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아들에서 대통령 후보까지"
    2007년 09월 15일 02: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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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 권영길. 사진은 출마선언식 모습.
 

◈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

2002년 11월.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권영길이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 많은 고향 사람들은 환영하고 연호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아이처럼 울어야만 했다.  차가운 땅 속에서 어두운 한반도의 현실을 묵묵히 지켜봤을 아버지. 당신이 가시고 난 후 그 길고 긴 당신의 그늘 아래에서 홀로 외롭게 떨어야 했던 당신의 아들.

그리고. 허리 잘린 반도 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모든 이들이 한 없이 가여워 그는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 날 당신이 뛰고 달리고 몸을 숨기며 지내야 했던 지리산을 바라보며 육십 초로의 아들은 아이처럼 울었다. 분단의 아픔과 질곡, 권영길과 한반도는 그렇게 한 몸처럼 닮아 있다.

빨치산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곳곳에 도사린 감시와 편견의 눈초리, 숨결을 잦아들게 할 정도로 힘든 시절부터 ‘침묵으로 발언하고, 의지로 실천하며’, 온몸으로 한반도의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건 권영길의 몫이었다.

분단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통일의 ‘한반도시대’를 열기 위한 권영길의 의지는 시대적 요구이기 이전에 오래된 ‘숙원’이요, 남 몰래 가슴에 새긴 아버지와의 ‘약속’인 것이다.

◈ 빠리특파원, ‘다른’ 세상을 만나다

빠리특파원, 기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탐내보는 자리다. 그러나, 권영길에게 빠리특파원은 출세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었다. 숨 죽여 살아오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진보적 구상,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세상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가는 지렛대였다.

이 시기 권영길의 눈에 비친 ‘다른’ 문화와 교육제도, 정치 등은 훗날 그가 진보적 구상을 하는데 튼실한 밑거름이 된다. 특히,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68 혁명’은 그에게 많은 교훈과 영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권영길은 특파원 말기를 낭테르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하며 ‘68 혁명’에 깊이 몰두한다. 귀국을 얼마 앞둔 권영길은 한국의 ‘6월 항쟁’ 소식을 듣게 되었다.

프랑스의 ‘68 혁명’과 한국의 ‘6월 항쟁’의 폭발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조직적인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에 ‘빼앗긴 혁명’,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68 혁명을 주도한 좌파가 드골의 승부수에 힘 없이 무너졌듯, ‘6월 항쟁’도 ‘6.29 선언’으로 무력화됐다.

‘6월 항쟁’은 권영길에게 안타까움이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보면서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한 권영길은 한국 사회의 ‘풍요’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다른’ 세상에 대한 포부를 안고 귀국길에 오른다.

◈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그가 있었다.

역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시대는 그에게 결단과 즉답을 요구했다.

돌이켜보면 역사의 고비마다 그에게 지워졌던 결단은, 그 이전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매 순간, 순간이 한국 사회 최초의 의미를 지녔기에 그 결단은 결코 쉬울 수 없었다. 과거의 아픔을 눈 감을 수 없었고, 미래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88년, 언론사에 노동조합과 언론 자유의 깃발을 들어야 할 때에도,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총진군을 탄생시켜야 할 때에도,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에 맞선 정치파업을 결단해야 할 때에도, 불가능하고 무모한 시도라는, 민주노동당을 탄생시킬 때에도, 권영길은 ‘말없는 결단’과 ‘조용한 즉답’을 내놓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권영길은 결단과 즉답을 요구받았고, 새 시대를 향한 역사의 문을 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권영길의 결단은 언제나 ‘최초’였고, 그 결단은 늘 세상을 크게 바꾸어왔다.

◈ ‘거대한 소수’에서 ‘도전하는 다수’로

2002년 대통령 선거로 국민적 신뢰를 얻은 민주노동당은, 창당 4년만인 2004년 4.15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대약진, 10석의 의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특히 권영길은 “지역주의 정치와 금권정치가 판치는 한복판에서 반드시 원내에 진출, 진보정당 역사에 한 획을 긋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2000년 석패의 아픔을 겪었던 경남 창원에 재출마를 결심했다.

그의 인생이 웅변하듯, 권영길은 또 다시 민주노동당 ‘최초’의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권영길의 당선은, 민주노동당의 오랜 숙원이던 ‘지역구 돌파’가 실제로 가능함을 증명하는 중대한 쾌거로 기록되었다.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의석수는 전체의석 대비 3%에 불과하지만, 지지율은 10%를 상회하고, 정치적 영향력은 30%의 정당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라크 파병과 비정규직 문제, 한미FTA 등 기존 보수정당들과 차별화된 민주노동당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국민여론의 50% 이상이 지지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노동당이 ‘거대한 소수’에서 ‘도전하는 다수’로 거듭나는 발판이 될 것이다. 이것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아니라, ‘최초’의 도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 역사적 승리, 시간이 필요했다

권영길에게 2007년 대선이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알리는 선거가 아니다. 이제 그는 보수 일변도의 한국 사회 정치지형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각오로 대선출마를 선언한다. 권영길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의 운명을 건 한 판 승부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각오만이 우리에게 내일을 가져다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강철이 단련되어지는 데는 그만큼의 혹독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역사적 승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프랑스 사회당 ‘최초’의 집권을 이끈 미테랑 대통령은 1966년 첫 출마한 이래, 81년 세 번째 도전만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2002년, 대권 도전 4수만에 ‘최초’의 노동자당 집권에 성공했다.

1997년, 2002년. 두 번의 출마와 역사적 체험은 권영길과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담금질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승리’를 위해 권영길을 준비시켜온 과정이었다.

역사는 다시 한 번 권영길에게 민주노동당에게 또 다른 결단과 즉답을 요구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의 한반도시대를 열기 위한 ‘진보적 정권교체’. 권영길은 그 대열에 맨 앞에 설 뿐이다.

모두가 함께 나서면 태산도 무너뜨릴 그 대열에 권영길이라는 이름 석자가 굳세게 설 것이다. 저 산을 넘어 평등과 평화의 세상으로 가겠다는 그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이 글은 권영길 후보 선본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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