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첫사랑, ‘최초 수집품’에 대하여
    [컬렉터의 서재] 민중의 삶과 역사 전달하는 메신저
        2024년 03월 04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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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묻는 말이다.

    늘 봄날일 것 같았던 그들의 사랑은 여름에 접어들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자 상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상우에게는 야속한 말이겠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도 변해간다.

    사랑의 감정이 그러하듯 첫사랑의 기억도 변할 수 있다. 평생 다섯 명 정도의 여성을 사랑했던 한 남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에게 첫사랑이 누구였냐고 물으면 어떤 때는 시간상 제일 일렀던 초등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같은 반 여학생을 첫사랑이라고 할 수도, 또 어떤 때는 성인이 되고 세상 이치를 분별할 무렵 사귀었던 연인을 진정한 첫 사랑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때로는 처음으로 관능적 사랑에 눈뜨게 했던 연인을 첫사랑으로 꼽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아내와 같이 간 모임에서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난 연애 편력을 비밀로 한 채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아내가 오로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호기롭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 허진호 감독의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여주인공 은수(이영애 분)는 한 자리에 나란히 있는 두 무덤을 보면서 “저 무덤처럼 죽으면 같이 묻힐까?”라고 상우(유지태 분)에게 묻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둘의 사랑은 덧없이 변해간다.

    수집하는 사람으로서 첫 수집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이와 비슷하다. 기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나마 첫사랑은 많아봐야 열 손가락 정도 안에서 고를 수 있는 문제라면, 수집의 세계는 그보다 훨씬 방대한 것이어서 더더욱 선택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수집이란 것이 워낙 일상적인 것이고, 수집할 때마다 수집품 목록을 일일이 작성해두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컬렉터 대부분이 그렇듯이 수집 규모가 처음부터 그렇게 커질지 모르고 덤벼드는 일이라, 수집 초기에는 최초라는 딱지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할 수준도 안되거니와 ‘최초의 수집품’ 운운하는 것이 초보 컬렉터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자칫 오만함으로 비치지 않을까 저어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수집품’이라는 타이틀은 수집품이 꽤나 쌓이고, 컬렉터라고 불려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된 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 중 인상적인 것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컬렉터가 ‘최초’라고 밝히는 수집품이 실제로 최초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첫 수집품이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과거를 뒤돌아보면 수집 여정에 큰 의미를 가지는, 그래서 ‘최초’라는 이름표를 붙여도 크게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집품들이 몇몇 있다. 이번 글은 그것들에 대한 것이다.

    감자 박스 속 동전 한잎

    수집 세계에 입문하기 전 이 세계의 신비함을 느꼈던 첫 경험은 초등학교 3,4학년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밀양의 한 농촌 마을에서 성장했던 나는 부모님이 하는 농삿일을 보고 때때로 거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벼농사 이외에 수박, 배추, 감자 등 밭농사도 많이 지었는데, 그 중 봄철에는 감자를 많이 심었다. 그때 심은 감자 종자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어디선가 분배 받아 온 박스에 담긴 감자종자를 몇조각으로 쪼갠 다음 밭에다 심었다. 감자품종 이름은 ‘대지마’라는 품종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그 낯선 이름을 듣고는 ‘돼지가 먹는 감자’인가 생각하고는 혼자 키득거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대지마 감자는 1976년 일본 나가사키시험장에서 육성한 품종 이름이었다. 그 일본 품종의 감자가 어떻게 수입되어 우리 마을까지 왔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감자 쪼개는 일을 돕다가 박스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꺼내보니 사용 흔적이 거의 없이 깨끗한 일본 동전이었다. 액면 가격이 얼마였는지 또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었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다.

