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중국'의 해석 투쟁,
    상호 이해에서 상호 불신으로 급변
    [국방칼럼] 미중 갈등의 핵 '대만', 지정학적 위험 커
        2024년 01월 24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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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이르기를 천하대세란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또 반드시 나누어지는 법이라 했으니”(황석영 옮김, 삼국지 1개정판, 제1장 도원결의).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의 첫 소절에 나오는 통합과 분열은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는 불교의 세계관 아래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연의의 결말은 주, 진, 한나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집약한 머릿말에 이미 정해졌다. 한 왕조 이후 세 나라로의 분열은 반드시 진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합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쳐진 하나에는 분열이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다의적인 의미로 처음부터 하나를 적대시하는 개념이 담겨 있다. 합쳐질 수 있는 것이 중국이지만, 나누어질 수 있는 것도 중국이다. 대만문제의 권위자인 리처드 부시는 이것이 중국 역사의 ‘관성(모멘텀)’이라고 말했다. 연의의 세계관을 오늘의 양안 관계에 적용했을 때, 중국이 대만에 하나(통일)을 압박할수록, 대만은 이에 반발하여 하나의 대안인 분열(독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1971년 7월 미국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비밀회담에서 미국은 대만의 정치적 미래에서 ‘두 개의 중국’ 해법이나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 해법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미국과 중국은 1972년 2월 상하이 코뮤니케라고도 하는 미·중 공동 성명에서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One China) 문구에 공식 합의했다. 미국은 ① “대만해협 양안의 모든 중국인들이 오직 하나의 중국을 유지한다는 사실과, ②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acknowledge)한다. 미국 정부는 그러한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닉슨 이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하나의 중국’ 문구를 원칙으로 지칭했다. 그런데 고위공무원들은 1980년대 어느 시점에서부터 변화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를 기점으로 미국은 종전과 같이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언급하면서도, 그 문구를 정책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의 용어로 간주하고, 대신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표현하는 관행을 확립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에 대한 미·중의 입장이 다르다는 뜻이다.

    1972년 2월 중국 방문을 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사진의 여성(왼쪽 두 번째)은 통역관 탕웬솅(唐闻生)으로 1943년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다. 아버지 탕밍자오는 칭와대 출신의 공산당원으로 1933년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1950년 매카시즘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귀환했다. (차이나 데일리)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영토임을 확인했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의 이행을 재확인했다. 중국은 같은 해 10월 연합국 전체 회의가 광복 이후 국제질서 확립을 위해 출범시킨 유엔의 상임이사국이었다. 이때까지 중국은 곧 중화민국이었다. 1949년 12월 국민당이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국부천대’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중국은 천하질서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중국을 자처한 대륙의 중공과 그 중공의 정당성을 부정한 대만의 중화민국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두 개의 중국으로 전환됐다. 국부천대 이전부터 국민당 정권의 몰락을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대륙에 수립될 새로운 정권이 반드시 소련에 비우호적인 성향의 정부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전략은 현재는 쐐기전략이라고 부르는 반목과 분열책으로 지속성이 불투명한 국민당 정권하의 대만의 전략적 가치보다는 소련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유고슬라비아로서의 중공의 활용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1950년 1월 미국은 대만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중공이 같은 해 2월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몇 달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NSC 48/1전략은 실효성을 상실했다.

