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끈 수집의 세계
    [컬렉터의 서재] 한 명의 역사컬렉터가 탄생하기까지
        2024년 01월 18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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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컬렉터’란 말은 내가 지어낸 말로 이전에 없던 말이다. ‘골동품 수집가’란 말이 주는 불편한 느낌 때문에 내 정체성에 부합되는 단어를 찾겠다며 궁싯거리며 ‘역사 사낭꾼’, ‘역사 자료 수집가’, ‘역사 수집가’ 등과 함께 고민하다가 최종 선택한 것이다. 표준어로는 ‘역사 콜렉터’가 맞다.

    역사교사, 역사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 해왔던 나는 지난 몇 년간 참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머릿속에만 있던 완전 미지의 세계였다. 분명히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건 어쩌면 수집품, 혹은 그 수집품을 만들어냈던 시대와 사람들의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옛 자료들 속에 숨어있던 어떤 영혼이나 정령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이리저리 밀쳐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그간 나를 추동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글은 내가 어떻게 역사 컬렉터가 되었는지의 과정과 수집자료들이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역사 교사로서의 나

    나는 1993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93년 명덕외고에 부임하면서 시작된 교직 생활에서 내가 가장 열정을 쏟았던 것은 문화사 수업이었다. 직접 현장을 답사하거나 값비싼 도록들을 구입해 한 장 한 장 슬라이드 필름을 제작했다. 당시 월급의 절반 정도는 여기에 썼을 것이다. 환등기도 내 월급으로 직접 구입했다. 이렇게 제작된 슬라이드 필름으로 수업을 구성해 유일하게 암막이 설치된 공간이었던 지하 과학실험실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의 궁궐, 고구려 벽화, 도자기, 민화, 석탑과 불상,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장승 등 한국의 문화를 주제별로 가르쳤다. 학생들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사진] 1990년대 후반 학교에서 슬라이드 수업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학교 홍보물에 들어갈 사진으로 촬영한 거라 밝게 찍혔지만, 실제 수업은 훨씬 어두운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관심 없는 학생들에게는 몰래 잠을 청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슬라이드 수업은 7년 만에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내 문제로 재단 측과 교사들의 갈등이 표출되는 가운데 다수 교사가 학교를 떠나는 상황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나 역시 학교를 그만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딱히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마침 강남대성학원에서 강사 섭외를 해왔다. 그리하여 사교육 시장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내가 2000년부터 강남대성학원에서 재수생을 가르치는 강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재수학원 강사로서 부닥친 첫 고민은 재수생 상대로 슬라이드 수업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그것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찾은 해법이 실제 역사 자료를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유물이 크게 실린 도록 등을 들고 가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경매로 수집한 자료들을 하나씩 둘씩 보여주는 것으로 발전했다. 신기한 자료들을 보고 학생들은 수업에 더 집중했고, 나도 그런 느낌들이 좋았다. 그래서 한 시간의 수업 시간에 적어도 3개 정도의 실물 자료를 보여주겠다는 계획이 세워졌고 본격적인 수집 활동이 시작되었다. 수집에 대한 관심이 원래부터 있긴 했지만, 본격적인 수집은 강남대성학원에서 재수생을 가르치면서부터였다.

    [사진] 강남대성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장면이다. 사진처럼 필자는 수업과 관련된 자료를 직접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수업했다.

    유물 매도, 유물 공유 그리고 기록학 공부

    이런 과정을 통해 해를 거듭할수록 수집품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강의 주제와 관련된 것이 우선 수집 대상이 되었지만, 점차 그 범위는 확대되었다. 수집품의 종류도 늘어났고, 가격도 점차 비싼 쪽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수집품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이었고, 그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를 어디에 두었는지 찾는 것도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비례하여 아내의 불만과 잔소리도 점차 많아졌다. 이는 모든 컬렉터들이 공통적으로 겪게되는 고난이자 숙명이다. 월급을 받아도 도대체 그 돈들이 어디로 갔는지 비는 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아내의 불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2012년이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던 그때 우연히 신문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근현대사 유물을 매입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나는 내 자료 일부를 매도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통해 나의 수집이 가치 없는 일이 아님을 아내에게 한번 보여주고 싶었고, 또한 나 스스로 수집한 자료가 정말 가치 있는 자료들인지도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검증받고도 싶었다.

