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는 종종 유교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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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6월 16일 07: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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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사회주의자는 혈연, 지연, 학연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이념과 사상의 동지들과의 인연을 중시할 뿐이다. 나 역시 이념적으로 별로 투철하지는 않았지만 혈연, 지연 , 학연에 대한 태도는 분명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직 선거에 후보로 나가면서 이런 태도를 더 이상 견지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2002년 8.8 보궐 선거에 나갔더니 합천, 함안 골짜기에서 시골 종친 어른들이 주머니 쌈지돈 한푼 두푼을 모아서 유세장에 오신 것이다. 미안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종친회에 나가게 되었다. 안 나가면 기본이 안 된 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종친회 분위기는 “당을 좀 바꾸면 안 되나?”하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내 고향 함안에 있는 주세붕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주세붕의 묘 앞에는 돌 기둥이 두 개 서 있었고 수무부모(誰無父母), 숙비인자(孰非人子)라는 글자를 크게 새겨놓았다. “누군에겐들 부모가 없겠느냐? 누군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 아마 천민을 사람 대접하라는, 그 어른이 즐겨 하던 말을 새겨놓은 듯하다.

    유교는 봉건적 이데올로기, 그러나 선비는 종종 유교를 넘어섰다

    그 후로 나는 은근히 정통성을 주장하는 듯이 주세붕과 주시경을 들먹이고, 훌륭한 조상의 정신을 언급하는 공세적 태도로 종친회 어른들의 압력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다. 선거하면서 혈연, 지연, 학연으로 들어가 보니 전통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유산은 대중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유교는 조선의 국가 통치이데올로기였다. 2007년 6월 4일, 진주를 거쳐 산청을 찾았을 때 조선의 문화적 유산으로서 유교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인간을 통치하는 군자와 통치를 당하는 소인으로 나누고 출발하는 유교는 봉건 체제의 보수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유교적 지식인, 선비(士)들은 종종 유교를 넘어섰다.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에 나오는 말, 대붕이 날아간 남쪽의 어둡고 거대한 바다, 대붕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두터운 바람이 이는 깊고 넓은 바다다. 그가 김해 처가 동네에 터를 잡고 수양 공부할 때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의 교조적인 지적 분위기 속에서는 이단으로 몰릴 빌미를 제공하는 위험한 호였다.

    조식은 고루한 시골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소년 시절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 살았으며 20대에는 주로 서울에 살았다. 여러 친구들을 사귀고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기득권 훈구세력에 의한 지식인 탄압(士禍)의 시대였다. 19세에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는 광경은 큰 충격이었을 거다.

    조식의 칼 같은 비판이 선비들의 자존심을 드높이다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온다. 30세의 청년 조식은 어느 날 밤 바닷가에 서서 남해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책에서 읽었던 ‘남명(南冥)’을 거기서 보았고 대붕이 되어 그 남명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부귀의 유혹에 굴복하기 보다는 선비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대자유인이 되기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단성 현감 벼슬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문에 썼다. “전하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도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자전(慈殿)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다만 선왕의 고아이시니….” 엄청난 막말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권력을 비판했다. 이런 거침없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서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고 유명해졌다. 동갑내기 이황이 성리학 관념철학으로 깊이 들어갈 때 그는 원시유학의 실천철학으로 돌아가니 행동파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경상도 동북부의 퇴계파에 맞먹는 서남부의 남명파가 형성되었다.

    경남문화관광 해설사 조종명과 안승필이 안내한 남명기념관에는 남명이 품에 지니고 다녔다는 칼이 한 자루 있었다. 그 칼에 명문(銘文)을 새기기를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하였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바깥으로 타협의 유혹을 잘라내 버리는 것은 의다” ‘칼 같은’ 조식의 성격을 상징한다.

       
      ▲ 의령 남강가에 있는 곽재우 장군 전적비
     

    습지의 사나이 의병장 곽재우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크게 빛을 발한다. 그의 제자들 50~60명은 대부분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다. 대부분의 양반 귀족들은, 일본군이 조선 팔도를 유린할 때 태백산 산골로 피난하여 동굴 속에서 충효를 외쳤지만 그의 제자들은 백성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1592년 4월 22일, 곽재우는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것이 4월 13일이니 행동은 망설임이 없고 민첩했다. 당시 곽재우의 나이는 41세였으니 아무 벼슬도 없는 그저 평범한 시골 선비, 또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다.

    곽재우는 아버지가 벼슬한 덕에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한 한량이었지만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집안의 골치덩이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고기잡고 놀던 낙동강과 인근 습지의 지리를 잘 알고 자주 어울리던 백성들의 심리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친구 ‘전국습지보전연대회의’ 이인식 의장은 곽재우는 ‘습지의 사나이’였다고 단정한다.

    그는 붉은 옷을 해 입고서는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칭하여 백성들에게 카리스마를 보인다. 그리고서는 습지로 일본군을 유인 습격하여 승리하기를 거듭한다. 이미 병법을 연구하여 체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바로 그런 것이 남명학풍이었던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자칭하는 것도 남명학파다운 발상이다.

    선비 정신은 현실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가?

    양반 귀족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다 하지 못할 때 곽재우가 양반 체면을 살려주었다. 양반들은 전쟁이 터지자 처자식을 둘러업고 심산유곡으로 도망갔으며 목숨을 도모할 명분만을 찾았다. 가장 흔하기로는 효도를 명분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운명을 외면하였다. ‘가지는 않으면서 길을 가리키는’ 공부를 해왔던 결과였다.

    “남명의 가르침 속에는 벼슬을 이용해 대궐 같은 집짓기를 힘쓰고, 노비추심(奴婢推尋)을 통해 재산증식에 힘을 쏟으면서 겉으로 ‘청빈’과 ‘청렴’을 지저귀던 당시 사대부들의 위선(僞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사상적 비수가 있었다.”고 박병련 교수는 말한다. 그러니 모두가 미워하였다. 남명의 길은 위태롭고 외로웠다.

    전쟁 시기에 남명학파는 빛났고 전후에 발언권을 높인다. 함께 전쟁을 치러내면서 광해군과도 신뢰를 쌓았다. 그래서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은 광해군 정권의 영의정으로 발탁되어 개혁을 추진하고 전후복구를 한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이 무너지면서 남명학파는 모진 탄압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산청 사람들은 간혹 산천재(山天齋)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권영길을 본다. 남명이 좋아하던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천강가에 터를 잡아 말년을 보낸 산천재, 권영길은 왜 이곳을 자주 찾는가? 태어난 고향이 인근 단성면이기도 하지만 그도 자존심 강한 남명을 사표(師表)로 삼아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는 듯하다.

       
      ▲ 산천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나의 방랑을 도와준 사람들

    남명 조식이 공부 인생을 마무리한 산천재로 나를 안내해준 권영길의 11촌 조카 권진근은 공무원 시험을 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고성군청에서 9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시험은 100:1의 경쟁률로 진행되었다. 그가 만약 합격한다면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공무원 시험에서 그 정도의 경쟁률은 오히려 매우 낮은 편이다.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들이 좌절하여 자살하는 일이 많다. 사람들은 쉽게 중소기업은 인력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청년들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양극화는 청년들로 하여금 한 쪽 끝에 있는 일자리에 취업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게 만들고 있다.

    나의 방랑을 도와준 하동의 강동오와 박상진도 남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해원(解寃)에 앞장섬도 그런 정신의 연장에 있음이라.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피해자로서 증언한 정서운 할머니의 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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