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새로운 전쟁’ 이후 세계질서의 분석
    [책소개] 『전쟁 이후의 세계』(박노자/한겨레출판)
        2024년 02월 24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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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느덧 2주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곧 끝나기는커녕 러시아가 10년 이내에 나토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1973년 욤키푸르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수단 내전, 니제르 쿠데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20세기에 이어 세계는 또 다른 전쟁의 시대로 들어섰다. 이 전쟁들은 세계 질서를 어떻게 바꿀까? 그리고 한국은 격변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이런 질문들에 답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린 박노자 작가가 이번에는 소련 출신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을 살려,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 전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러시아 사회의 작동 원리를 내부자의 눈으로 세밀하게 분석한다. 또한 지정학적 관점에서 일련의 전쟁을 다원 패권 시대로의 이행을 알리는 징후로 해석하며,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입장과 노선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전쟁 이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한국이 나아갈 길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믿을 만한 나침반이 돼줄 것이다.

    전쟁을 ‘발전 전략’으로 삼은 푸틴의 러시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배경인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사회를 알아야 한다. 통속적으로나마 15개의 산하 공화국을 하나로 묶었던 소련 공산당의 좌파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러시아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로 대체됐는데, 이는 푸틴 체제의 억압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책은 반전운동을 조직하고 이끌 정치 세력의 부재에 주목한다. 대부분의 국내 제조업체가 군수업체나 군수업체의 유관 기업이라 많은 노동자가 푸틴의 군사주의를 지지하는데, 러시아의 주류 좌파 정당인 연방 공산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일부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있지만, 소련 붕괴 이후 급속한 자본주의화가 낳은 폐해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게다가 소련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공동체가 해체돼 러시아는 “각자도생에 골몰하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의 모래더미 같은 집합체”(51쪽)가 됐다. 강력한 반전운동이 조직되지 못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의 러시아가 전쟁을 일종의 ‘발전 전략’으로 삼았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군사 부문에서 미국 다음의 ‘2위 대국’인 러시아로서는 전쟁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성장 전략이라는 것이다. 강철, 망가니즈, 우라늄 같은 자원을 보유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 우크라이나를 “수복”해 국제 경쟁에서 보호받는 경제 영토 안에서 자본을 육성하고, 장기적으로는 서방과도 경쟁할 힘을 갖춘다는 것이 러시아의 구상이다.

    이런 ‘발전 전략’의 시행은 미국 패권의 쇠락과 맞물려 있다. 2008년 경제공황, 중국의 경제적 부상 등은 세계 질서의 정점에 있던 미국의 추락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푸틴의 러시아는 이 시점을 ‘발전 전략’을 추진할 적기로 판단했다.

    다원 패권 체제와 윤석열 정부의 실패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침략 그 자체가 아니라 침략을 계기로 분명해진 세계의 변화다. 중국, 인도,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등 세계의 각 지역 강국이 러시아 제재에 불참하며 미국의 리더십에 불복했다. 제재를 가한 나라들의 인구는 세계 총인구의 14퍼센트에 불과하다. 즉,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군림하던 일극 패권 체제가 여러 지역 강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며 견제하는 다원 패권 체제로 이행하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같은 세계 재분할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원 패권 체제는 평화와 거리가 멀다. “균형이 약간이라도 깨질 것 같으면 바로 군사적 대응이 실행되기 때문”(296쪽)이다. 저자는 세력 균형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는 대규모의 전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며 “장기 평화가 이제는 끝나가고 있는 것”(296쪽)이라고 강조한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수단 내전 등 최근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 한국은 잘 대응하고 있는가? 저자가 평가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러 정책은 낙제점에 가깝다. 한국이 1980년대에 소련과의 수교를 모색했을 때부터 대러 관계의 초점은 안보였다. 북한의 주요 후견 국가였던 소련이 상위 동맹국이자 군사기술 공급자라는 역할을 포기하게 만들어 북한을 견제하는 것이 한‧러 관계의 핵심 목표였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에만 치우쳐 철저하게 러시아의 반대편에 섰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캐나다, 폴란드에 포탄과 전차, 자주포를 수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는 이에 반발하며 북한과의 동맹을 견고히 했고, 북‧러 관계는 냉전 시대를 연상케 할 만큼 전례 없이 밀착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크게 악화한 것이다.

    전쟁의 시대를 전쟁 없이 지나는 법

    이 책은 전쟁의 시대를 전쟁 없이 헤쳐나가려면 ‘한반도 평화’를 중심에 둔 외교‧안보 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려면 무조건적 대미 맹종의 태도를 버리고, 한국이 미국 글로벌 전략의 ‘졸’이 아닌 한반도 주변 외교의 독립적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윤석열 정부가 취한 태도가 한반도 안보에 위협이 됐듯, 한미동맹에만 ‘올인’하는 외교는 위험하다. 특히 지금처럼 미국 패권이 쇠락하고, 세계 질서가 다원 패권 체제로 재편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만이 아닌 러시아, 중국, 북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과 평화 지향적인 외교에 나서야만 한반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러시아 사회와 세계 질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일련의 전쟁 이후 새롭게 재편될 세계 질서를 치밀하게 분석한다. 또한, 다원 패권 시대에 한국이 선택해야 하는 외교‧안보 노선과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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