    나는 박스와 함께 외국에서 물 건너온 이 동전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며칠 동안 이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손으로 만졌다. 내가 처음으로 일본과 접촉한 순간이었다.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레슬링 한일전 중계를 통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수업을 통해 접하는 일본은 머리 속에 있긴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멀리 있는 일본이었다. 그저 TV 브라운관 속에서나 역사 교과서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미지의 나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 손 안에 굴러 들어온 동전은 접촉하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일본이었다. 물성을 가진 것만이 줄 수 있는 오묘한 힘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이 조그마한 동전을 들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이 동전은 일본 어느 지역에서 온 것일까?

    이 동전은 어떻게 감자 박스 안에 숨어 들어왔던 것일까?

    우연히 실수로 떨어진 것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일본인이 재미 삼아 넣은 것이었을까?

    혹시 동전 수집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한국의 수집가를 위해 선물로 넣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정확한 경위야 알 수 없지만 나는 잠시나마 이 동전을 통해 일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만났다. 그래서 훗날 세계사 교과서에서 일본 에도막부가 나가사키 부두 한켠에 축구장 2개 넓이의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그곳에 상관을 열어 네덜란드와 교역창구로 삼았다는 대목을 보고는 마치 그 곳에 가 본 듯 친숙함을 느낄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나가사키에서 개발된 감자 품종 ‘대지마’와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된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같은 것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왜 하나는 ‘대지마’고, 또하나는 ‘데지마’일까?

    수집 세계의 신비를 처음으로 귀띔해준 그 일본 동전은 얼마 후 내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나에게는 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동전을 통한 이 사소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수집가의 첫 씨앗을 심어준 것이 분명하다. 물성을 가진 사물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는 그 신비감은 줄곧 내 수집생활의 밑바탕이 되었다.

    수집 세계의 첫 문을 열어준 빗살무늬 토기 파편

    역사를 좋아했던 그 초등학생은 그후 폭풍 성장하여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농촌지역 고등학교에서 서울로 진학한다면 대부분 법대나 상경계열을 선택하던 분위기에서 인문계열로 진학한 것은 일종의 낭만이자 모험이었다. 특별한 비전이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역사가 좋아서 한 선택일 뿐이었다.

    신입생이 되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첫 학술답사가 있었다. 1987년 4월이었었을 것이다. 학술답사는 역사학과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로 정례화되어 있었다. 선배들은 학술(學術)의 ‘술’이 재주나 기술을 뜻하는 ‘술(術)’이 아니라, 마시는 ‘술(酒)’이라면서, 학술 답사이니 만큼 술 많이 마실 각오를 하고 오라고 미리 겁을 주기도 했다. 당시 답사 지역은 강원권이었는데, 거기에 강원도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은 양양이 서핑으로 유명한 핫플레이스지만, 당시는 그리 잘 알려진 곳은 아니었다. 오산리 선사 유적지는 기원전 8,000년전 신석기인들의 움집터가 발견된 곳으로 서울대 박물관 측에서 우리가 답사를 가기 몇 년 전에 이미 발굴을 끝낸 곳이었다. 이 발굴로 오산리 유적지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지로 새롭게 기록되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1만 년전의 유적지는 황량하기 짝이 없었으며, 바닷가에는 줄지어 서있는 해송들을 배경으로 모래 사장이 쭉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제 발표를 맡은 선배는 준비한 내용을 앞에서 설명했고, 답사를 같이갔던 학우들은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면 모래사장에서 벌어질 공놀이를 기대하는 듯, 모두들 지루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가 신석기 유적지라면 토기 파편처럼 뭐라도 그 시대 흔적이 남아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나는 모래밭을 발로 휘젓기 시작했다.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진지했을 리 없는 무의미한 발짓을 시작한 지 채 1분이 지났을까?

    적갈색을 띄는 물체 하나가 거짓말같이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엄지 손가락 한마디 크기쯤 되는 토기 파편이었다.

    선명한 V자 문양!

    누가 보더라도 빗살무늬토기 파편이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이라니…

    생각해보라.

    모래사장에서 발을 몇 번 휘저어서 신석기 시대 토기 파편을 주울 가능성이 얼마나 될 지를….

