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봄 위기 사회’를 ‘돌봄 사회’로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로
    [책소개]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조기현,홍종원(지은이)/ 한겨레출판)
        2024년 01월 27일 05: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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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돌봄을 말한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돌봄 필요 증가, 코로나 팬데믹이 드러낸 돌봄 공백은 돌봄을 한국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 만들었다. 이런 논의들은 대개 간병비 지원, 돌봄노동자의 처우 보장 등의 제도 개선과 서비스 확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말 위기의 돌봄을 구할 수 있을까?

    스무 살 때 쓰러진 아버지를 10여 년간 돌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 등을 쓴 ‘영 케어러’ 조기현, 국내 최초의 방문진료 전문병원 ‘건강의집 의원’ 원장이자 《처방전 없음》의 저자인 홍종원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돌봄은 제도화된 서비스를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330쪽)고, 우리 모두가 취약한 존재이며 항상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는 ‘상호의존’의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돌봄의 위기를 넘어설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오랫동안 돌봄 현장을 경험하고 목격하며 돌봄의 가능성을 사유해 온 두 사람이 나눈 다섯 번의 대화를 엮은 결과물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깊이 각인된 ‘각자도생’의 논리에 저항하며 일상에서부터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맺자고, 그렇게 ‘돌봄 위기 사회’를 함께 ‘돌봄사회’로 만들어가자고 독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왜 돌봄은 늘 약자의 몫인가

    1장 〈돌봄의 관계를 상상하다_왜(Why)〉는 ‘돌봄 위기 사회’가 된 한국의 돌봄 실태를 짚고, 왜 누군가를 돌보는 일 자체가 위기가 됐는지를 탐색한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돌봄 시설들이 폐쇄되자 다시 돌봄을 떠맡은 가족들이 큰 부담을 지게 됐고, ‘돌봄 공백’ ‘돌봄 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전부터 돌봄은 항상 위기였다고 말한다. 돌봄은 대개 가정 내의 여성이나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자녀,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하는 ‘가치 없는’ 일로 여겨졌고, 돌봄 공백 또한 소수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돌봄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발생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계기였을 뿐이다. 따라서 돌봄 공백을 말할 때는 지금의 공백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왜 공백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해야 돌봄이 온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이 폄하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가장인 남성의 노동은 돈을 벌고 생계를 부양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여성의 가사노동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렇듯 돌봄이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지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현실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성의 논리와 맞닿아 있기에, 돌봄을 새롭게 사유하고 내용을 다시 채워나가는 일은 곧 한국 사회 전체를 돌아보고 변화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2장 〈돌봄이 필요한 시간_언제(When)〉는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돌봄의 시간’이 부족한지,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우리에게는 생애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매일의 일상이라는 단기적인 관점에서도 돌봄이 늘 필요하지만, 돌봄은 필요에 비해 항상 부족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정상가족’을 전제로 한 생애주기가 돌봄을 가로막는다. 단적인 예가 영 케어러다. 일반적인 생애주기에서 청소년은 돌봄을 받고 학업을 하는 존재로 정의되는데, 이런 인식은 어린 나이에 부모, 조부모를 돌보는 영 케어러를 ‘효자’ ‘효녀’로만 보게 만든다. 이 상황을 문제화하고,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상가족’은 매일의 일상에서도 충분한 돌봄을 불가능하게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은 “가족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한다. 이렇듯 돌보는 가족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노인장기요양보험은 가장 높은 등급의 노인에게도 하루 3시간의 요양보호 시간만 제공한다. 하지만 돌봄의 필요는 국가가 보장한 3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나머지 21시간은 공백으로 방치되어 있다.

    이 책은 또한 ‘돌봄의 시간’을 늘리는 것을 넘어 그 시간에 어떻게 개입하고, 그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돌보지 않는 시간에도 방문진료 의사, 지역 주민들이 오가며 취약한 타인을 돌보는 관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3장 〈돌봄의 동료들과 관계 맺기_누구(Who)와〉는 돌봄노동자, 의사, 공무원 등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이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좋은 돌봄’을 해낼 수 있을지를 말한다.

    돌봄노동자를 대할 때 필요한 태도가 존중이다. 돌봄노동자는 허드렛일하고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여성이 많아 쉽게 성추행, 욕설,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족 보호자들이 ‘돌봄노동자가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폭행한 것 같다’고 불만을 늘어놓으며 감시하려 들 때도 있다.

