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 외교를 밀어내는 시대···
    현실에 대한 분노의 무기화·군사화
    [국방칼럼] 중동과 홍해 남단의 위기 배경과 의미
        2024년 02월 15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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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은 전세계에서 반미 정서가 강한 지역이다. 이 지역 사람들을 과격하게 만든 대표적인 이유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있다. 예컨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종교 부흥 운동에서 출발한 후티는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반미•반이스라엘•반시온주의를 내걸며 급격하게 정치적 색채를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하던 예멘의 지배자 알리 압둘라 살레의 탄압에 맞서 2000년대 내내 정권과 유혈 충돌을 벌였고 점차 군사집단이 되어갔다. 현실에 대한 분노가 무기화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케임브리지대 부설 민주주의 미래를 위한 센터가 지난 10년 동안의 전세계 여론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2년 현재 미국에 대한 중동의 호감도는 50%를 하회한다. 이 수치는 25%를 상회하는 중국 다음으로 가장 낮다. 중동의 미국 호감도는 중국•러시아에 대한 호감도와 비교해 보아도 열세에 놓여 있다. 그나마 10년 전 25%에 머물던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중동에서 50% 가까이까지 올라온 것은 테러와의 전쟁이 마무리됐기 때문인데, 회복세이던 호감도는 가자지구 전쟁으로 인해 재추락하고 있다.

    지난 3일 미국의 이라크와 시리아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은 가자지구 전쟁이 미국의 전쟁임을 의미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취임 직후의 국가안보전략 잠정지침에서 미국이 ‘영원한 전쟁’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했으나, 2022년 10월에 정식 발표된 국가안보전략에서 이 문구는 사라졌다. 워싱턴포스트의 4일자 칼럼에서 이샨 타루어는 미국이 포스트 9.11시대에 다시 전쟁터에 뛰어든 것은 ‘영원한 전쟁’의 중단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는 중동에서 전투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전쟁’이라는 단어의 사용만큼은 강하게 거부한다.

    현재 중동의 갈등은 제1전선의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제2전선의 레바논 남부, 제3전선의 홍해와 예멘, 제4전선의 이라크•시리아 주둔 미군기지로 구분할 수 있다. 미 언론은 이 같은 전장의 확장을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을 뜻하는 스프롤(Sprawl) 현상에 비유한다. 또한 해상교통로 일부가 주요 전장이라는 점에서 전세계 경제와 자유무역도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이라크•시리아 주둔 미군기지들은 지난해 10월 17일 이후 170여 회의 공격을 받았다. 가자지구 전쟁의 종식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에게 정치적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기에 전쟁 확대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RealLifeLore) 뉴욕커 아난드 고팔 기자는 미국의 영원한 전쟁이 지속되는 이유로 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무력 투사의 아웃소싱과 ② 지배계급 입장에서 부의 이전 효과 없이 무기산업에 이전되는 국방비의 효율성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후티를 비롯한 무장조직의 대의명분은 어찌됐든 가자지구 전쟁이다. 그들은 가자지구의 휴전과 인도적 위기 완화를 목표로 이스라엘의 지상 목표물을 타격했으며, 홍해 남단을 겨냥했을 때도 처음에는 이스라엘 관련 선박만을 표적으로 삼았고, 제한 휴전이 성립됐을 때는 공격을 중지한 바 있다. 예멘의 후티는 중동의 지배층이 그러하듯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들에 불과하며, 여성 인권을 비롯한 인권 감수성도 현저히 떨어지는 불편한 집단이다. ‘팔레스타인 지지’라는 그들의 명분도 형식적인 구호에 불과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 논설위원이자 풀러신학교 이슬람 연구교수인 샤디 하미드에 따르면 이슬람주의는 서구의 가치관에서 명백한 급진주의일 테지만 하마스의 사상적 기반인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정치지형에서는 중도 우파로서 문화적 주류에 포함된다. 반면에 서구 정치사상은 이슬람 주류 밖에 위치하며, 특히 성평등 문제는 이슬람 사회에서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이슬람 사회의 민주주의는 서구 자유주의의 수용 없이 가능하다는 샤디 하미드의 ‘이슬람 예외주의’는 지적 논쟁의 대상이다.

