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엽편소설] 나의 불안과 그의 신호
        2024년 02월 08일 12: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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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간 나는 전문의에게 과거에 집착하느라 시간만 낭비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전문의는 놀라울 만큼 뻔한 말들을 했다.

    “괜찮아질 겁니다.”

    내가 긴 시간 전문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흘러간 것만 같았다. 애써 못 본 척하려 했으나, 나와 마주 앉아있는 전문의 등 뒤 통유리 창에 전문의 컴퓨터 화면이 비쳤다. 전문의는 줄곧 나와 상담하는 동안 컴퓨터로 쇼핑 중이었다. 상담의 의미를 상실한 나는 처방해준 약이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자살 유가족은 시간이 오래 걸려요.”

    자살 유가족이란 명명에 뼈마디가 저릿저릿했다. 전문의는 모니터만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술은 줄이셨죠?”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카페인까지 끊은 나였다. 나는 그가 아예 다른 사람의 차트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선생님 저 이경애 환자예요. 72일 하고 6시간 전에 목 메달고 죽은 아버지를 직접 목격한 이문구씨 딸 이경애요. 3개월째 당신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화요일 오전 환자 이경애라구요.”

    전문의는 의자를 뒤로 민 뒤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췄다.

    “흥분하지 마세요. 이경애씨 압니다. 약 먹는 동안 금주해야 한다는 말일 뿐인데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시네요”

    전문의는 다시 화면에 ‘과민함’이라고 써넣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시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전문의의 치료란 코끼리도 재울 만큼의 졸피뎀을 합법적 권한으로 내게 처방해주는 게 다였다. 그 약을 먹고 나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몸속 기관들이 일시정지 된 기분이었다. 계속 바닥 밑으로 가라앉다가 이내 약기운이 떨어질 때야 일어나는 일상. 인생이란 더없이 시답잖고 귀찮은 생물학적 세포 활동에 불과하다는 체념. 무슨 목적으로 여기 이렇게 약값이나 축내며 들숨과 날숨을 내뱉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감각. 그러다 다시 약에 취해 그런 생각조차 잊고야 마는 무수한 밤들 뿐.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전문의는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그렇다고 말하고는 상담 시간이 다 됐다고 했다. 상담실을 나와 내가 먹을 삼 주 치 분량의 약이 나오는 동안 벽 한쪽에 크게 붙어있는 전문의의 이력을 훑어봤다.

    S대의학과 정신건강의학 박사 졸업
    한국정신신체의학전문가 과정
    사이코드라마 전문가
    자살유가족학회 자문위원

    그날 이후, 자살 유가족 모임이라는 사이트를 찾았고, 몇 가지 게시글과 자살 유가족 인증 글을 올린 뒤에야 그 모임이 월 2회씩 진행된다는 정보를 얻었다. 몇 번의 연락을 주고받은 뒤 그 모임의 참가 자격이 주어졌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불면과 우울로 보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흘러만 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기 위해 온 힘을 동원하고 싶었다. 박탈, 상실, 취약성으로 인생 전체가 뒤덮이는 것 같았다. 명상이든 운동이든 시도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어둠의 밑바닥에서 벗어나겠다는 갈망은 강렬해졌다. 나의 인생은 이런 식으로 계속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점점 죄어오는 우울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자살 유가족 모임은 주말 점심쯤이었다. 모임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는 게시글을 봤지만 내가 찾는 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왜 죽었을까요.”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모임을 주관하던 심리학자는 내 손을 잡고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죽음은 인생의 일부분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입니다”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영적 도덕적 안내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심리학자는 정신분석, 인문주의, 실존주의, 초개인주의 같은 학술용어를 들먹이며 통합적 심리치료가 이뤄질 것이라 했다.

    그의 장황한 설명이 끝난 뒤에도 모임에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이 모든 게 예정된 일이었나?’ ‘내가 죽게 한 것일까’ ‘왜 죽기까지 했어야 하지?’ ‘내가 한 잘못에 대한 처벌일까?’ ‘그렇다면 내가 죽지 않고 왜 그가 죽었지?’ 모임에 온 사람들은 존재, 신앙, 영성, 내세에 관해 자신들이 알던 사실을 송두리째 부정하기도 했고, 대부분 가족이 자살했다는 사실 자체에 실존적으로 분노했다. 그러한 분노가 어쩌면 스스로에게 힘을 주기도 하는 것 같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수십 년 심리치료를 받아봐도 아무 소용 없었다며 그저 이 모든 게 의미 없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자책’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여기는 듯했다. 심리학자는 자책만 해결된다면 모두 구원될 수 있다는 듯 말했다. 마치 단 하나의 거짓말만 스스로에게 허용하면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거라는 목표를 주입하는 것만 같았다.