    미국이 한국전쟁과 냉전의 격화로 인해 중공과 적대관계에 돌입했다고 해서 장제스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도 아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동아시아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1951년 9월 소집된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 어떠한 중국 정부도 초청하지 않았고, 대만으로 옮긴 국민당 정부에 파견할 대사를 사실상 임명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이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을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은 아이젠하워 정부이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대만해협 위기가 소련과의 핵전쟁으로 확전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국과의 외교 채널을 구축했다. 미·중은 1955년부터 1970년까지 16년 동안 136차례의 대사급 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법률상(de jure)으로는 하나의 중국만을 승인했으나, 양 측 정부의 반발 속에 사실상(de facto) 두 개의 중국을 추구했다. 이 같은 미국의 ‘현상유지’ 전략은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 첫째, 중공과 소련의 갈등이 심해져 과거 폐기된 전략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환경이 무르익고 있었다. 둘째,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인해 인도차이나반도를 중심으로 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게 되었다. 셋째, 신생독립국들의 신규 가입으로 유엔의 회원국 구성이 달라짐에 따라 대만의 중화민국은 국제 입지가 약화되고, 중공의 입지는 강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10월 캐나다가 서구에서는 처음으로 중공을 중국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통차이 위니짜군에 따르면 국가는 지리학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구분된 경계선과 지도화된 경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쉽게 이야기하면 근대 국가의 영토를 시각화한 지도라는 매개체를 통해 경계 안의 사람들은 동질감, 소속감, 애국심, 자부심 등 상상된 국가의 이미지를 인식하며 근대 국민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개념을 지리체(geo-body)로 명명했다. 가령 1949년 이후 중화민국과 대만의 지리체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중화민국의 지리체를 여전히 대륙과 동일시한 국민당 정부는 ‘두 개의 중국’ 또는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 해법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돌파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 또한 1949년 ‘국부천대’ 이전부터 대만이 삶의 터전이었던 사람들은 중화민국의 상상된 지리체 안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없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이 상황은 중화민국의 관제 민족주의와 대만의 크리올 민족주의의 갈등이다. 관제 민족주의는 대만인을 중국인으로 만드는 것,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과 기존의 본성인을 같은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노예(장제스, 일본민중에게 고하는 글)이자 스파이(우줘류 소설, 아시아의 고아)였던 본성인이 외성인과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중국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본성인은 중화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에 미달한다는 우월감과 차별의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타이두(립운동의 약칭)의 탄생은 아메리카 크리올이 식민지 이주민에 불과할뿐 유럽제국의 신민이 돨 수 없다는 자각 속에 모국과 별개의 의식을 확장해 나가며 정치적 독립을 실현했던 크리올 민족주의에 비견될 수 있다.

    타이두는 대만 인구의 다수(69%)를 차지하는 푸젠성 출신 민남인 중심의 반중국 민족주의로 혼종성(hybridity)이 특징인 대만 문화와 충돌한다. 대만에는 태평천국의 주도세력이었던 객가인(16.2%)과 국민당과 함께 온 외성인(5.5%) 등이 존재한다. 남부를 중심으로 1732년까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부족연맹체가 존재했고, 그 후손들(3%)도 남아있다. 2007년의 연구결과는 대만인의 85%가 원주민의 DNA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대만의 시급한 과제는 4대 족군이 가진 다원성과 복합성, 서로 충돌하는 정체성과 역사·문화적인 인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대만인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다.

    미국의 모든 대만 지원 품목에 부착된 방패 모양의 중미합작 이미지(왼쪽)이다. 중미농촌복흥연합위원회 로고도 같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장제스 정부에 대대적인 경제·군사 원조를 단행했다.