    깜짝 놀란 나는 급하게 몸을 숙여 이제는 손으로 그 주위를 조심스레 파헤치기 시작했다. 10여분을 그렇게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를 한 결과 토기 파편 몇 점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맨 손으로 이 정도를 발굴했으니 이쯤되면 일본에서 손만 대면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는 (물론 이후 조작으로 밝혀져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신의 손’ 후지무라 신이치가 따로 없지 않은가?

    [사진] 왼쪽은 1987년 4월 춘계 학술 답사 중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지에서 주제 발표 장면이고, 오른쪽은 필자가 양양 오산리 유적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빗살무늬토기 파편이다. (박건호 소장)

    1학년 초보 사학도는 고고학자라도 된 양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발견한 유물들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금방 손이 따뜻해졌다. 1만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접속하는 순간이었다. 그 조그마한 토기 파편들을 통해!

    구체적 물성을 가진 이 작은 토기 파편들이 혹독한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아 그 시대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이 토기 파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온기를 느끼며 신석기 시대와 대화하였다. 이 토기 파편들은 그것 자체가 사연과 비밀을 담고 있는 타임 캡슐이며, 그 속에서는 무한한 상상의 여백이 펼쳐져 있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한참 동안의 대화 후 나는 눈을 떴다. 모래밭에서 떠들썩하게 공놀이를 하고 있던 우리 학과 사람들의 모습과 모래밭을 뛰어다녔던 그 옛적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서로 겹쳐 보이는 듯 했다. 신석기 시대 모래밭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1만년 동안 주변 환경은 큰 변화없이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바뀌었다. 이렇게 이 땅 위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삶과 문화를 이어나갔고, 그것이 결국 역사인 것이다. 1987년 양양 바닷가에서 경험한 그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던지 나는 공식적으로는 그때 수습한 토기 파편들을 내 최초의 수집품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찬탁 반탁 전단지

    그런데 감자 박스에서 나온 일본 동전이나 양양 오산리 유적지에서 발견한 토기 파편을 ‘최초의 수집품’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우연히 나에게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통상 수집 행위는 컬렉터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수집 전략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동전과 신석기 토기 파편을 주운 것이 수집 여정에서 나름 이정표가 될 만한 소중한 경험이긴 하지만, 그것들을 획득한 것은 하나의 단발적 사건으로 그쳤을 뿐 그 이후에 수집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점도 그 머뭇거림의 이유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우연한 만남이 수집 세계 입문의 계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본격적 수집생활의 첫 시작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수집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집에 쓸 재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수집활동은 초등학생이나 대학생이 하기에는 버거운 것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본격적 수집의 세계에 들어선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정기적인 월급이 생긴 이후였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수집에 능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큰 비용을 들여 수집한 진정한 의미의 첫 컬렉션은 ‘찬탁 반탁 전단지’일 것이다.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2,00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꽁지머리에 빨간색 양복을 입은 범상치 않은 외모의 인물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그가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올린 반탁(反託;신탁통치 반대) 전단지를 한 점 낙찰받았는데, 그 전단지를 배송받고 얼마후 판매자가 연락을 해와서 만난 자리였다. 해방 직후 신문이나 이런 전단지류에 관심이 많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자 그가 해방 직후의 좋은 자료들이 있으니 보여주겠다면서 내 직장 근처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사진] ‘빨간 양복’으로부터 구입한 전단지 중 하나인 자살동맹 명의로 뿌려진 ‘오냐!!! 싸호자(싸우자)!!’라는 제목의 전단지로 한동안 필자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빨간 양복’이 들고 온 B4 용지 크기의 클리어 파일에는 해방 직후의 반탁, 찬탁 관련 전단지 수십 장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해방 정국의 전단지 60여점에, 해방 직후 발행된 신문들 20부 정도가 한 권에 담겨 있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반세기도 더 지난 오랜 전단들이 그렇게 완벽한 상태로 보존된 점도 놀라웠지만 그 격동기에 그런 것들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서류철을 보여주던 ‘빨간 양복’은 자신이 수집한 것이 아니라 어느 컬렉터의 의뢰를 받아 대신 판매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일종의 ‘미끼 상품’으로 한두 점 올린 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연락을 취해 판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격을 물었더니 200만 원에 다 넘기겠다고 했다. 당시 200만원이면 거의 내 한 달치 월급이었다. 높은 금액에 주저하자 ‘빨간양복’은 부담되면 필요한 것만 골라서 사도 된단다. 그럴 경우 가격은 한 장에 4만 원 정도.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모두 다 사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되고, 그렇다고 관심이 가는 전단 몇 장만 사게 되면 나머지 자료들도 결국은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게 뻔했다. 그리되면 자료 자체의 완결성이 깨지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격동의 시기에 자료들을 수집한 이름 모를 어느 컬렉터의 위대한 노고에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거금을 들여 그 자료를 일괄 구입했다.