    모임 횟수가 늘어날수록 모두 감정적이었다. 감정은 결코 정신력으로 제거할 수 없으며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복수하고야 마는 것이다. 잠시 동안, 어쩌면 몇 년 정도 감정을 눈에 안보이게 짓누를 수 있다 해도 감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폭발적으로 혹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왜’라는 질문에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 터이다. 모임이 끝날 때는 언제나 심리치료의 필요성을 재확인하며 헤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몇 달, 몇 해 이런 모임을 지속하면 우린 죄책감과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언제쯤이면 이 프로그램의 최종 목적인 ‘몸과 마음에 동등한 무게를 부여하고 비슷하게 주의를 기울여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과거를 딛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절망 속에서 자살 욕구만 억누를 수 있다면 이렇게 삶이 연장되기만 한다면 과연 다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의 자살이 느닷없었다. 아버지는 종종 혼자 있었고 혼자 있는 것이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오래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 일을 하고 있었는데, 종일 몸을 쓴 탓에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고 집에 와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차려준 밥을 겨우 한술 뜨고는 전기장판에 누워 꼬박 천장만 바라본 채 텔레비전 소리만 들었다. 일이 고되면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일하는 것이 쉬는 것보다 좋다고 했다. 그렇게 잠들고 알람 소리에 일어나 문밖을 나서는 일이 아버지의 일상 전부였다. 딱히 뭐라고 집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자기 만의 골짜기 안에 들어가 그늘지고 축소된 채 어두워져만 같던 것일까. 아버지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다.

    아버지가 안방 문고리에 벨트로 매듭을 단단히 묶어 목을 감은 날, 거실 가스레인지에는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아침에 내가 끓여둔 김치찌개를 냉장고에서 꺼내 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면 냄비에서 끓다가 다 졸아붙은 김치찌개 냄새를 기억한다. 그리고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모르겠는 장면이 뒤죽박죽 엉켰다. 퇴근 후 시장끼를 달래려고 밥솥을 열어본 뒤, 냉장고에 냄비째 들어가 있는 김치찌개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놓는다. 안방 문고리가 튼튼한지 살핀 후 그 위에 벨트 끈을 묶는다. 좁은 원 안에 제 목을 스스로 넣고 매듭을 동여맨다. 남은 생을 발로 밀어내듯, 바닥에 온 힘을 다해 주저앉아 버린 아버지의 모습이, 연습도 없이 단 한 번에 생을 끊는 일에 성공해 버린 아버지는 미소짓고 있었을까. 그 모든 장면이 순차적으로 잘 그려지지 않는다.

    49재가 끝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멍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종종 분하고 화났으며 울다가 발작적으로 과호흡이 왔고 제 발로 응급실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비참하고 쓸쓸했다. 나는 머릿속에 뒤엉킨 모든 과거를 끄집어내야 했다. 아버지에게 잠시라도 홀대했던 순간, 함부로 했던 말들, 무심코 한 행동 중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거나 그 어느 것도 아닌가. 그렇게 나는 ‘왜’라는 질문에 갇혀있었다. 마음의 감옥에서 이따금씩 과거의 흔적들이 떠올랐다. 그날의 이미지들이 따귀를 후려치듯 정신없이 찾아왔다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자살 유가족 모임에 계속 나갔다. ‘나는 누구를 언제, 어떻게 잃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시작이 언제나 고역이었다.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 속에 있는 나 자신이 때로는 비참했다. 어느 날에는 석사 과정 학생들이 참여해 모임에 온 사람들을 관찰했다. 절망에 빠진 내가 연구 대상이며 그들 표현대로 애도가 불가능해진 나의 상태가 그들이 쓸 논문에 사례 정도가 될 것이란 사실이 거북했다. 이미 나의 고통도 차고 넘치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들어줄 여유가 내겐 없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모두 웃고 있었다. 드라마에는 아버지와 소리 지르며 싸우는 딸이 나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갈등할 일도 없었던 부녀지간이었다. 뉴스에 등장한 정치인들은 OECD 자살률 1위라는 통계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포털 뉴스에 산재 국가라는 타이틀이 떴고 클릭을 하자 하루에 2명씩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문구가 나왔다. 언제나 그 옆에는 치솟고 있는 산재사망률 그래프가 보였다. 거리에는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처소들이 생겼다. 같은 색 옷을 입은 참사 유가족들은 연일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도 했고 삭발도 했다. 대통령실 철문 앞에서 우리도 다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영상도 비춰줬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자살한 유가족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나는 언제나 통계에 나오는 한 사례이거나,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번호를 저장해두어야 하는 사람쯤이었다. 자살예방교육을 듣지 않아서일까? 아버지가 보낸 자살의 신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버지 방의 서랍들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아버지 죽음의 원인을 찾지 못한다면 그저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채 약에 취해 살아야 할 터이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노트엔 각종 경조사비 내역과 근무일정표 등이 전부였다. 관리소장 지시 라고 적혀있는 내용에 ‘주민에게 친절히’라는 문구와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친절’이란 단어가 스치는 동안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해가 밝는 대로 아버지가 일하던 아파트에 찾아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좁은 경비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살짝 열려있어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택배 박스로 가득 차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의자 뒤로 전기밥통 하나가 덩그러니 보였다. 지난 폭염 유난히 땀띠로 고생한 아버지의 벌게진 살갗이 스쳐 지나갔다. 원룸 화장실처럼 초소 안쪽 마련된 작은 공간엔 변기와 함께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등 각종 물품이 놓여있었다. 예상했지만 주방과 화장실이 겸한 공간이 생각보다 끔찍했다. 사람이 먹고 자고 할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감옥 독방이 떠올랐다. 또다시 과호흡이 왔다. 폐쇄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파트 벤치 쪽으로 가서 참은 숨을 토해냈다. 경비원이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내가 앉은 벤치 옆쪽에 파지를 줍고 있는 노인이 있었고 경비원은 그 노인에게 병음료를 건넸다. 노인은 내가 앉은 옆쪽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는 음료 뚜껑을 천천히 돌렸다. 노인은 내 쪽을 향해 말했다

