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시대 외국 소설 분류법 2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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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0월 07일 10: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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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신작소설 『제비일기』는 사실 소품(小品)이다. 우선 판형 자체가 작은데다가 평균보다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본문활자를 써서 128페이지를 겨우 만들고 있다. 장편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중편 분량의 작품인 셈이다. 그럼에도 가격은 두꺼운 장편소설에 육박하는 가격인 8천원이 매겨져 있다. 소설의 안과 밖이 궁금해진다.

   
 
 

지금 대한민국에 범람하고 있는 외국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이 등장하는 소설과 그렇지 않는 소설! 외국소설 출판 경향이 그만큼 대중적인 흥밋거리 위주로 치우쳤다는 뜻이다.

아멜리 노통브 신작 소설 역시 살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여차여차한 이유로 청부살인업자가 된다. 그는 타인을 죽이는 데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내 욕망에 불을 지피는 것은 바로 살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였다. 그건 나 자신을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과 무관한, 그게 아니라면 선과 악을 가장 현명하게 판가름하는 신의 경지로 끌어올려주는 행위였으니까."(p.38) 그는 살인에 에로티시즘과 권력, 그리고 철학 등을 결부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누군가를 알기 위한 가장 성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임당하는 자는 죽이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바친다. 그리하여 살인자는 피살자의 가장 내밀한 면을 알게 된다. 즉 그의 죽음을.”(p.60)

그런데 그가 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가족을 죽이러 간 현장에서, 자신의 일기를 훔쳐본 아버지를 쏘아 죽이는 소녀를 죽인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임무를 어기고 소녀의 일기를 따로 빼내어 보관한다. 그리고는 그 소녀를 ‘제비’라고 명명하는 한편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려고 마음먹는다. 그 다른 삶의 핵심은 자기 정체성 혹은 그 정체성 확립의 가장 빠른 방법이랄 수 있는 글쓰기이다.

“제비와 함께 한 사랑 이야기는 시작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끝은 최고로 좋을 것이다. 왜냐,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제비를 먹음으로 해서 죽어가고 있다. 그 애는 내 뱃속에서 천천히 나를 죽이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그러나 결코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고통을 주면서. 나는 그 애의 손을 잡고 죽어간다. 왜냐, 나는 글을 쓰고 있으니까. 글쓰기는 내가 제비와 사랑에 빠진 곳. 이 글이 끝나는 순간 나는 죽으리라.”(p.128)

아멜리 노통브는 영악하다. 살인이라는 대중적인 코드를 소설 속에 끌어들이는 한편 그 대중적인 코드에 문학적인 후광을 적절히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와 조이스, 네르발이 등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거명되고, 소설과 흡사한 외양을 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등도 무리없이 등장해 연쇄살인범을 장식한다.

물론 그런 인용들이 가능케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이 소설이 이른바 1인칭 독백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데 있겠지만, 소설의 분량을 줄임으로써 주인공의 내적 갈등만을 오롯이 내세운다는 작가의 기민한 전략의 승리라면 승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노통브의 소설이-소재는 자극적일 것, 그러나 그 포장은 인문적일 것!-지구촌 시대의 소설의 한 전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지금 내가 대답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질문이다. 그러나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태업(怠業)에 대해서이다.

이른바 대중적인 코드와 문학적인 코드를 조합시키는 것은 작가로서는 아마도 가장 빠르고도 손쉬운 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디어의 문제이지 형이상학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설에는 형이상학이 있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형이상학이 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소설을 죽이는 살인자다. 노통브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글쓰기는 소설가가 형이상학과 사랑에 빠진 곳. 형이상학이 끝나는 순간 소설가는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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