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퇴보, 1992년 남북 합의의 종언
    [국방칼럼] 핵이 준 증오와 제재가 준 고통만 남기고
        2024년 01월 11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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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5월 완간된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어판 머리말에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사실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고 썼다. 이 격언의 주인공인 고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 전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은 토론 말미에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커밍스는 이 격언에 좀더 살을 붙였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사실임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자신의 견해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진실의 수용 여부는 독자가 선택할 문제인 것이다.

    거대한 퇴보

    필자가 글의 서두를 견해와 사실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작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진행된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8기 9차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의 해석 때문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들이 승인했고, 김정은 총비서의 육성으로 발표된 북한의 『2024년도 투쟁 방향에 대하여』라는 결론문에는 남북한이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이고,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는 기존의 남북한이 서로의 관계를 정의하던 개념을 완연히 부정하는 북한의 방침이 담겨있다. 북한은 이를 ‘강령적인 결론’이자 ‘중대한 정책적 결단’이며 ‘근본적인 방향 전환’으로 천명하고 있다.

    1991년 12월 13일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와 같은 해 12월 31일 가서명하고, 이듬 해인 1992년 1월 14일 서명문을 교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문’은 2월 19일 발효된 이후 지금까지의 남북한 정부의 상호관계에 대한 공식 지침서였다.

    남북한은 이 문서에서 서로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과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는데 동의함으로써 상호인정과 평화통일이라는 향후 남북관계의 중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 북한의 전원회의 결론문은 남북관계를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데 이어,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할 것임을 공표함으로써 평화통일 지향과 무력통일 배제라는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번 북한의 전원회의 결정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서구 사회가 사회 발전과 진보로부터 멀어지는 형국을 뜻하는 ‘거대한 후퇴(große Regression)’ 개념에서 착안한 남북관계의 ‘거대한 퇴보’로 정의하고자 한다.

    제2의 사명, 완정과 평정

    북한은 이번 전원회의 결정문에서 한반도에서 평화통일 가능성을 비현실적으로 보고 있다. 36년만에 개최된 2016년 조선노동당 제7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당시 김정은 제1비서는 남북 합의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에 평화적 방식과 비평화적 방식이 있음을 지적하고 평화적 방식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을 막고, 민족이 전쟁의 참화를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남 측의 연합제안과 북 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항에 근거하여 남북합의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러나 김정은 총비서는 2022년 4.25 열병식 연설과 그해 말 개최된 전원회의에서 북한의 핵무력이 억제 실패 시 ‘제2의 사명’을 결행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분명 방어가 아닌 다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서 작년 9월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은 무장력의 사명을 나열한 제59조에서 제2의 사명이 ‘영토 완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번 결정문에서도 유사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2016년 당대회에서 언급한 통일의 두 개 방식 중에서 평화통일 성사 가능성을 부정한 셈이다. 이제 비평화적인 방식만 남은 것인가?.

    전조는 있었다.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책임비서는 남북관계가 ‘판문점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아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통일이라는 꿈은 더 아득히 멀어졌다.’는 내용이 담긴 사업총화보고를 한 바 있다. 이때까지 북한이 진단한 남북관계는 ‘심각한 교착상태’인데 대화의 중단이 아닌 진행에 방점이 찍힌 정세 분석으로, 북한의 대응 전략은 대화와 대결의 동시 병행으로 해석되었다.

    이후 3년 동안 북한은 대화에서 대결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는데 그 이유로는 첫째, 한미연합군사훈련, 미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군비 증강의 중단과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의 재개와 같은 북한의 제반 요구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실행 의지가 없다는 판단(2021년 3월 김여정, ‘남조선집권자’ 미국산 앵무새)와, 둘째, 새로 출범한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시즌2를 결국 부정적(2021년 6월 김여정, 꿈보다 해몽)으로 받아들인 것에 있다. 여기에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부각시킨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대결구도가 국제관계를 지배하면서 한반도에서 대화의 가능성은 더욱 줄었다. 곧 이어 3월 10일 대결주의자 윤석열의 한국 대통령 당선은 북한이 대화에 대한 기대를 버리거나 회피할 명분을 준 마지막 피날레였다. 그 직후인 3월 16일(비공개)와 24일 북한이 발사한 ICBM은 대화 종언의 사전경보였다.