    게다가 이참에 자료들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간 수집한 자료들 중에 박물관이 매입 희망하는 것 중심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기한 내에 매도 희망 신청서를 작성해 박물관 측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2주에 걸쳐 수백점의 자료에 대해 사진을 찍고 상세 정보를 찾아 정리했다. 낮에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와 이 일을 해야 했는데, 2주 동안 하루에 2~3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면서 강행군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뭔가 충만한 에너지를 느꼈다.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일을 하면 피곤해야 하는데, 나는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일이 너무 설레고 재미있었다. 수집된 자료의 사진을 찍고, 자로 길이를 재고, 이름을 붙이고, 그 자료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정리하는 일이 흥미진진했다. 결국 박물관에 수백점의 유물을 매도하고 일정 정도의 돈을 손에 쥐는 것으로 이 일은 마무리되었다. 매도한 자료들과의 이별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인데, 그간 내가 자료를 수집한 것은 오로지 수업을 좀 더 흥미롭게 진행하기 위해서이지, 재산적 가치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수집은 재화를 목적으로 해서도 안되며, 또한 수집품은 누군가의 독점물이 되어서도 안된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수집한 자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에 디지털화해서 제공하기로 했다. 마침 거기에는 대학 과 동기가 근무하고 있어서 일 진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제공된 자료는 사료철로 132건, 사료 건수로 615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는 지금도 그때 내가 사료가 탑재되어 있고, 누구나 이를 볼 수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는 필자가 제공한 자료들이 올라가 있다. 사진은 필자가 제공한 사료 이력에 대한 화면이다. 사료철이나 사료건 항목을 클릭하면 세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또 하나 든 생각은 이렇게 설레고 흥미로운 일이라면 보다 체계적으로 관련 학문을 공부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기록학(記錄學, Archival science·Archival studies)이었다. 기록학은 19세기 유럽의 고문서학(Diplomatics)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데, 기록물의 평가, 수집, 진본 확인, 보존, 검색 제공 등의 업무를 하는 데에 필요한 이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당시 한국에서 기록학은 명지대와 한국외대가 유명했는데, 명지대는 실무 위주이고 한국외대는 이론과 실무를 보다 균형 있게 가르친다는 정보를 보고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45세 만학도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2013년부터 2년간 재수생들 가르치는 일과 중에 일주일에 2∼3일 정도 대학원을 다니는 생활이 이어졌다. 다른 과들은 이수학점이 24학점이지만, 정보기록학과는 33학점을 이수해야 해서 더 많은 공부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나는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공부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역사 작가가 되다

    당시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공부하던 만학도가 맞닥뜨린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록학의 중심이 내가 관심을 가지는 종이 기록물이 아니라 전자 기록물이라는 점이었다. 개설된 과목도 전자 기록물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로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강의는 ‘기록학개론’, ‘한국근현대 문서연구’, ‘한국기록관리의 역사’ 등 몇 개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그리 큰 흥미를 주지 못했다. 내가 더 이상 공부를 진행시키지 않고,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석사 논문을 쓰느니 차라리 그 에너지로 내 수집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쓰자.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계속 그쪽에서 공부를 해 나갈 비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석사학위 논문 대신으로 책을 쓰겠다는 나름의 다짐과 약속도 한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자료 속의 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와 사연 때문이기도 했다. 수업을 위해 하나하나 모아 두었던 자료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해 점점 그들은 목소리를 키워갔다. 어떨 때는 회한과 슬픔이 가득한 이야기를, 또 어떨 때는 벅차오르는 감동과 환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우 사소한 이야기같지만,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어떨 때는 그 자료들이 자기들끼리 잡담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자료들이 보관된 방문을 열면 온통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드디어 그들은 나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우리 이야기를 대신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실 수 있겠소?”

    나는 잠시 주저했다. 책을 써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고민 후 나는 그들에게 약속하고 말았다.

    “좋습니다. 제가 능력은 없지만, 당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보겠습니다.”

    이렇게 나는 이중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책쓰기에 도전했다. 2018년부터 연재해왔던 ‘레디앙’의 글은 훌륭한 초고 역할을 하였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와 접촉해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20년 7월 드디어 총 14편의 사연을 담은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온 후 14편에 포함되지 못한 자료들의 불만과 원망을 진정시키며 2023년 1월 새롭게 10편의 사연을 담은 『역사컬렉터, 탐정이 되다』라는 속편을 내게 되었다. 이 두 번째 책에서 ‘역사 컬렉터’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두 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20년부터 나는 ‘역사 작가’라는 낯선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일 모두 자료들이 나를 이끈 결과다.

