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윤리 : 괴물이 되지 않는 법
    [국방·안보칼럼] 전사의 규범은 '임전무퇴' 아니다
        2024년 03월 11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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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쫓기는 자는 달아날 수 없고, 쫓는 자는 추격할 수 없다.’

    아킬레우스의 헥토르 추격은 트로이아의 도성을 세 바퀴나 돌만큼 맹렬했다. 헥토르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정면대결을 선언하며 아킬레우스에게 누가 승리하든 패한 자의 시신은 상대 측에 돌려주자는 제안을 한다. 파트로클로스의 복수에 불탄 아킬레우스는 합의를 거부했다. 창을 잃은 헥토르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을 때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목을 창으로 찔렀다. 죽어가던 헥토르는 자신의 시신을 부모에게 보내줄 것을 재차 애원했지만. 아킬레우스는 거절한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신들의 노여움이 내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 후 숨을 거둔다. 아카이오이족(그리스)의 병사들은 헥토르의 사체를 창으로 찔렀으며, 아킬레우스는 시신에서 투구와 무구를 벗겼고 헥토르의 두 발을 매달은 전차에 올라타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트로이아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통곡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태종무열왕 7년(660년) 이른 가을은 황산의 들로 진군한 신라군과 이미 세 곳에 진영을 치고 있던 백제군의 대치 장면으로 시작한다. 삼국사기 계백열전에는 백제군 한 명이 신라군 천 명을 당해냈다고 적혀 있다. 계백은 이때 관장[관창]이 사로잡히자 처음에는 살려 보냈고, 그가 다시 붙잡히자 이번에는 그 목을 벤 후에 수급을 말 안장에 매달아 신라군 진영에 보낸다. 일본서기 긴메이기 15년조(554년)에는 신라가 백제 성왕을 죽여 머리는 북청 계단 아래 묻고 나머지 뼈만 백제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적에게 수급을 내준 계백의 행동은 분명히 이례적이다. 그가 망국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자세히 기록된 연유는 신라의 사관들이 이 같은 행위에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사는 어떤 유혹을 받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과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 헥토르는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두려움을 극복하고 쇠락해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에 아킬레우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의 분노에서 출발하듯이 싸울 이유가 없는 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절친한 전우의 죽음으로 자제력을 잃었다. 삶을 종결시키는 행위를 뜻하는 ‘killing’에서 고의적이고 불법적인 살인은 ‘murder’라고 한다. 군사심리학자인 섀넌 프렌치는 헥토르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행위가 ‘killing’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인 ‘murder’에 가까웠다고 진단한다. 더욱이 그는 헥토르의 시신을 모독까지 했다. 아킬레우스는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림으로써 그리스 전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상실했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를 만나며 아킬레우스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은 치유가 된다.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마무리가 되지만, 다른 작품에서 아킬레우스는 신의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2.

    1139년 4월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모든 성당의 어머니인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로 명명된 이 회의에서 채택된 그리스도교인이 준수해야 할 30조항의 규범 중에는 몇 가지 전쟁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공의회는 ‘하느님의 휴전(treuga Dei)’을 재확인(12조)했다.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Karolus) 왕조가 9세기 중반 사실상 분열하면서,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밀월은 깨지고 옛 프랑크왕국의 영역에서는 전쟁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회는 요일과 시간의 제한을 통해 전쟁이나 집단폭력의 발생을 규제함으로써 무력을 통제하여 교황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휴전’이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율법이라는 점에서 십자군전쟁(1095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활용되었다.

