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총선 공약
    [정의 경제] 독과점 플랫폼기업 규율, 오히려 윤 정부가 추진
        2024년 03월 26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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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에서 경제민주화가 사라졌다.

    22대 총선 선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물론 주요 정당들의 정당정책 공약들도 모두 발표되었다. 그런데 정당들 공약 가운데 정작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바로 ‘경제민주화’의 부재다. 지난 201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민주화는 총선과 대선을 막론하고 핵심 공약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내걸었던 ‘경제민주화’, ‘일자리’, ‘복지’ 정책들의 상당 부분을 적어도 공약으로는 수용할 정도였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 안에도 소득주도성장과 함께 공정경제가 핵심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22대 총선 공약안에는 공정한 거래질서나 대기업의 독과점 규제, 민주적인 시장경제로의 개혁 등은 찾기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은 ‘대기업-중소기업 근로환경 격차 해소 및 지속성장 지원’을 넣기는 했지만 기본방향은 ‘규제개혁으로 신산업 육성’처럼 규제완화, 감세, 민영화라는 예상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문제는 그동안 ‘경제민주화’를 당의 주요 정체성으로 삼아왔던 민주당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시된 관련 공약을 보면, ‘글로벌 5대 산업강국 도약을 위해 혁신선도형 산업구조 구축 및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 육성’, ‘인공지능(AI), IT·SW, 미래 모빌리티 신강국으로 도약’ 등의 수사가 화려하게 나열될 뿐 어디에도 경제 민주화 공약은 없다. 고작 “온라인 플랫폼 시장 개선 및 대리점주·가맹점주가 대기업 본사와 동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공정 시장 조성”이 곁가지로 덧붙여져 있을 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공식화했던 플랫폼 대기업 규제 논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경제민주화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의제가 되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막상 새롭게 부상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강력히 규제하기 위해 ‘(가칭)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을 준비하고 추진해온 것은 경제민주화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왔던 민주당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였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는, 2023년 5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유럽의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DMA)’ 등을 참조해서 소수 독과점 플랫폼 기업을 규율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고 지난해 12월부터 공식으로 법안을 추진했다. 법안에 따르면 우선 플랫폼 시장을 좌우할 정도로 힘을 가진 큰 소수의 핵심 플랫폼 사업자를 미리 ‘지배적사업자’로 지정하겠다는 것이다. 매출액, 이용자 수, 시장점유율 등을 근거로 지배적 사업자를 지정하는 사전규제의 성격을 가진 상당히 강력한 조항이다.

    둘째로 독과점 위반행위들은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 플랫폼 시장에서 최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불공정 행위들의 규제를 예상한다. 이는 기존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해온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규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물론 민주당을 포함해서 국회는 이 법안의 적극적인 추진에 대해 일관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걸 보면 경제민주화가 각 정당들의 공약에서 실종된 것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20여 년 만에 반독점 칼을 빼든 미국

    한국과 달리 유럽과 미국에서는 디지털 플랫폼 독과점 규제가 점점 더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일찍이 유럽 반독점 책임자인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rethe Vestager)의 주도 아래 유럽은 거대 빅테크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실시해왔다. 최근에는 디지털시장법을 포함한 일련의 법까지 만들어서 이를 제도화했고, 올해 초에는 스포티파이 같은 유럽의 음악 스트리밍 앱이 애플 앱스토어에서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애플에 무려 18억 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바이든 정부 출범 초기부터 주목을 받았던 연방거래위원회(FTC) 리나칸 위원장은, 독점력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여 소비자에게 과다 요금을 부과하고 판매자를 착취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으며, 메타가 인스타그램과 왓츠앱 인수를 철회하도록 강제하는 소송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미국의 또 다른 독점 규제기관인 법무부에서 반독점 책임을 맡고 있는 조나단 캔터(Jonathan Kanter)가, 16개 주 및 지방 검사로 구성된 초당파적 그룹과 함께 목요일 뉴저지 연방법원에 애플에 대해 광범위한 반독점 소송을 걸었다. 이는 1998년 법무부가 마이크로소프트에 걸었던 반독점 소송에 버금할 만하다고 언론들이 벌써부터 주목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가 요약한 애플의 반독점 행위는 ‘슈퍼 앱’ 차단, 경쟁 클라우드 게임 앱 차단, 시스템 간 메시징 제약, 스마트워치 비호환성, 디지털 지갑 제한 등이 거론된다. 소송을 내면서 미국 법무장관 메릭 갈랜드( Merrick Garland)는 다음과 같이 애플이 혁신성 때문이 아니라 독점 때문에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명확히 주장했다. “애플은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불법적인 배제 행위로 인해 그 권력을 유지해 왔다”

    진정한 혁신은 독점을 규제할 때 가능하다

    22대 총선에서 여야는 모두 혁신경제를 주요 모토로 내세우면서 경제민주화는 슬그머니 정책 아젠다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독과점을 눈감아 줌으로써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규제할 때 혁신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보자. 19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IBM은 소프트웨어에 별도 가격을 매겨 팔지 않고, 그냥 하드웨어를 구입하면 공짜로 끼워주는 식으로 서비스를 했다. 하지만 1969년 미국 법무부가 IBM에 대해 반독점소송을 걸었고, 이후 IBM 법무팀은 소프트웨어를 하드웨어에 끼워서 번들로 파는 것이 “변호하기 힘든 법적 문제”를 발생시킬 것으로 우려해 소프트웨어를 별도로 판매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소프트웨어 산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는데, 그래서 반독점 소송을 제기한 1969년 6월 23일을 오늘날에도 소프트웨어 산업계의 독립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또한 1998년에 미국 법무부가, 그리고 2004년 유럽연합이 마이크로소프트를 반독점법에 걸어 기업 쪼개기에 나섰을 때, 처음에는 “정부가 기술산업을 이해하지 못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인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그 때 만약 반독점 소송이 없었다면, 현재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이 장악하고 있는 검색엔진, 모바일 운영체제, SNS, 온라인 쇼핑몰을 마이크로소프트가 혼자서 독식하는 체제를 아마 상상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부터 윤석열 정부가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 추진을 공식화하자 대기업이나 미디어에서 국내 플랫폼 기업의 혁신을 저해하고 외국 빅테크에게 안방을 열어 줄 거라며 반대가 극심했다. 여야 거대정당들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더니 총선공약에는 너도나도 혁신경제를 이루겠다고 약속한다.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경제에 혁신도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경제> 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녹색전환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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