    2020년 첫 책이 나온 후 대학원 지도교수님 앞으로 “석사 논문을 대신하여 이 책을 드립니다”는 글과 함께 책을 보내드렸다. 이로써 대학원에 들어간 지 7년 만에 나는 석사과정을 스스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22년 지도교수로부터 정보기록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 기록관리의 역사’ 과목 강의를 해달라고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격학기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해 수업을 들은 지 대략 10년 만이다. 역시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나의 자료들이, 또 내가 쓴 책이 나를 대학원생을 가르치는 그 교단 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사진] 필자가 쓴 책들 표지이다. 이 책들 속에는 필자가 수집한 자료들이 들려주는 옛 역사 이야기가 각각 14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집 전도사가 되다

    2020년 7월 첫 책이 나온 직후 tvN [유퀴즈온더블럭]이라는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게 되었다. 2020년 8월 광복절 특집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작가가 퀴즈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길래, 내가 역사 문제를 출제하면 진행자나 패널이 문제를 맞추는 그런 프로그램이냐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이 프로그램 작가들이 나를 알게 된 것은 출판사에 홍보용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영상 때문이었다. 영상에 소개된 ‘일장기 재활용 태극기’가 자신들이 기획하는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에 어울릴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만약 내가 그 프로그램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에서 녹화를 했을 거다. [유퀴즈온더블럭]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침마당], [여성시대], [스미다], [평생학교], [선을 넘는녀석들-더 컬렉션] 등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거기 출연해 옛 자료 속에 담긴 역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각종 도서관이나 중고등학교, 지방자치단체, 국가보훈부, 서울시교육청 교원연수 등에서 강연하는 기회를 가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지만, 내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라 다수의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매우 쑥스러워한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대중 앞에서 역사 자료 수집의 중요성과 자료 속에 담긴 역사 읽기 등에 대한 대중 강연을 하고 있다. 모두 내 수집자료들이 인도한 세계이다. 이것 역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료들이 내게 부여한 일이라면 나는 흔쾌히 그것을 따르고자 할 뿐이다.

    [사진] 왼쪽은 2020년 7월 tvN [유퀴즈온더블럭] 녹화장면, 오른쪽은 2023년 10월 MBC [선을넘는녀석들- 더컬렉션]의 한 장면이다.

    옛 그림을 수보(修補)하다

    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상태가 좋지 않은 자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종이문서 같은 경우는 ‘배접(褙接)’이라고 해서 간단한 방법으로 수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림이다. 그림 수집은 가끔 하긴 하지만, 내 수집의 주 대상은 아니다.

    몇 년 전 온라인 경매에 올라온 물품 중에 훼손이 심한 까치호랑이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나는 보는 순간 대단한 명화라고 확신했다. ‘신년희보(新年喜報)’를 그린 까치호랑이 그림에서는 보통 호랑이가 한 마리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내가 만난 그림에서는 어미 호랑이 아래 새끼 호랑이가 두 마리 더 그려져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호랑이 입이라든지 그림 중간중간에 석채(石彩)를 이용한 것도 이 그림이 보통 그림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상태 때문인지 입찰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시작가 10만원에 그림을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림의 훼손 상태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림이 접히는 부분은 만지면 바스라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조금 더 방치하면 더 이상 소생불능 상태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인사동에서 옛 그림을 전문적으로 수보하는 전문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찾은 곳이 운경표구사였다. 이곳에 그림을 조심스럽게 가져가 수보가 가능한지 물었다.

    문화재수리기능장인 표구사 김용신 대표는 가능하다고 했다. 비용은 60만원이라고 했다.

    나는 작은 부분들 몇 군데를 가리키며 이런 부분들도 수보가 가능할지 문의했다.

    “그것도 가능한데, 그런 전문적인 수보를 하려면 비용이 100만원 정도로 늘어납니다.”

    나는 잠시 고민도 빠졌다.

    이 그림이 수집가의 10배를 들여 수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그림일까?

    이 그림은 내가 평가하듯 정말 ‘명화’이긴 한 것일까?

    나는 결국 내 판단을 믿고 수보를 의뢰했다. 수보 기간은 한 달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한 달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한 표구사에서 나는 건강한 모습으로 변신한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 원래 네 모습은 이런 장한 모습이었구나.”

