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멸인가? 부활인가?
    By
        2007년 09월 08일 11:21 오전

    Print Friendly

    절박하다. 이번 당 경선은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 같은 기회가 언제 다시 올 것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한가? 그것마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초조하다.

       
     ▲ 이번 대선 후보 당내 경선은 당 혁신을 위한 절호의 기회.(사진=진보정치)
     

    세상을 바꾸고 자멸한 운동들

    행일까? 불운일까? 필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기획들이 붕괴되는 현장에 있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한국 학생운동이 자멸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반세계화 운동의 상징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 운동이 초라해지는 모습도 목도했다.

    투쟁을 못해서일까? 결코 아니다.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탄압과 압제가 저항의 동력이라는 것을 알았던 학생운동가들의 구호였다. 그들은 혹은 우리들은 기꺼이 압제 속에서 항거했다. “우리 조국은 사빠띠스따의 희생을 요구하네” 멕시코 원주민 농민들은 노래했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꿈이 이뤄지지 못해서였을까? 그것도 절반의 진실이다. 민주화의 봄은 서울에도 도래했고 멕시코 시티에도 72년 만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민주화의 봄에 그들이 본 것, 아니 보려고 한 것은 화사한 목련과 화려한 벚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겨울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은 옳았다.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그 봄이 비록 불완전했지만 그들이 싸워서 얻은 것이었다.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혁명가들의 아지트’였던 한국 대학에서 지금 대학생들은 자신의 커리큘럼 하나도 결정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때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눈물로 “너희들은 외롭지 않아”라고 환영해주던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이제 500명의 열성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채 초라한 좌익정파로 전락했다.

    변화의 기회가 없었을까? 아니다. 있었다. 제한된 민주화의 공간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대학사회의 민주화를 더욱 심화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반독재투쟁의 낡은 도그마에 안주하고 말았다. 낡은 대결구도, 해묵은 교조주의에 갇혀 세상의 역동적 흐름에 둔감했다.

    사빠띠스따들에게도 무기를 버리고 민간 사회운동단체로 변신할 기회가 있었다. 게릴라 조직 특유의 군사적 위계를 혁파하고 그들이 담론 속에서 그토록 외쳐온 “모든 세상이 공존하는 한 세상”을 실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치아빠스의 근거지로 숨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기회를 버리고 말았다. 결국 얼마 전에 무기를 버리겠다고 사빠띠스따들이 선언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변화의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같은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몰락하면서 운동 내부에서 그들을 비판했던 다종다양한 세력들도 동반 몰락했다. 공룡의 몰락은 가장 덩치 큰 종의 몰락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공룡 시대 자체가 몰락하는 것이었다.

    수구보수의 새로운 마스크

    87년 체제가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다. 근 20년을 유지해왔던 민주-반민주 대결 구도가 변해가고 있다. 실제적으론 민주화 운동의 우파와 독재 정권의 후예 수구보수파가 권력을 놓고 대결하는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다.

    더불어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대 ‘기득권층의 대변자’라는 계층적 대결 구도도 붕괴되고 있다. 서울-호남 연대를 축으로 타 지역을 연합의 대상으로 삼았던 지역 구도도 변해가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 정치가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 같은 심원한 변화의 배경에는 민주화 운동의 우파가 지배해온 10년이 역설로 가득 찬 시대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 중산층의 수를 더욱 줄이고 서민의 삶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그들은 정권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호남과 서울 시민들을 실망시켰다. 민주화의 염원으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지지자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 변화를 가장 먼저 간파하고 변신에 성공한 것은 놀랍게도 한나라당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마스크로 교체했다. 당의 정체성을 수호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무장한 이념 투사 ‘박다르크’는 이명박의 ‘실용주의’라는 무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 당을 격변 속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이명박의 ‘실용주의’라 할 수 있다.

    이명박은 신자유주의 도그마에 복지정책을 결합한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이중구조(양극화)에는 손을 대지 않으면서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시혜적 복지정책을 도입하려고 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응급 처치를 내린다.

    이명박은 교조적인 수구보수의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는 물난리로 큰 해를 입은 북에 인도적 지원을 베풀겠다고 말한다. 그는 ‘수구보수’의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집권을 위해 실용주의 행보를 가속화할 것이다.

    범여권 혁신의 맹아

    범 여권의 붕괴는 누가 막아낼 것인가?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10년과 구별되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들과 민주당 후보들 가운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현 집권세력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다른 당에서 꼴지를 할 것이 두려워 탈당한 정치인이 1위를 차지하고 뒤늦게 범여권의 대열에 합류한 정치권 밖의 기업인 출신 후보가 시민들의 주목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주역들에 대한 반감이 새로운 세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환골탈태는 결국 김대중-노무현 시대와 구별되는 정치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 후보에게서 비롯될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현재로선 문국현 후보가 유력해 보인다.

    민주노동당, 사멸인가? 부활인가?

    한국 정치의 격변 속에서 민주노동당도 위기를 맞고 있다.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세력으로 부활하느냐, 아니면 변화의 기회를 놓쳐 몰락하느냐는 갈림길에 섰다.