    나의 본격적인 컬렉션은 이때 시작되었다. 취직 후 본격적인 수집생활을 시작할 때 그 첫 신호탄이 된 것이 이 반탁 찬탁 전단지였던 것이다. 이후 이 전단 자료들은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 당시 박물관에 대부분 매도해 지금은 내 품을 떠났다. 한때나마 이 전단지를 가지고 있던 때 나는 찬탁 반탁 전단지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가장 풍부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던 컬렉터였다. 첫 수집품이 뭐냐는 질문에 가끔 내가 엉겹결에 ‘찬탁 반탁 전단지’라고 말해 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병자년 가뭄을 노래한 한글가사와 귀향 명령 증명서

    마지막으로 꼭 소개하고 싶은 수집품이 둘 있다. 이 자료들은 시기적으로 보자면 ‘최초’라고 하기엔 다소 거리가 있다. 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최소 5년 이상 시간이 지난 후 수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자료는 나에게 수집품의 의미에 대해 큰 깨달음을 준 수집품이었다. 수집품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최초로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그 중 하나는 ‘애간장 타는 한 여름의 가뭄’이라는 제목의 한글 가사이다. 이 한글 가사의 크기는 가로 133cm, 세로 26.2cm로 두루마리 형식으로 되어있다. 한지에 붓으로 쓴 필사본인데 작자 미상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진] 병자년 대가뭄을 맞은 조선의 한 농민이 기우제 지내는 마음으로 쓴 한글 가사이다. (박건호 소장)

    저구름에 비가 올까 이 구름에 비가올까

    억만창생 애타게 하늘만 바라보네

    사방들판에 곡식 싹이란 싹은 모두 타버려

    붉은 땅이 되었고

    날씨는 언제나 푸른 하늘 불볕만이 내려 쪼이네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 어찌 이리 사나울꼬

    초조히 밤새워도 이슬 한방울 내리지 않누나

    빌고 빌고 또 비오니

    하늘이시여! 이 백성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잠깐사이 흡족히 비 내려 냇물 넘치게 하소서

    보통의 한글 가사는 부녀자들이 한글로 자신의 한과 애환을 표현한 것인데 경상도 쪽에서 이런 가사들이 많이 쓰였다. 시집살이의 고단함, 결혼해 시집으로 떠나는 딸에 대한 사랑, 친정에 대한 그리움 등등 주로 조선후기 부녀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그런데 한글 가사를 꽤 많이 봐왔던 내게 가뭄의 애환을 노래한 한글 가사는 매우 생소하고 특이한 것이었다. ‘애간장타는 한여름의 가뭄’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얼마나 큰 가뭄이길래 그리 애간장이 탔을까?

    길게 이어지던 가사는 마지막에 ‘병자년 4월 5일 씀’이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급호기심이 생긴 나는 큰 가뭄이 있었던 병자년을 찾기 시작했다. 종이 재질로 보아 100년은 족히 넘어 보였다. 이렇게 대략의 시간 범위를 정해놓고, 그 중 병자년에 해당되는 년도를 찾아보니 1756년, 1816년, 1876년 정도가 후보로 올랐다. 이 3개의 연도 중 가뭄이 심했던 연도를 찾아보니 1876년 병자년의 가뭄이 무척 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서 1876년 병자년에 ‘기우제(祈雨祭)’란 단어로 검색해보니 그해 4월부터 6월 사이에 무려 40회 정도 기우제가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4월 5일….