    나는 조심조심 그림을 차에 싣고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그림을 살린 이후 나는 재미를 붙여 몇 점의 민화를 더 수보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지도 않는 나는 왜 그림을 수보하는가?

    이리저리 역사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훼손이 심한 그림을 만나는 것은 회사 출근하다가 응급한 환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과 같은 일이다.

    ‘내가 이 그림을 수보하지 않으면 이 그림은 곧 소실되고 말 거야.’

    이런 마음으로 뜻하지 않게 나는 옛 그림을 수보하는 일도 떠맡게 되었다.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옛 그림들이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도 모두 옛 자료들, 그들이 나를 떠밀어 시킨 일이다.

    [사진] 필자가 수집한 까치호랑이 그림이 수보되는 과정이다. 제일 왼쪽이 처음 수집했을 당시의 그림이고, 제일 오른쪽이 수보가 끝난 상태의 그림이다. 크기는 가로 60cm, 세로 110cm로 까치호랑이 민화로는 비교적 대작이다. (박건호 소장)

    국가기록원 수집자문

    책을 내고 1년이 지났을까? 국가기록원에서 연락이 왔다. 민간기록물 수집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국가기록원은 말 그대로 국가기록물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국가기록물 중 공공기록물은 그 기록물을 생산한 공공기관으로부터 이관을 받아 관리하면 된다. 그런데 민간에서 생산된 민간기록물은 기증이나 매입을 통해 수집할 수밖에 없다. 이때 기증이나 매입을 할 때 그 기록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평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집자문위원회 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국가기록원에서 나를 민간기록물 수집자문위원으로 위촉한 것은 내가 쓴 책 때문이었다. 역사와 기록학을 공부한 데다 기록물의 가치를 밝히는 책까지 출간했으니 수집 자문역을 맡겨도 되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서너 번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방문해 수집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익산시민기록관 콘텐츠 감수를 맡았다. 익산시에서 민간기록물을 수집하여 시민기록관을 개관하고자 하는데 수집한 1만4천점의 기록물에 대한 콘텐츠 감수를 의뢰한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걸쳐 기록물을 감수했다. 그리고 2024년 1월 초 익산시민기록관이 정식 오픈하였다.

    내가 대전의 국가기록원을 방문하여 수집 자문을 하고, 전혀 연고가 없는 익산시민기록관에 대한 콘텐츠 감수를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두 내가 수집한 자료들이 내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며, 국가기록원과 익산에 있는 민간 기록물들이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 2023년 8월 국가기록원에서 민간기록물 구입을 위한 적정성 평가를 위한 회의 당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기록물들이다. 수집자문회의에서는 이 자료들의 구입 여부와 구입 가격을 협의해서 결정한다.

    다만 가슴 뛰는 일만 행하라

    이처럼 수집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다양한 경험을 선사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의 보조자료에 불과했던 자료들이 점점 세를 불리더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나를 이리저리 앞세웠다. 내가 기록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게 된 것도 그들의 입김이며, 내가 책을 쓰고 수집 전도사로 활동하는 것도 오롯이 그들의 힘이다. 내가 자료를 수보하고 대전 국가기록원을 방문하는 힘도, 익산시민기록관과 인연을 맺은 것도 그 배후에는 자료들이 있다.

    나는 이 자료들이 가진 거대한 힘을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이 보여준 힘도 가늠하기 힘든데, 앞으로 또 어떤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 어떤 도구로 사용할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순리대로, 주어진 길만 걸어갈 뿐이다. 역사자료를 발견하고 수집하고 흥분하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오로지 그 마음만 간직할 뿐이다. 나머지는 그 자료들이 인도하는 길로 조심스럽게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고 가슴 설레는 일을 하면 된다. 무엇보다 삶은 즐거워야 한다.

    일찍이 독일의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그대 일에 있어서 다만 바른 일만 행하라. 다른 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를 약간 수정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대 일에 있어서 다만 떨리고 가슴 설레는 일만 행하라. 다른 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동시에 나는 이 말의 역설도 함께 마음속에 새기고자 한다. 훗날 옛 자료들을 보고도 설레는 마음이 사라지는 날, 수집한 자료들은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료들도 죽고, 자료와 나의 오랜 대화도 죽게 되는 것이다. 역사 컬렉터의 소명도 그날 마침내 끝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 컬렉터의 운명인 것이다.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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