    쑨원주의가 ‘구제달로’(만주족 지배 타도)와 ‘중화회복’을 강령으로 내세우면서도, 1911년 수립된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1912년 공포된 중화민국 임시약법은 청의 영토주권 승계를 표방하는 모순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베네딕트 앤더슨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민족해방에 기반한 대중 민족주의와 제국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한 관제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대만은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영토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민당·공산당이 모두 대만을 중국혁명과 별개의 민족혁명으로 여기고 독립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예컨대 1931년 11월 제정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대강」은 대만을 포함한 소수 민족의 독립 국가 수립과 중화 소비에트 연방의 가입과 탈퇴의 자유를 보장한다. 에드가 스노우가 1936년 중국공산당을 취재한 르포인 중국의 붉은 별에는 마오쩌둥이 대만의 독립을 거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두레출판사 개정판, 132쪽). 에드가 스노우는 1972년판에 추가한 후주에서 마오의 발언이 대만의 ‘독립을 인정할 의도였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지만(568쪽) 마오가 인터뷰에서 대만을 조선의 독립 문제와 동일하게 취급하면서도 내몽골, 외몽골, 신장, 티베트의 미래는 중화소비에트연방의 자치국가로 명확하게 설명한 것으로 볼 때 스노우가 역사적 사실과 상충되는 중국공산당의 변화된 입장을 변호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민족자결에 대한 우호적인 의식은 항일전쟁의 격화로 통일전선 구축이 강조되면서 점차 ‘단결, 중화각족, 일치 대일’이라는 민족단결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대만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확실히 변화한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침공하고, 1942년 1월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대표들이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4대 강국은 전쟁의 방향과 추축국의 전후 처리 문제 등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중화민국은 같은 해 왕충후이가 주도한 국제문제토론회를 중심으로 전후 구상에 대한 체계적인 방안을 기초하며 국제 협상에 대비했다. 중화민국은 전후질서를 통해 추구하는 최우선 목표를 중국의 영토와 주권의 완전한 회복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영토 확장 욕구를 청 왕조의 계승자로서의 중화민국의 권리로 포장하여 다른 강대국들의 견제와 반발을 무마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1895년 이래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영토의 수복’이었다. 중국의 욕망은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국제법 위에 강대국이 있는 현실 때문에 1943년이든, 1972년이든 대만인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결정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중공 정부 대표가 중국의 유엔 주재 유일합법 정부 대표임을 승인하고,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는 장소에서 ‘장제스’(원문 표현)의 대표 추방을 결정하는 그 유명한 ‘2758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72년 2월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미·중 관계의 걸림돌이던 대만을 드디어 포기했지만 두 개의 중국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중화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수교국이자 동맹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1979년 1월 미국은 “중공 정부를 중국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① 중화민국과 단교, ② 상호방위조약 폐기, ③ 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1978년 12월 중공 정부는 성명을 통해 미·중 사이의 장애물인 대만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제 대만 문제는 완전히 중국의 내정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수교3원칙 수용으로 하나의 중국의 불완전성은 해소된 듯했고, 미국은 중국에 패배한 것으로 비춰졌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중국은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중국은 1979년 미국의 하나의 중국 개념을 좀더 구체화하고,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중국을 확산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그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하나의 중국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미국의 하나의 중국은 전략적 모호성과 이중 전략에 기반한 현상유지를 지향한다. 미국의 정책은 군사력과 정치력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며 중국·대만 양 측의 일방적인 행동을 억제하는 밸런싱이자, 중국의 무력 침공을 억제하고, 대만의 독립도 억제하는 이중 억제를 추구했다. 따라서 양안 관계를 처음으로 국가 간의 관계로 규정한 리덩후이나 ‘일변일국’(양안의 각각의 국가)에 의거 대만 독립을 강력히 주창한 천수이볜은 미국으로부터 ‘트러블 메이커’라는 공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트럼프는 이 모호함에 강력히 도전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첫번째 외국 정상 접촉인 시진핑과의 통화에서 하나의 중국을 존중(honour)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후보 시절 중국의 핵심 양보 없이는 합의가 지켜질 이유가 없다고 발언한 데 이어 당선인 신분으로 대만 차이잉원 총통과 통화함으로써 미·중관계의 규범을 깼다. 트럼프 취임 직전에는 차이잉원이 중미 순방 중 미국 공항을 경유함으로써 또 하나의 규범이 무너졌다. 중국은 이를 대만을 활용하여 중국을 제어하려는 ‘이대제화’(以台制华)전략으로 보고 미국에 강력히 반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합법 정부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중국’, ‘대만은 중국의 일부’ 문구이다. 중국의 입장은 1979년 1월 미국이 중국을 승인하는 미·중관계의 정상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이 문구도 자연스럽게 미국이 같이 승인한 것으로 간주한다. 1979년 성명은 1972년과 동일하게 이 문구를 인식(acknowledge)한다고 되어있다. 중국은 인식을 승인으로 이해하는 반면, 이 외교 수사는 공식 용어인 승인(recognize)이나 일반 용어인 동의(accept)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재 미국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국민당 정부 국방부 참모차장 우쉬(吴石) 중장(사진)과 대만공작위원회 서기 차이샤오첸(蔡孝) – ① 차이샤오첸은 장정에 참여한 유일한 대만인이다. 그는 대만에 조직 건설 임무를 부여받고, 1946년 5월부터 활동하던 중 1950년 2월 또다시 체포되자 전향했다. 지하당은 관련자 1,800여 명 체포와 함께 붕괴되었다. ② 우쉬는 장개석 독재에 염증을 느끼고 1948년 봄 공산당에 입당했다. 암호명은 ‘밀사1호’. 차이샤오첸의 전향으로 존재가 드러나 1950년 6월 처형됐다.