    둘째, 공의회는 기사들의 마상 창시합과 토너먼트를 금지(14조)했다. 중기병이 실전에서 대형을 이뤄 돌격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연습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의 마상 시합은 기사들을 두 편으로 나눈 모의 전투인 멜레(근접전 또는 난전, mêlées)였다. 우리가 영상에서 익히 봐온 기사들의 1 대 1 마상 시합은 13세기에 활성화된다. 토너먼트는 원래 멜레, 일대일 대결, 궁술, 힘대결, 마상 창시합 등 군사경연과 모의전투시합을 총칭해서 가리키는 말이었다. 말을 탄 기사가 무리를 지어 넓은 들판에서 벌인 멜레가 중심이 된 토너먼트는 6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 토너먼트가 있을 정도로 실제 전투보다 더 격렬했다. 이같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토너먼트에 참가하려는 예비전사들은 넘쳐났다. 승리한 참가자에게 주어진 부와 명예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던 대다수 기사의 자제들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패배한 참가자는 말과 갑옷의 박탈은 물론 몸값까지 지불해야 했다. 교회권력은 양질의 기사를 확보하고 기사의 전술 숙련도를 높이는 장으로 활용됐던 세속권력의 토너먼트를 위험성을 명분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히스토리엑스트라).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인 1066년 헤이스팅스전투를 길이 70m, 폭 50cm의 천에 자수로 만든 작품. 11세기 추정. 노르만 왕조는 영국에 토너먼트를 도입했다. 교회는 토너먼트를 악마의 발명품, 죄에 대한 유혹, 십자군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로 거세게 공격했다.

    셋째, 공의회는 쇠뇌(석궁)와 무릿매(돌팔매질), 활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들 무기의 구사를 살인기술이라고 규정한 29조 규범은 인간이 처음으로 원거리 살상 무기의 사용을 금지한 사례라는 점에서 전쟁 윤리학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흔히 쇠뇌의 사용만 금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라틴어 원문은 발리스타리(투척병, Ballistarii,)와 사기타리(궁수, Sagittarii)를 모두 금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발리스타리는 원래 로마군에서 발리스타라는 투척기를 다루는 병사들을 말하는데 쇠뇌와 무릿매를 모두 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이체 벨레의 기사는 쇠뇌의 뛰어난 갑옷 관통력과 기사 결투 정신의 위배를 금지의 주요인으로 보았지만, 10세기에 유럽에 나타난 쇠뇌가 통념과 다르게 살상력이 활을 능가하게 된 것은 좀 더 후대의 일이었다.

    다른 요인으로는 갑옷을 관통할 정도의 근력 완성과 궁술 연마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궁사 양성에 비해 쇠뇌는 조작의 난이도가 낮다는 점에서 이 신무기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으로 나눠진 중세 신분제를 위협할 수 있는 도구였다는 인식이다. 세 번째 요인으로는 14조의 토너먼트 금지와 연결을 짓는 설명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노첸시오 2세의 최대 맞수였던 시칠리아 군대에는 많은 무슬림 궁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이 이들을 지휘할 그리스도교 장수들을 파문하기 위한 수단으로 29조를 활용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 세 규범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전까지 로마 가톨릭의 교황은 2명으로 교회권력은 분열되어 있었다. 아나클레투스 2세의 죽음으로 교회의 분열이 해소되자 라테라노 공의회는 아나클레투스 2세의 후원자인 시칠리아를 단죄하는 무대가 되었다. 공의회가 끝나고 3개월 후인 7월 교황과 경무장 호위대는 이탈리아 남부 갈루치오(Galluccio)에서 매복한 시칠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고, 인노첸시오 2세는 포로가 되었다. 미냐노 조약으로 루제루 2세가 시칠리아의 왕이자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공인을 받음에 따라 이들 규범들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하느님의 평화와 휴전(Pax et treuga Die)’이라는 이상 실현은 쉽지 않았다.

    3.

    영어권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문학 작품에 리암 오플래허티가 쓴 4쪽 분량의 짧은 이야기인 <스나이퍼>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일랜드공화군의 저격수이다. 1922년 6월 어느 날 밤 더블린의 오코넬 다리 근처 옥상에서 주변을 주시하던 그는 담배가 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스스로를 드러냈다. 전사는 때마침 다가오던 장갑자동차 포탑의 사수와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준 할머니를 소총으로 잇달아 저격한다. 그 사이 저격수의 오른 팔뚝에 총탄이 박혔고, 부상을 죽음으로 위장한 그는 적 저격수의 선명한 윤곽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전사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은 적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기관총 세례를 뚫고 시신에 다가가 그 얼굴을 확인한다. 적 저격수는 그의 형제였다.