    민주화 운동 좌파인 민주노동당은 그 태생에 있어서 지난 10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민주화 운동의 우파들과 이란성 쌍둥이였다. 이들은 함께 민주화 운동을 벌였고 옥신각신 대립해왔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화 운동 우파는 정치사상의 자유조차도 성취해내지 못했다. 그렇듯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민의 대변자를 자처했지만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정규직 노동자 운동을 비판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악화시켰다.

    민주화 운동 좌파 민주노동당은 이 같은 우파의 실책을 비판하면서 독자 정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파에서 사회경제적 대안세력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국민적 지지를 상실해가는 정규직 노동자운동을 혁신시키지도 못했고 비 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정규직-비정규 노동자의 연대라는 당면과제를 풀지 못했다. 게다가 다양한 신사회운동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해로운 분열을 치유하지도 못했다.

    2004년의 총선정국에서 민주화 세력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시민들은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민주노동당을 성원했지만 민주노동당은 그 같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변화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첫 번째 기회상실이었다.

    민주화 운동 우파의 초라한 몰락은 민주화 운동 좌파인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민주화 운동 우파에 대한 실망은 제대로 된 비판세력 즉 진정한 대안세력이 되지 못한 민주화 운동 좌파, 즉 민주노동당에 대한 실망으로도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민주화 운동의 우파와 동반 자살할 것인가? 아니면 대안세력으로 성장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바로 지금 명확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무엇이 민주노동당이 대안세력을 변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먼저 민주노동당을 이끌어온 이른바 양대 공룡 정파의 낡은 대결구도를 들 수 있다. 정파 대결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그 정파들이 정책 생산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이들 정파들은 선거 때만 되면 다양한 이유로 동원되는, 투표 동원 정파로 전락했다.

    혁신된 한국 좌파를 위하여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혁신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결국 새로운 정치주체들에게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기존의 정파들의 대립구도를 가로 지르면서 그 구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논쟁구도를 만들면서 등장할 것이다.

       
      ▲ 기존 정파 대립구도를 넘어, 새로운 논쟁 구도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이 필요하다. 부산시당 개표 현장 모습.(사진=진보정치)
     

    그 세력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적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적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일 것이다.

    스웨덴에서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등장했을 때 그 나라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노동자 계급 내에서 50%을 넘게 차지했는가? 차베스가 집권하기 전에 베네수엘라에는 빈곤층이 50%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도 스웨덴과 같은 사민주의 국가의 처방을 한국에 도입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한국의 모델이라고 혼동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 숙제를 해결하려고 다른 학생의 머리를 뒤지는 짓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수구보수가 늘 일본과 미국에서 해답을 찾고 민주화 운동의 우파들이 뒤늦게 워싱턴 정가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민주화 운동의 좌파들도 걸핏하면 유럽과 남미의 좌파정부에서 답을 발견하려 든다.

    또한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새로운 세계화의 상을 보여줄 ‘잠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대안은 세계적인 변화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경제가 세계경제 속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한국사회 자체가 세계화라는 격랑 속에서 이미 닻을 올리고 출항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전대미문의 것이다. 그러니 그 해답 또한 정치적 상상력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50년대 60년대의 북유럽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상교육, 무상의료, 국유화와 같은 빛바랜 슬로건 속에서 국가가 만사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헛된 돛에 의지한 채 항해하려 든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그물이 호시탐탐 포획하고자 기다리고 있는 사회주의(사민주의)의 도그마들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반대세력을 향해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한다고 비판하려고 한다. 한낱 ‘이데올로기적 반대세력’에 불과하다고 몰아 세우려 한다. 거기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의 그물을 찢고 우리의 그물을 촘촘히 짜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은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지배 10년 동안 한국 사회를 주도해온 정치경제적 패러다임에 교체할 대안세력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우파들과 결별하기 위해 형식적인 독립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이고 내용적인 독립을 이뤄내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더 이상 올림픽 정신으로 대선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정신으로 대선레이스에 합류하는 것을 뜻한다. 바로 여기에 민주노동당의 미래가 달려 있다.

    혁신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사멸인가? 부활인가? 이미 우리는 첫 번째 기회를 탕진했다. 2004년 10명의 국회의원을 의회로 보내고 3년이 흘렀다. 그러나 대안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당 활동은 해묵은 정파들의 대결장으로 변질되었다.

    이번 당내 경선은 민주노동당 혁신의 두 번째 기회이다. 또 우리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적지 않은 당원들이 필자와 같은 절박감으로 경선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왔고 당의 혁신을 위해 투표하고 있다. 당을 떠났거나 당 외부에서 지켜보는 적지 않은 시민들도 민주노동당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이 지금 당 혁신이라는 화두를 놓고 벌이는 일전이 시민적 관심사가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결선투표가 필요하다. 당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당 혁신에 대한 소명의식이 뚜렷한 후보가 기필코 당선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미래의 어느 순간에 민주노동당이 변화의 때를 놓쳐 사멸했다는 탄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변화의 때를 주시하던 깨어 있는 당원들이 당을 구해냈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