    한글 가사가 쓰인 4월 5일은 가뭄이 최정점이었을 때가 아니라, 이제 막 가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이었던 셈이다. 가사를 쓴 농민의 애간장 타는 마음은 앞으로 두 달이나 더 이어질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처지가 더 짠하게 느껴졌다.

    사실 1876년 병자년 그해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 해이다. 병자수호조약 혹은 강화도조약으로도 불리는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 해였다. 교과서에서는 이 조약을 중요하게 다룬다. 조약이 체결된 배경과 조약의 내용,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가뭄을 노래한 한글가사를 통해 처음으로 병자년 대가뭄을 알게 되었다. 한번도 교과서나 개설서 등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876년 당대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강화도조약의 영향은 아직 미지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그 해 가뭄은 당장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강화도조약보다 가뭄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강화도조약도 물론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876년의 조선에 강화도조약만 있었겠는가? 그렇게 역사가 단순하겠는가? 강화도조약에 가려진 수많은 역사가 또한 없었겠는가? 복잡한 민중들의 삶이 어떻게 ‘강화도조약’ 한 단어로 치환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수집한 이 한글 가사 한 점은 강화도조약으로 가려진 개항 당시 민중들의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자료가 없었다면 1876년 그해는 ‘강화도조약 체결’로만 기억될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수집은 단순히 수업 보조 자료로 학생들에게 보여줄 것을 찾는 행위였다면, 이 가뭄의 고통을 노래한 병자년 한글 가사는 내가 교과서를 통해 배운 역사 지식이 얼마나 엉성한지, 또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알려준 최초의 수집품이었다.

    내가 수집한 귀향 명령 증명서 한 장도 그러했다. 이것은 1946년 8월 무안공립농잠학교 교장이 콜레라 창궐로 인하여 장상기 학생에게 발급한 문서이다. 이 증명서를 통해 COVID-19로 우리가 최근 경험한 사회적 격리처럼 1946년 8월경에도 그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46년과 47년이라면 역사학도로서 내가 어느 시기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하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내 학사 졸업논문 주제가 1946년에 시작되어 47년에 끝나는 여운형·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논문을 쓸 때 해방 직후의 찬탁 반탁 관련, 미군정의 정책,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와 관련된 많은 책들을 읽어서 누구보다도 그 시대에 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밝음이 밝음이 아니었다. 이 증명서를 접하기 전까지 나는 당시 콜레라 창궐로 인한 사회적 격리와 민중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수집품 역시 병자년 가뭄을 노래한 한글 가사와 같은 충격을 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는 정말로 반쪽짜리였다는 뼈아픈 반성과 각성을 준 것이다. 이때부터 역사자료 수집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수집자료들은 내가 알던 역사지식을 단순히 보조해주는 정도의 가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대한 역사 구조에서 누락돼있던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메신저 같은 것이었다. 그 이후 수집자료를 통해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역사의 많은 공백을 조금씩 메꾸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이렇게 말한다. 내 역사 지식의 절반은 교과서에서, 나머지 절반은 수집자료에서 왔다고. 이런 각성의 계기를 준 ‘최초의 수집품’이 바로 병자년 가뭄을 노래한 한글 가사와 1946년 장상기 귀향 명령 증명서이다. 이 두 수집품에 대해서도 수집 시기를 떠나 또 다른 의미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헌정하고 싶은 이유이다.

    [사진] 1946년 8월 29일 무안공립농잠학교 교장이 장상기에게 발급한 귀향 명령 증명서이다. 해방 직후 콜레라가 창궐했던 시대 상황을 증언해 주고 있다. (박건호 소장)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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