    리암 오플래허티가 1923년 1월 런던에서 발표한 이 첫 작품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아일랜드 내전의 실상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영국과의 조약을 둘러싼 찬반 갈등으로 시작된 내전의 별칭은 ‘친구들의 전쟁’이다. 목숨을 걸고 영국과 싸웠던 투사들은 친조약파인 자유군(Free stater)과 반조약파인 공화군(Republican)으로 분열했고, 형제와 친구, 동지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저자 역시 더블린 전투에 참가한 공화군 출신이다. [리암 오플래허티는 노동자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던 사회주의자로 공화군 내의 소수파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저격수 이야기는 당시 모든 아일랜드인 자신의 상처였다.

    아일랜드자유군의 중위로 임관되었지만, 이를 거부한 패디 레그니가 더블린 Four Courts의 지붕에서 권총으로 무엇인가를 조준하고 있다. Four Courts를 점거한 이들을 자유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더블린 전투가 발발했다. 원본은 흑백이다.

    2015년 1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북미에서 확대 개봉하자, 마이클 무어는 이 영화를 극찬하면서도 저격수라는 개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출했다. 영화의 개봉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을 앞둔 때였다. 마이클 무어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스나이퍼’의 총탄에 살해되었다고 썼다. 저격수를 피에 굶주린 암살자와 동일시하는 부정적인 인식이다. 로버트 포드가 1882년 미국의 전설적인 무법자였던 제시 제임스[비무장 상태였다]의 등 뒤에서 총을 쏘았을 때, 여론은 그를 비겁자이자 배신자로 바라봤고, 1892년 로버트 포드를 살해한 에드워드 오켈리는 7,000명이 서명한 탄원서 덕분에 감형이 되기도 했다. 마이클 무어의 삼촌은 미육군 공수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일본군 저격수에게 희생됐다. 미 해병대원으로 역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마이클 무어의 아버지는 ‘저격수는 겁쟁이다’, ‘사람의 등 뒤에서 총을 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라고 어린 마이클 무어를 교육시켰다.

    저격은 지상군의 주요한 정찰·매복·기습·유격 전술이다. 저격수와 저격무기는 국제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논쟁의 대상이다. 저격수는 이질적인 존재이며, 나쁜 단어이고, 숨어서 아무나 죽일 것 같은 이미지를 창출한다. 인간이 자신이 목표물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행되는 저격은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고대 관습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결투 문화가 오랫동안 보존된 서구에서 정면승부라는 기사 규범과 맞물려 비겁한 행위로 간주되어왔다. 저격은 사실 적 제대를 혼동에 빠뜨리고 혼란과 공포를 심어 적의 전투의지와 능력을 약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고가치 표적을 제거할수록 적의 사기는 떨어지고, 모두가 겁에 질리고,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같은 이해 없이 아무에게나 총질을 하려거나 살인을 우선시하는 저격수가 있다면 그는 즉시 임무에서 배제되어야만 한다.

    북베트남군은 전역 후 미해병대 정찰저격수의 전설이자 저격수의 요다라는 평가를 받은 카를로스 해스콕을 ‘롱 트랑’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위장모자에 ‘하얀 깃털’을 꽂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흰색’은 불안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거북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북베트남군은 중산층 도시노동자의 3년치 임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고, ‘코브라’로 알려진 저격수를 파견했다. 또다른 미해병대의 대표적인 저격수였던 척 모휘니는 생포될 상황에서는 언제나 휴대한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독일연방군 출신으로 1990년대 보스니아내전에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원으로 참전했던 롤란트 바르테초코는 생포될 위기에 처한 저격수가 고층 건물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저격수의 운명이다.

