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느 때와는 다른
    올해 정월대보름을 보내며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 대표 6년
        2024년 02월 29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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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얼마 만인가. 한 주 내내 겨울비가 이어지고 잔뜩 흐려 있던 하늘에 볕이 쨍하다. 다사로운 햇볕 한 줌이 그토록 소중한 시절. 어느새 잔뜩 물오른 들녘이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벙근 매화 꽃망울마냥 봄기운도 저절로 부푸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낭만파 농부>에 기별을 전하는 것도 퍽 오랜만이다. 지난해 끝 무렵 ‘고산권벼농사두레’가 임기만료에 따른 임원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글을 쓸 엄두를 내기 어려운 탓이었다. 내가 대표를 맡았던 지난 6년을 갈무리하는 일도 그랬거니와 후보로 선뜻 나서는 이들이 적어 애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이들로 새 집행부가 들어서 홀가분하게 짐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 홀가분함과 바뀐 상황의 어색함이 뒤섞여 새해 첫머리까지 빈둥거리며 지내던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원고 독촉을 받아든 것이었다.

    되짚어보니 이 칼럼을 써온 게 7년 세월이 다 돼 간다. 몇 번을 빼고는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시골살이 풍경을 그려왔다.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을 독자들에게 이런 얘기가 무슨 도움이 되고, 감흥을 줄까 내내 회의가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빠뜨릴 때마다 원고를 독촉해오는 것이었다. 그래, 사회-정치 의제 말고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다룬 얘기도 하나쯤은 구색을 갖출 필요는 있겠거니 하고 꾸역꾸역 써 보내던 터다.

    그 동안에는 한 해 동안 꾸준히 이어지는 벼두레 활동 덕분에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쌀 전업농인 나로서는 벼농사두레가 삶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두레가 출범하고 9년 동안 핵심구실을 해왔으니 말이다.

    벼두레 활동내용을 보자면 볍씨를 담가 모를 길러 모내기를 하는 5월 한 달 두레작업을 빼고는 내내 벼농사를 핑계로 어울려 노는 것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겠다. 그것만 따라가도 그때그때 시골살이 풍경을 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그 활동의 중심에서 놓여났으니 당장 어떤 얘기를 다뤄야 하는지 어정쩡한 상황이 된 것이지. 물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벼농사를 그만두거나 벼두레가 문을 닫지 않는 한 내 시골살이는 그 둘레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새 집행부가 들어서고 첫 사업으로 정월대보름 잔치를 벌였다. 지난 주말이다.

    여느 해처럼 달집을 높이 세워 태우는 벅적한 판을 펼칠 형편이 못 된다고 판단했는지 약식으로 조촐한 잔치를 준비했다고 한다. 장소가 마땅치 않은 듯하여 지금껏 해오던 대로 우리집을 내주었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 촘촘히 장작을 쌓고 기다란 나뭇가지를 세우니 ‘약식 달집’이 되었다. 여기저기 소원지를 매달아 불을 붙이니 아쉬운 대로 대보름 분위기가 난다.

    오곡밥, 시래깃국, 갖은 보름나물, 부럼과 곶감, 각종 술과 안주, 과일… 저마다 한 두 가지 싸들고 온 음식들이 야외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다. 귀밝이술이라 한 순배가 돌고 나니 자리가 왁자지껄. 그 와중에 느닷없이 더위를 파는 사람도 있고. 날씨가 내내 꾸물거리더니 끝내 빗발이 떨어지고 이내 주룩주룩 쏟아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잔칫상을 추스르고 집안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부터는 윷놀이판. 세 팀으로 나눠 승부를 겨룬다. 우승팀에 걸린 상품이 만만치 않아선지 분위기가 금세 달아오른다. 말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잡고 잡히고, 엎고 나르는 북새통으로 바뀌었다. 그럴수록 열기는 뜨거워 간다. 환호성과 탄식이 엇갈리고, 야유와 질시가 뒤섞이는 야단법석이 펼쳐진다. 싸움에서 진 쪽은 잔뜩 약이 오르게 돼 있고, “한 판 더!”가 거듭되는 법이다. 그렇게 두어 판이 거푸 벌어졌지만 승자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안에 ‘꾼’이 있는 것 같다.

    윷 노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더니 어느새 밤이 이슥하다. 이제는 판을 접어야 할 시간. 다들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뜨면서 모처럼 신명났던 잔치도 끝났다. 약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스무 명 넘게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나로서는 짐을 넘겨준 미안함과 마음 한 구석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예전처럼 잔치가 펼쳐져 마음이 놓인다. 한편으로는 상황이 변하고 리더십도 바뀐 만큼 그에 따른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 발전은 시나브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대보름도 지났으니 농사철이 머지 않았다. 불현듯 숨이 가빠온다.

    *<낭만파 농부>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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