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남미의 포퓰리즘을 비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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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8월 12일 11: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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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에 대한 역풍은 심각했다. 빈곤보다 더한 ‘비참함’이 급증하자, 일반대중 특히 기층민중의 저항이 사회운동 세력의 조직화를 불러온다. 대표적인 예로 아르헨티나의 소위 ‘피켓을 든 사람들’(piqueteros), 즉 실업자와 빈민들이 주요 도로를 점거하는 저항을 들 수 있다.

   
  ▲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에 저항하는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거리시위.
 

브라질의 경우에도 ‘노동자당’( PT ) 출신의 룰라가 자꾸 우측으로 선회하려는 것을 막는 데는 ‘MST’로 불리는 ‘농지 없는 농촌 노동자운동’ 단체 같은 사회운동 세력의 영향이 크다. 페르난도 삼빨로에 의하면, 최근 MST는 “다국적 금융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모델인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브라질 엘리트 그룹이 추진하는 농지개혁은 그 생명력이 다했다”고 지적하며 농지 소유에 제한을 가하는 입법을 추진한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은 ‘헌법을 새로 만드는’ 정치, 경제 체제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기존 정치사회와 국가 기구에 비해 위축되지 않는 사회운동 세력의 부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아르헨티나를 단지 부르기 좋게 ‘중도좌파’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고 하는 언술은 실제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본다.

아르헨티나, 미국과는 다른 길

사실 우리가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지만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미국과 라이벌 의식까지 가지며 상대적으로 다른 남미 국가들에 비해 미국과 거리를 두어왔다. 이 글에서 다루기는 적절치 않지만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미국적 삶의 방식(American way of Life)’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교역상대국으로도 미국은 메르코수르, 유럽연합에 이어 세 번째다.

특히 2005년에 미국의 ‘미주 자유무역협정’(ALCA) 추진을 침몰시키는 데 차베스와 적극적 보조를 취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가 이 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은 90년대를 통과하며 치렀던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데올로기의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끌라우디오 까츠에 의하면 “독재 이후 체제에서 주기적 직접선거와 함께 비참함의 증대가 공존해왔다. 이 같은 공존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별의 효력을 확인한다. 그러나 제도 정치권은 이같은 구별을 반대한다. 제도권의 이런 시각은 합헌적 정부들의 위기를 미숙함(또는 ‘무능’) 또는 과잉 요구의 수용 탓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리고 기득권층에 제공된 특혜는 생략한다. 게다가 ‘대화’(또는 ‘중도 타협’)를 이상시하고 ‘불평등’의 효과는 최소화시킨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면, “이 같은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절망은 엘리트주의적인 방향 전환을 자극하여 더욱 신자유주의가 확장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전환의 추진 세력은 시민들의 무관심을 합리화하고 기득권층에 의해 주어진 정치적 허무에 대해 일반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또한 이 같은 후퇴의 구체적 분석을 회피하고 인간조건의 추상적 고려를 강조한다 …… 이에 반해, 진보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목표를 시민의 직접 참여와 결합시키고 이런 직접적 개입은 제도와 체제의 기능이 일반대중의 이익에 유리하게 작동되도록 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대중의 직접 개입 혹은 포퓰리즘

위에서 언급한 베네수엘라등 세 나라 외에 칠레의 좌파세력도 ‘시민 또는 대중의 직접 개입’을 제도화시키기 위해 ‘헌법 제정’을 제안하고 있다.

다시 아르헨티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페론’이다. 그리고 페론이즘은 남미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사례로 지적된다. 물론 포퓰리즘은 무척 애매하고 극우부터 극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혼재되어 있어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차베스 혁명도 일부 식자들에 의해 포퓰리즘으로 조명된다. 그러나 이 경우 이미 포퓰리즘이란 말 자체가 ‘공허한 수사의 남발’이란 부정적 선입견으로 포장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좌파 정치학자 라클라우에 의하면 “엘리트 그룹은 포퓰리즘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거부하는데….. ‘공허함’, ‘부정확함’, ‘지성의 빈곤’, ‘수사’ 등의 용어로만 정의한다”고 한다. 하지만 라클라우는 “포퓰리스트 담론의 공허함은 정치, 사회 현실 자체의 공허함과 결정되지 않음의 어떤 상황에서 오는 결과가 아닌가?”고 지적한다.

다시말해, 라클라우는 1945년의 페론 장군의 쿠데타 이후 그가 취한 극단적 민족주의의 입장은 미국 추종의 과두 지배세력인가 아니면 페론을 중심으로 한 민중인가 하는 양극단의 사회적 분열의 극심함에서 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후앙 페론과 에바 페론.
 