    이슬람 정치의 특징은 종교와 융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후티 역시 종교•정치•군사적 특성이 결합된 집단이다. 그들의 신앙인 자이디가 740년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봉기했던 자이드 이븐 알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종파를 초월해서 부패한 왕조와 칼리파(왕, 수니의 최고 지도자, 영어로는 칼리프)의 불의에 맞선 정의로운 순교자로 기억된다. 서구의 연대, 솔리다리티와 유사한 개념인 아사비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묶다’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인 ‘아삽’에서 유래한 아사비야는 사람들을 함께 묶는 힘, 개인을 집단으로 묶는 것, 사회의 구성원들이 뭉치고 협력하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이슬람 문화에서 아사비야의 개념은 인간의 협력, 집단의 단결과 결속, 사회적 응집력이다.

    후티의 반이스라엘 기치에는 자이드 이븐 알리를 본받으려는 종교적 열정이 조금이나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앞장서 싸움으로써 아랍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우선시하고 비록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아랍의 단결을 도모하려 한다는 아사비야 정신의 모범적인 실천자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후티는 홍해 남단에서의 공세적인 행동에 힘입어 세계적인 스타로서의 악명과 함께 그들의 역할 모델이던 레바논 헤즈볼라의 위상에 버금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역설적인 상황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멘인들의 친팔레스타인 정서는 영국과 사우디 아라비아라는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미국을 위시한 많은 서구 전문가들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 시리아 알라위, 이라크 대중동원군, 예멘 후티 등을 모두 이란의 조종 아래 전쟁을 하는 단순한 ‘대리인(Proxy)’으로 평가절하한다. 하마스를 제외한 이들의 정서가 공통된 종교적 정체성에 기반한다는 점은 통상적인 증거로 간주되어 왔다.

    후티(영어 Houthis)는 예멘 북부 암란 주의 작은 지역(Houth) 이름이자 후티(Al-Houthi) 가문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당사자들은 정작 이 명칭을 거부한다. 이 정파의 정식 이름은 신의 지지자 또는 조력자라는 뜻의 ‘안사르 알라’이다. 안사르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622년 메카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도피했을 때, 무함마드 일행의 초기 이슬람 확산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현지 사람들을 가리켰던 말이다. 후티의 신앙이 위에서 말한 자이디이다.

    시아와 자이디는 단순히 교리의 해석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리 자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아의 교리에는 무함마드의 혈통과 신성을 이은 후계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열두 명의 이맘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에서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는 자이디(다섯 이맘파)와 6대 이맘까지 인정하는 이스마일(일곱 이맘파)는 열두 이맘을 모두 인정하는 정통 시아파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자이디의 교리에는 수니 이슬람의 요소도 많다는 점에서 그들을 시아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시아와 알라위의 차이는 시아와 자이디의 차이보다 더더욱 크다. 알라위의 교리에는 비이슬람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역사적으로 이들이 과연 무슬림인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이들이 시아라는 단일 종파로 그려지게 된 것은 정치적인 상황과 전망이다. 수니 이슬람에 비해 수적인 열세에 놓여 있는 시아 이슬람 입장에서는 교세의 확장이 절실했다. 시아 성직자들은 교리를 유연하게 해석해서 시아의 기반을 넓히는 노력을 해왔고, 파트너들 역시 이란과의 동맹이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켜 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시아 교리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왔다. 따라서 안사르 알라(후티)의 정체성에는 자이디와 시아가 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정치적 기반인 예멘 사다 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또 하나는 이들과 이란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① 이란과 이들 사이의 협력 구축의 위협성을 더 한층 강조하고, ② 그 같은 행위의 정당성을 훼손하며, ③ 중동 정치의 복합성을 무시하고 수니와 시아의 대립 구도로 몰고 가는 것이 서구에 유리하다는 정책적 판단과 프레임 전쟁도 스며 있다.