    “이 아파트 사람 아니지?”

    나는 흠칫 놀랐다.

    “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올여름도 그렇게 덥더니 오늘은 좀 선선하네.”

    나는 괜스레 아버지에 관해 말 한마디, 뒷소문 하나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혹시 그 전에 일하던 경비 아저씨도 아세요?”

    “아 그 양반 결국 그렇게 가는 바람에 한동안 경찰들이 드나들고 그랬어. 다들 안타까워했지. 나한테도 잘해줬던 양반인데 쯧쯧 안쓰러워. 참 성실했어. 뭐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 갔을까 싶어.”

    “경비실에 에어컨도 없던데 혹시 여기 사는 사람들이 경비원 막 부려먹고 괴롭히고 그러진 않았나요?”

    “아가씨도 어디서 나온 사람이구만, 별걸 다 묻는 걸 보니. 내가 이 아파트 앞 빌라에 30년 살았는데 여기 주민들 착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 아니야. 그리고 주민들이 찜통 더위라고 경비실에 에어컨 달아줄라고도 했어. 그런데 그 양반이 싫다고 한 거야. 주민들도 힘든데 자기는 찬 바람 쐬면서 편할 수 없다고, 이 아파트야 옛날 아파트고 낡았잖아. 에어컨도 없는 집들도 있다면서.”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아버지가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말도 모두 새삼스러웠다. ‘주민에게 친절하게’라고 적힌 글자는 아버지의 철칙이었을까. 나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박카스 한 박스를 사서 아버지가 일하던 경비실로 향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새로 온 경비원 아저씨는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였다. 장례식에 왔다면서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주민에게 친절히’를 언제나 강조했고 주민들 부탁이라면 다 해주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주민 갑질로 분신자살한 경비원 뉴스를 본 뒤로 더 몇 배는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주민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는 게 경비원의 자세여야 한다며 입주민 화장실 막힌 변기까지 뚫어주러 다녔다고 한다. 새로 온 경비 아저씨는 여러 차례 그러다 탈 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아니 그러다 어디 몸 다치기라도 해서 일도 못하면 그 자리를 누가 메우냐고 그래 놓고 결국 그렇게 가버리다니”

    그렇게 비좁은 경비실에 앉아 나는 내가 전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해 들었다. 어둠이 깔리는 길을 따라 집으로 걸었다. 휴대폰에 ‘경비원 자살’이라고 검색하니 마치 아버지가 일하던 공간과 비슷한 경비실 사진과 근조화환, 추모하는 주민들, 영정사진을 부여안고 땅에 주저앉은 유가족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돼 있었다. 추모 댓글이 있었고 맨 밑에 ‘다음 생에는 병든 사회에서 태어나지 않기를’이라는 문장이 써 있었다. 나는 그 문장에서 숨을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급히 향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뒷모습들을 보자 나는 갑작스레 불안해져 가던 방향을 잊었다. 건물 어딘가에 대형 스크린이 보였고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영정사진을 부여잡은 누군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 가족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고통에 가득 찬 얼굴을 화면에 꽉 차게 담았다. 그러는 동안 술병을 든 노인이 비틀대는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어느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불확실해졌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고선규 『여섯 밤의 애도』를 참조.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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