이런 시각은 포퓰리스트의 연설의 일부만을 따와 그 담론의 공허함만을 비판하는 지적은 철저히 엘리트적 시각일 뿐이고 정치, 사회 현실의 구체적 지형을 살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이해하게 한다. 그에 의하면, 포퓰리즘은 ‘사회적 요구’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미의 도시 빈민들은 도시 외곽에 살면서 주택, 전기, 물의 기본적 공공서비스도 제대로 못받고 사는 경우가 많다.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라클라우의 용어를 빌면 ‘내부적 국경선’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빈민들이 처음에 정부에 대해 ‘요구’를 했다가 잘 안 받아들여지면 점점 ‘항의’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요구가 그냥 고립되어 있으면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용해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족되지 않은 요구들이 서로 다른 사회 그룹에서 병행적으로 연쇄고리를 만들어내면 정치 지형에서 이분화가 이루어지고 이어 잠재적 역사 행위자로 ‘민중’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어떤 담론적 정체성’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라클라우는 지적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포퓰리즘에 의해 새로운 체제 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과 정치 세력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최근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항의’가 고립되는 과정에서 ‘담론’을 만들어 내는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하기 전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랫동안 페론이즘 세력이 집권해왔다. 그러다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되면서 다른 정치세력인 ‘급진당’이 집권한다. 그러나 이들은 외채 문제와 고율의 인플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시 1989년 메넴을 대표로 하는 우파 페론주의자들이 집권하게 된다.

허나 이들은 90년대 내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의 시행으로 빈곤층을 양산하고 아르헨티나를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락커까지 참여한 저항운동

그런데 실업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강력한 저항을 한다. 90년대 후반부와 2000년대 초에 이르러 조직화된 실업자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에 학생, 지식인, 예술가등을 포함한 중산층까지 합세하여 강한 사회운동 세력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대중 문화중 하나인 락 음악 작곡가들은 도가 지나친 민영화, 고위 관료의 부패, 마약 범죄단의 돈세탁 등을 노래의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오스발도 꼬히올라에 의하면 80년대에 급진당의 알폰신 정권에서도 악성 인플레에 시달리던 대중들이 슈퍼마켓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메넴 정권 시절인 1993년에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지방에서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존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중들은 직접 여러 주 정부 기관을 점거하였다.

이를 시발로 1997년에 네우껜 지방에서 그 유명한 가난한 실업자들과 노동자들에 의한 도로 점거의 시위대(piqueteros)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가혹한 신자유주의 정책 시행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직접 정치세력과 ‘민주주의’ 국가기구에 항의하였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당시 모든 정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 방향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식을 오스발도는 ‘주변적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넴 정권은 외교적으로 지나친 친미 성향의 정책을 취했는데 한 고위관료가 미국과의 관계를 ‘살이 닿는’ 관계로 표현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대중들의 저항이 격렬했던 것은 메넴 정부의 지나친 민영화와 동시에 고위 관료들의 부패가 심각했고 어이없게 국내 산업 기반이 거의 붕괴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메넴 정부는 전화회사, 항공사, 가스회사, 석유회사 등 기간산업을 거의 모두 민영화했다.

2000년에 메넴 정권에 이어 급진당과 좌파 페론주의자들과 다른 좌파 세력이 연합하여 세운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정권도 급격히 무너진다. 왜냐하면, 전임 정권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시위에 대해 유혈 탄압을 가하거나 기업가 계급과 소부르주아, 교회가 연대하는 소위 ‘다계층 위원회’와 같은 유화책도 실패하여 아무런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토론과 오랜 준비 끝에 나온 투쟁

2000년 5월부터 각 지방에서 도로를 점거하는 방식의 격렬한 시위가 있게 되고 10월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대규모 대중시위가 있게 된다. 이들 도로 점거대는 실업자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는데 즉흥적 시위가 아니라 치열한 토론과 오랜 준비 끝에 나온 전략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된 총파업이 절정에 이른 것은 11월이었다. 전국의 철도가 멈춰서고 많은 상가가 문을 닫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1회 도로 점거대(실업자) 전국 대회’가 구성되기도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은 아르헨티나로서도 새로운 노동자 운동 지도부의 부상을 의미한다. 여기에 2001년 1월 의회의 뇌물 스캔들마저 터져 기성 정치인들이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 스캔들과 연관되어 ‘노동 개혁’을 추진했던 데 라 루아 정권은 외채 지불 정지와 노동자 총파업 앞에서 2001년 12월 시위대의 유혈 희생을 치르며 공중 분해된다. 총파업에는 학생, 소상인, 공무원 등 중산층까지 가세하게 된다. 실제로 많은 중산층이 ‘도로 점거대’(piqueteros)로 변모했다고 한다. “모두 다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가난한 실업자들은 대부분 절망에 빠지게 되고 무기력하게 되는 게 보통이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의 실업자들이 스스로 전국적 조직을 만들고 강하게 사회적 항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축적된 페론이즘의 긍정적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사회운동 세력의 힘이 가장 강한 나라로 자리매김 되었다. 나오미 클라인에 의하면, 2001년 위기를 거치면서 실업자들의 대규모 조직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실직된 노동자들에 의해 ‘파산한 기업들이 회복된’ 일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노동자 총회에서의 결정을 통해 기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약 170개 기업에 1만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조합운동으로 볼 수 있는 이 운동에 관해서는 앞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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