    후티(안사르 알라)가 예멘 최대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데에는 본인들의 역량과 정치적인 감각이 주요했다. 이들은 정권과의 무장 충돌로 2000년대를 보내면서 군사적인 역량을 체득했고, 아랍의 봄과 알리 압둘라 살레 정권의 지배연합이 크게 균열되는 시기에 예멘 북부 사다 주를 장악해 나갔다. 분열된 중앙권력의 정파들은 후티를 일개 지역세력으로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부상이 자파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 후티에 대한 견제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후티는 이 점을 이용하여 과거의 적이든, 미래의 적이든 가리지 않고 일시적인 제휴를 맺으면서 사나 정부로도 불리는 예멘 최대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후티의 갈등에서 종교적인 차이는 부차적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은 만주와 한반도의 관계에 비견할 수 있다. 사우디는 역사적으로 예멘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확보를 대단히 중시했고 여러 차례 예멘을 침공하거나 내전∙내정에 개입해 왔다. 2015년 3월 예멘 내전에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개입하면서, 후티와 이란이 공동의 적을 두고 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예멘 내전의 국제화와 장기화로 한국은 탄도미사일 방어체계 구축의 개발비를 절감했고, 대규모 해외 수요를 확보하는 수혜를 입었다. 사우디의 예멘 내전 개입은 후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오판이었고 사우디의 전략적 패배가 확인됐다는 점에서 침공을 주도한 빈 살만 왕세자의 정치력에는 의문 부호가 따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예멘 남부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홍해 주변에 연이은 거점을 확보해 무역과 물류 허브를 꿈꾸는 아랍에미리트의 밑천으로 만들려는 무함마드 대통령의 야망과 능력은 돋보인다.

    홍해에서의 분쟁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1948년 5월 벤구리온의 지도 하에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수에즈운하 이용을 차단했다. 1949년 3월 이스라엘은 휴전을 위반하고 홍해 진출의 관문인 아카바 만의 움 알 라슈라쉬(에일라트)와 접근로인 네게브사막을 점령함으로써 수에즈운하를 대신할 물길을 확보했다. 1956년 10월 수에즈 위기가 발생하자 이집트는 운하 폐쇄와 함께 아카바 만과 홍해를 연결하는 티란 해협의 봉쇄를 단행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7년 2월 대국민 연설에서,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3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일제히 아카바 만과 티란 해협의 자유 항행 여부가 지역 평화의 레드라인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후 10년 동안 이 수로에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 소유권을 상실하면서 예멘 남부 아덴의 전략적 가치는 영국에게 더욱 높아졌다.

    홍해 북단의 지도. 티란해협의 두 섬인 티란과 사나피르는 현재 이스라엘의 동의 아래 이집트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로 관할이 바뀌었다. (Bestcurrentaffairs)

    1950년대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을 중심으로 탄생한 아랍민족주의 운동이 우파적 경향의 나세르주의와 좌파적 경향의 마르크스주의로 나눠지며 중동 전역에 전파되고 있었다. 예멘 북부에서는 이집트 혁명과 나세르주의에 공감한 자유장교단이 1962년 9월 수도 사나에서 왕정을 타도했다. 공화파와 왕당파의 내전은 국제화되어 이집트는 공화파의 지원과 사우디 군주정 타도를 위해 북예멘에 7만 명을 파병했다. 나세르는 영국, 사우디 아라비아, 요르단, 이스라엘의 공동의 적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쿠바미사일 위기와 중국의 인도 침공이 있었다.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사우디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한 발 물러서 있었다. 1963년 6월 아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됐다. 홍해에서 인도양을 통한 적대세력의 북상 가능성을 부담스러워하던 소련은 사나의 공화주의자들과 아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투쟁에 기대를 걸었다.

    이집트는 1967년 5월 티란 해협의 봉쇄를 공식화하며 레드라인을 무효화했다. 린든 존슨 행정부의 6월전쟁(또는 6일전쟁)에 대한 입장은 중립이었으나 아랍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을 묵인했다며 분노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의 남단 곶에 위치한 샤름 엘 셰이크를 수에즈 위기 이후 다시 확보함으로써 티란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획득했다. 같은 해 11월 남예멘에서 영국군이 철수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정권이 들어섰다. 1단계 군주정 타도, 2단계 팔레스타인 해방을 꿈꿨던 나세르주의는 1970년 9월 나세르의 죽음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같은 해 12월 북에멘에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예멘은 이집트의 베트남이었고, 베트남은 미국의 예멘이었다.

    1967년 6월 7일 이스라엘군 제55공수여단 66대대 소속 예비군들이 점령지인 동예루살렘 통곡의 벽 옆에 서있는 모습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사진이다(David Rubinger). 6월전쟁은 아랍 지식인들이 세속주의(사회주의와 자유주의)에 의구심을 품고 정복과 승리가 곧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슬람 초기 신앙인들의 관점에 경도되는 전기가 되었다.