    의사는 치료자가 아닌 ‘돌봄의 동료’가 되어야 한다. 병과 고통을 없애는 치료의 역할에만 몰두하면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질환의 순간, 의사는 무력해지기 쉽다. 때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정리해야 하는 귀한 시간을 검사와 치료에 빼앗길 수 있다. 말기 질환이 아닐 때도 ‘질병을 박멸할 수 있다’는 치료의 권위가 ‘관리’의 용이성을 위해 불필요한 약물을 남용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실제로 돌봄하는 사람의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신체 상태만을 기준으로 ‘근로능력 있음’이라고 판정하거나, 부정 수급을 막기 위해 서비스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도 ‘대상자 아님’이라고 판단할 때가 많다.

    이 모든 관계에서 공통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는 잘 돌보기 위해서 협력하는 관계라는 인식, 함께 해내고 있다는 관계 맺음이다. 그렇게 모두가 돌봄의 동료로서 당사자에게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 그것을 위해 각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함께 논의해 보자고 이 책은 제안한다.

    새벽 6시의 전화벨에 무작정 달려갈 수 있다면

    4장 〈시설과 집의 이분법을 넘어서_어디서(Where)〉는 ‘집이냐 시설이냐’라는 오래된 질문의 틀을 바꿔, 당사자가 안도감을 느끼는 공간을 만들 방법을 다룬다.

    장소안도감이라고 불리는 개념을 통해 단순히 그곳이 물리적으로 넓고 쾌적한 공간인지 묻는 것을 넘어 “장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갖고 존중감을 느끼게 하는 것, 그를 통해 사회와 연결되는 힘을 얻게 하는 것”(209쪽)을 지향하자는 취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과 시설 중 어느 쪽이 좋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의사나 간호사가 없어서 바로 치료받을 수 없는데도 집에 온 뒤에 좋아지는 환자, 병원에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환자도 있지만, 주거지가 열악해 스스로 요양원에 입소하는 이들도 있다. 많은 시설에서 폭력과 감금, 강제 노동 등의 인권침해가 발생하지만,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병이 제한적이라 집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여성은 집에 있으면 집안일을 해야 하므로 시설에 머물려 하는데 남성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례처럼 저마다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장소에 대한 선호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두 저자는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는 대신, 개개인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와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해 보자고 권한다.

    5장 〈돌봄이 길이 되려면_어떻게(How)〉는 돌봄을 중심에 둔 사회, 돌봄으로 재구성된 사회로 이행할 방안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캐슬린 린치 더블린대학교 평등학 교수의 사랑노동, 돌봄노동, 연대노동이라는 개념을 빌려 여러 돌봄관계에 내재한 문제를 돌아본다. ‘근거리의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지는 돌봄’을 뜻하는 사랑노동은 주로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데, 돌봄은 가족 가운데 가장 약자가 떠맡지만 정작 돌봄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결정은 ‘돈을 내는’ 힘 있는 사람들이 내리곤 한다. 그 과정에서 주 돌봄자는 스스로 결정권이 없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또 인정하다가 무너진다.

    돌봄노동에 대해서는 돌봄노동자와 돌봄받는 대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최소화할 방법을 제시한다. 흔히 ‘간병인을 잘 만나는 건 복의 영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둘의 성격이나 특성을 파악해서 매칭하는 대신 ‘그냥 파견해서 돌보면 된다’는 식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캐릭터를 잘 존중해서 관계를 맺으면 복의 영역이 아닐 수 있는데, 복을 잘 매칭하고 분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복이나 운의 영역, 우연의 영역으로 둔 거”(305쪽)라는 의미다.

    ‘원거리 관계에서 벌어지는 돌봄’을 뜻하는 연대노동에 대해서는 ‘새벽 6시에 갑자기 응급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무작정 갈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진다. 나와 어떤 관계이든 내가 필요한 낯선 타인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돌봄사회가 저 먼 곳에 어렴풋이 존재하는 이상향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자신이 ‘돌봄의 인프라’가 될 때

    이 책은 돌봄을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공기’에 비유한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 평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우리는 돌봄 속에서 살아왔고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듯 우리를 존재하게 한 돌봄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돌봄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 세계를 구성해 보자고, 두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 일은 곧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돌봄의 가치를 무시하고 서로 돌보는 관계를 맺지 않는데 사회복지 제도가 확충되고 돌봄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는 없다. 아무리 잘 정비된 제도도 메울 수 없는, 사람만이 채워야 할 부분도 있다. 그래서 저자들은 돌봄을 제도화된 서비스나 시장의 상품으로 한정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가 ‘돌봄의 인프라’가 되어 취약한 이들, 나아가 우리 자신을 돌보는 관계를 함께 맺어가자고 권한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만 언젠가 늙고 병들고 약해질 미래의 우리를 부정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환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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