    1979년 2월 대만관계법 관련 논의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제이콥 제비츠는 중국 측 문서의 ‘승인’(承认)과 미국 측 문서의 ‘인식’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미국이 하나의 중국에 대한 중국의 (승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은 영어 문서를 구속력 있는 문서로 여기고, ‘인식’을 미국에게 결정적인 단어로 여긴다고 답변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1979년 성명에서 1972년 성명에 쓰인 ‘인식’이라는 용어를 보험 또는 덫의 성격을 가진 안전장치로 생각하고, 이 외교 수사를 영어 문서에서만큼은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중 양 측이 상대 측 언어로 작성된 문서에는 자국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명문을 읽은 중국인은 대만이 이제 우리 영역이 되었다고 기뻐했을 것이고, 미국인은 중국인이 대만을 자기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용어의 차이는 1979년 미·중 수교가 절충된 성격의 합의였고, 여전히 불씨가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1949년 ‘국부천대’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사실상(de facto) 승인하면서도, 대만이 중국의 영토주권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의 모순된 조치는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확인하는 순간 대만을 둘러싼 전투가 내전으로 간주됨에 따라 홍군의 공격으로부터 존속이 불투명한 국민당 정부를 미국이 개입해 지원할 근거를 상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미국의 전략적 사고는 미·중관계 정상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미·중 관계의 3대 공동성명인, 1972년 2월, 1979년 1월, 1982년 8월 성명에서 나타난 대만의 지위는 모호하다. 중국의 일부(a part, 一部分)라는 문구는 중국의 일개 성(province)과 같은 명확한 표현이 아니다. 1972년 성명에서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성’임을 명확히 하였으나, 어느 성명에서도 미국은 중국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민국과 공식적인 관계는 중단했으나, 그 해 4월 대만관계법 제정 이후 대만과는 비공식으로 명명한 문화·상업·기타 관계를 가져왔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기타 비공식 관계인데 1982년 8월 공동성명은 수교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공식적인 관계와 비공식적인 관계의 구분이나 정의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대만관계법에 근거한 비공식적인 관계의 유지로 언제든지 대만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미국은 이 모든 애매모호함을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거나, 하나의 중국 정책이 있다는 합의를 유지한다는 말로 대신해왔다. 중국외교부의 중국외교사는 수교 협상에서 미국의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 희망과 그 같은 사고가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시각이 서로 충돌했고, 이 문제가 협상에서 해결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또한 미국이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

    미·중 관계의 문제가 하나의 중국에서 출발했고, 하나의 중국으로 가는 걸림돌은 대만이었다. 따라서 미·중 문제의 핵심 중의 핵심은 대만이다. 미국은 양안 관계의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 하나의 중국을 이슈화하고, 1979년의 합의 개념을 규범의 준거틀로 각국에 전파함으로써 대만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확고히 하였다. 대만 문제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대만은 미·중 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리트머스 검사지이자, 체온계의 역할을 한다. 미국이 정치적인 볼모로 대만을 계속 이용하는 한 그리고 중국이 불평등조약으로 대만을 강탈당했다는 1910년 신해혁명이 만든 한족의 상상된 민족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대만은 미·중 충돌의 기폭제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하나의 중국을 훼손하려는 듯한 태도는 중국의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의지를 재고케 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대만을 포함한 미·중 삼각관계의 문제는 중재자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1 대 2의 불리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만을 중국과의 경쟁에서의 균형추이자, 유사시 대만 해협을 중국과의 전쟁터로, 대만 경제를 반도체 제조 기지로만 인식할 뿐인 미국 전략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대만이 미국에 전적으로 편승하고, 타이두를 중심으로 ‘연일항중’(일본과 연합하여 중국에 대항)까지 나오는 것은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의 배반이 늘 관통해 왔던 것이 대만의 역사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노선을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버리고 대만 안의 서로 다른 정체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향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대만에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 같은 감정이입이 우리의 정책 결정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미중 갈등은 하나의 중국으로 상징되는 미중의 상호 이해가 위기와 갈등을 막아주던 환경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표이다.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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