 당 규약에 따르면,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6개월에 1회 이상 소집되어 당의 노선과 정책 수립, 행정 및 경제 사업 지도 및 조정, 혁명적 무력 조직, 기타 당이 직면한 중요문제 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갖고 있는데, 당 중앙위원회가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이후 지금까지 개최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입법·행정·사법 등 3권뿐만 아니라 군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중앙인민위원회는 1998년의 헌법개정을 통해 폐지되었다. 당의 노선과 정책을 국가기관과 인민군대에 관철시켰던 반정반당(半政半黨)의 정치 기제는 없어졌다.

    반면, 그 동안 당 통제의 그늘에 가려 있던 내각과 인민군대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선군정치의 시작과 함께 인민군대는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되어 북한 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튼 김일성 시대의 ‘당-국가체제’와 달리 김정일 시대에는 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대신 인민군대와 내각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이는 1980년대 말 이후 북한이 처한 대외 환경의 위기와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소련을 위시한 기존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잇따른 재해와 기근, 제재와 봉쇄, 내적 발전의 한계 등에 부딪히며 더 이상 기존의 ‘당-국가체제’를 일관되게 유지시키기 힘든 상태로 내몰린 것이다.

    즉, 김일성 시대의 일방적 당 우위의 ‘당-국가체제’는 김정일 시대에 들어 당이 대내 통합과 체제 결속을 위한 정치사상적 진지를, 군이 체제보장을 위한 군사적 진지를,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적 진지를 각각 담당하는 이른바 ‘상대적 당 우위의 당·군·정 역할분담체제’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당 우위’라는 본질적 성격이 변화한 것은 아니다.

    조선로동당 규약 문제 언급은 당연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데 있다.”(조선로동당 규약 전문 중에서,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 개정)

    여기서 ‘전국적 범위’라는 표현이 갖는 문제가 있다. 한국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헌법상 영토조항과 이에 근거한 국가보안법이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당연히 조선로동당 규약의 이 부분도 문제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필연적이다.

    김태환 기자는 북한이 이미 92년에 헌법 제5조를 개정해 조선노동당 규약의 문제 부분과 같은 ‘전국적 범위에서’라는 문구를 삭제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조선노동당 규약은 북한 헌법과 배치되고 있다는 말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노동당 규약의 위상이 북한 헌법보다 높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한국의 진보진영이 헌법의 영토조항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 이는 다른 조건과 연동시킨 주장이 아니라 53체제(1953년 휴전 분단체제-편집자)의 청산과 평화체제 수립, 인권의 측면에서 일관되게 제기한 주장이었다. 진보진영 가운데 이 문제와 조선로동당 규약의 문제를 연동시켜 자기 주장을 펼친 세력은 없다. 둘은 별 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다만, 10.4 남북공동선언에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합의에 주목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헌법상 영토조항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의 조선로동당 규약 개정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선언문은 분명 각기 정비를 하자라고 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정비가 다른 하나의 정비를 조건 짓고 있지 않다. 때문에 한나라당의 상호철폐 논리는 앞서 언급한 그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선언문의 합의 내용을 부정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나라당의 대북관, 안보관에 대한 비판은 진보진영의 상식이므로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줄곧 이야기하면서 그 주요 당사자의 하나인 북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북한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금기가 될 수는 없다.

    비판의 주체가 국가 당국이 되고, 그 비판이 경제적 혹은 경제외적 강제를 동반한다면 별도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시민사회가 보편적 가치와 원리에 근거하여 성역 없는 비판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밀접하게 연결된 과제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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