    6월전쟁은 원유의 무기화로 가는 전환점이었다. 영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유지를 감당할 국력을 상실했고, 1971년까지 수에즈운하 동쪽 지역에서 완전히 철군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6월 전쟁 직후 단행된 오펙(OPEC) 아랍 회원국들의 원유 금수 조치로 인한 재정 압박이 주효했다. 남·북 예멘이 바브 엘 만데브 해협을 포함한 홍해 남단을 통제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이스라엘은 에티오피아(현재는 에리트레아)의 섬을 군사기지로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71년 6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가 바브 엘 만데브 해협의 페림 섬에서 이스라엘 유조선 ‘코럴 시’에 로켓포 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973년 10월전쟁(욤 키푸르전쟁 또는 라마단전쟁)에서 이집트는 비밀리에 구축함 2척과 잠수함 2척을 파견하여 이스라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브 엘 만데브 해협을 봉쇄했다. 이에 동조해 오펙의 6개 아랍 회원국은 유가를 3불에서 11.6불까지 계속 인상했을 뿐만 아니라 원유 생산량을 줄이고 1974년 3월까지 미국 등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중동의 원유 무기화를 막기 위해 이스라엘에 6월전쟁의 점령지 반환을 압박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반환과 이스라엘의 수에즈운하 접근, 티란 해협 및 바브 엘 만데브 해협의 안전 보장을 교환했다. 우리는 이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라고 부른다.

    (Encyclopediageopolitica) 바브 엘 만데브 해협보다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관문은 수에즈 운하이다. 운하가 폐쇄된다면 홍해는 쓸모 없는 바다가 되지만 운하가 정상 가동된다면 제한적이라도 홍해의 기능은 유지된다. 따라서 후티의 바브 엘 만데브 해협 공세의 파장은 부풀려져 있다. 홍해 위기라는 용어는 미군의 공습을 정당화하는 과장된 표현이다. 10년이 넘는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에 대한 미국의 과잉 대응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이용해 왔던 원유 공급선을 상실한 데 이어 새로운 갈등 관계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미국 카터 행정부는 1980년 1월 ‘페르시아만을 장악하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는 미국의 필수적인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러한 공격은 필요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폐기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외국이나 지역 국가가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 엘 만데브를 포함한 중동 수로의 항행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을 미국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동 전략의 두 번째 원칙으로 카터 독트린을 계승하고 있다.

    가자지구 전쟁이 주변지역의 위기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중동지역 전략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안보전략에 나와 있는 미국의 중동전략의 대명제는 군사력 중심의 해법을 지양하고, 통합을 통해 지역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의 세부 전략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철통 같은 약속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두 국가 해법은 가자지구 전쟁에서 드러나듯이 병행 추진이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이란은 중동의 강력한 플레이어로서의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억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규정된다. 2015년 예멘 내전이 국제화되면서 바브 엘 만데브 해협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어왔다. 단지 국제사회가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작년 1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술적 타협과 일시적 휴전으로의 선회가 이스라엘과 관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중동지역의 안정된 현상유지로 인해 확보될 잉여 전력을 중국과의 경쟁에 투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정작 관심이 없다. 미국의 잘못된 관점은 전장의 범위가 계속 확장되는 원인이 가자지구 전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데 있다. 이는 미국이 가자지구 전쟁과 다른 충돌의 연관성을 부인해야만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해가 이스라엘에게 중요하다 보니 미국이 후티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상회복’(Return to normalcy)이라는 관용 어구가 있다. 이 말은 192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워렌 하딩 후보가 지어낸 것인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으로 트럼프 시대를 벗어난다는 의미로 회자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로 이라크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앤드루 바세비치는 당시 칼럼에서 미국의 ‘일상회복’이 단순히 트럼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트럼프 탄생에 책임이 있는 탈냉전시대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뿐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탈냉전시대의 일상은 이라크 전쟁으로 대표되는 군사행동주의의 만연에 있었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의회가 2001년 대통령에 부여한 무력사용권한(AUMF, Authorization for Use of Military Force)의 폐지, 끝없는 중동전쟁의 명확한 종식, 해외 미군 주둔지 축소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의 주장은 지금의 중동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문가들의 해법과 다르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가 그리 못하는 것은 ‘단극의 순간’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달콤했던 추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이 외교를 밀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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