    작년 3월 우크라이나군 저격수였던 올렉산드르 마치예우스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공개되면서 그의 처형은 러시아군 전쟁범죄를 대표하는 사례로 선전된 바 있다. 교전능력이 없는 포로를 처형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으로 이를 살인(murder)으로 간주하고 비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에서의 살인만은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간이 전쟁에서의 살인이라고 해도 모든 사례를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살인과 받아들일 수 없는 살인은 명백하든, 모호하든 그 영역이 구분된다. 그런데 그 포로가 내 소대원, 내 절친한 전우를 사살한 저격수라면? 만일 내 품에서 숨을 거둔 전우를 죽인 그 저격수가 내 눈 앞에 서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섀넌 프렌치에 따르면 살인이 전사로서의 행위를 넘어서 개인의 증오, 분노, 복수, 절망과 연관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그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에 간직된 원한과 복수의 심정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전사의 숙명이다.

    삽화가 톰 리의 1944년 작품 2,000 Yard Stare(2천야드 응시)이다. 1944년 펠렐리우 전투 현장에서 계속된 전투로 해리(Dissociation)를 경험한 이름 없는 해병대원의 먼 곳을 응시하는 멍한 표정을 형상화했다.

    4.

    미 육군사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데이브 그로스먼은 대중의 정서와는 다르게 인간의 역사에서는 살인에 대한 저항의 역학이 있어왔고, 대다수의 남성은 타고난 살인자가 아니라는 가설을 주장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15∼20%의 소총수만이 적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는 S.L.A. 마셜 미 육군 준장이 주도한 연구 결과[반론도 많다] 등은 그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였다. 데이브 그로스먼의 주장에 따르면 문자를 배워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살인도 전쟁과 사회에서 배우고, 학습하는 것이다.

    미군은 폭력에 대한 둔감화(Desensitisation)를 통해 사격률을 개선하려고 했다. 첫 번째는 아군이 적과 감정적인 거리(emotional distance)를 두게 하는 것이다. 가령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크리스 카일이 이라크인에 대해 야만인이라는 비인간화된 언어를 사용한 것은 문화적인 거리를 두어 살인에 둔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나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정의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도덕적인 거리두기이다. 남북한이 서로를 적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전형적인 감정적인 거리두기이다. 두 번째는 조작적 조건형성(operant conditioning)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사람 형태의 표적을 도입하거나 포상휴가와 같은 보상, 얼차려와 같은 처벌 등 총기훈련 과정에서 끊임없는 자극과 반응의 반복 경험을 통해 군인은 반사적으로 사격할 수 있는 태세를 몸에 익히게 된다. 현대 전장에서의 발포의 75∼80%는 이 같은 자극-반응 훈련의 결과물이다.

    이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자켓>에 나오는 해병대 훈련소 교관 하트먼 중사의 육체적, 언어적 학대는 신병이 군사적 가치관을 수용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고, 지휘관의 존재는 적에게 발포할 가능성을 높이며, 부대원과의 유대관계는 집단행동에 대한 면죄부 심리를 제고하는 효과를 준다. 마지막으로 군인은 폭력과 공격성의 화신인 역할 모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미군 당국의 노력 결과 한국전쟁에서는 55%, 베트남전에서는 90∼95%까지 사격률이 향상됐다.

    데이브 그로스먼에 따르면 인간이 살인을 배우는 부작용으로 정신의학적 사상자(pyschiatric causalties) 증가라는 심리적 비용이 발생한다. 가령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이 1946년 발표한 제2차세계대전의 전투소진(combat exhaustion)보고서에 따르면 노르망디전선과 같은 지속적이고 치열한 전투의 경우 전투 60일 후의 생존자중 98%는 정신의학적 사상자가 되었고, 단지 2%만이 정신적인 문제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전선에서 군인은 200∼240일 사이에 한계점에 봉착한다. 전투 개시 후 군인의 효율성은 3개월 동안 최고조에 달하고, 그 후 효율성이 떨어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된다. 보고서 작성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전투에 익숙해지는 것’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의 매 순간은 너무 큰 긴장을 부과하기 때문에 인간은 노출의 강도와 기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살인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데이브 그로스먼은 많은 베트남전쟁 참전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들 중에서 이전의 적과 감정적인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와 반대로 베트남인을 계속해서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참전용사들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썼다. 전사의 규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임전무퇴에 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전사와 인간 모두를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이 비록 전쟁 과정에서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전사들도 언젠가는 전장을 떠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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