    주어진 현실에 버티기

    북한이 지금까지 근본적인 노선 전환을 미루어 왔던 것은 코로나19 위기(공중보건비상사태) 극복에 주력해왔던 체제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지난 KDI 북한경제리뷰 10월호에는 북한이 코로나19 방역조치의 일환으로 단행한 국경봉쇄로 인해 북한의 공간(公刊)문헌 입수가 힘들어져 연구에 제약을 받았던 젊은 연구자의 사연이 실려 있다. 그만큼 코로나19 기간 북한은 다방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고, 2022년의 저조한 식량 작황으로 인해 작년에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번 전원회의 보고에서 북한이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경제부문의 실적을 목표 대비 성과 달성률이나 2020년 대비 증가율로 약간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자력갱생의 바로미터인 식량생산을 목표 대비 103% 초과 달성했다는 전원회의 보고에 통일연구원은 농촌진흥청의 추정치(전년대비 6%)에 부분적으로 부합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2022년 말 전원회의에서는 이 같은 상세한 보고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작년 북한 경제는 재작년보다 양호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북한이 자력으로 체제의 내구성을 보여주며 북한 붕괴론을 일소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남한의 대북지원이나 남북경제협력 없이도 경제난과 식량난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는 [프레시안 칼럼]과 ‘(자립경제 구축)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한겨레 칼럼1]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적응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 첫째, 작년 북한 경제의 성장은 코로나19 위기의 기저효과일 수 있다. 북한이 이른바 ‘인민경제발전 12개 고지’의 구체적인 목표와 실적을 공개하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 목표달성률만을 가지고 북한의 자력갱생 원칙이 경제에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해석은 주관적이다. 둘째, 식량생산 못지 않게 중요한 식량공급의 지속성과 안정성 여부를 배제하고 있다. 임수호(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북한이 주민에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식량 공급을 하기 위해서는 92만톤의 양곡 수입과, 그 비용으로 4억 8천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핵개발에 전력 투구하고 있는 실정에서 북한이 식량 도입에 매년 그 정도 금액을 전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북한은 부족분을 무상으로 채워줄 외부의 우호 세력을 항상 필요로 한다.

    *지난해 12월 농촌진흥청이 추정한 북한의 2023년도 식량작물 생산량이다. 총생산량이 482만톤으로 그중 쌀은 211만톤이고, 옥수수가 170만톤이다. 쌀이 특정계층에게만 주식량이 되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셋째, 북한이 제재를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한다는 [한겨레 칼럼2]의 주장은 명백히 오판이다. 2020년 7월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의 담화에 나오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재의 사슬을 끊고 하루라도 빨리 우리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도모해보자’는 구절만 보더라도 자력갱생은 북한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방어 전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흡수통일, 대화 거부의 명분

    북한이 전원회의에서 ‘고려연방제가 파탄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폐기할 것이라고 했다’는 [통일연구원]’ 분석은 북한의 호전성을 강조하기 위한 확대 해석이다. 북한이 보도한 전원회의 결론문에는 그 같은 해석을 뒷받침할만한 내용은 들어가 있지 않다. 북한은 오히려 1민족 1국가 2제도에 기반한 연방제 통일 방안이 가장 합리적인 통일방안임을 늘 선전해 왔다.

    북한의 결론은 연방제 통일 방안의 부정에 있다기보다는, 대화 거부의 명분으로 ‘흡수통일’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북한이 한국 용어인 흡수통일을 사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는 ‘연방제 통일’과 ‘흡수통일’의 대결구도를 의미한다. 흡수통일의 북한식 표현은 ‘제도통일’이다. 북한은 제도통일을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부정하고 일방의 사상과 제도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는 것(2016년 당대회)’으로 정의하고,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반통일 대결정책으로 간주한다. 북한 입장에서 흡수통일은 제도통일, 체제변화, 정권붕괴로 이어진다. 따라서 북한은 윤석열 정부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고집하는 것을 ‘전쟁의 길(2016년 당대회)’을 택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북한이 결론문에서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을 윤석열 정부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게도 묻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북한은 민주당 정권의 남북화해협력정책 역시 정권붕괴, 흡수통일,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통일 기조로 치부하고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민주당의 정책은 이제 국민의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을 뜻하는 ‘딜레마’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이 양비론의 관점에서 한국 양대 정당의 대북정책을 모두 비판하는 것은 한국과는 대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대화 상대는 오직 미국일뿐 한국은 아닌 것이다.

    두 개의 국가, 다름의 미학

    북한은 현재 사실상의 애국가 역할을 하던 ‘김일성장군의 노래’ 대신 박세영이 작사한 본래 애국가를 공식 국가로 예우하고 있다. 이처럼 김정은 시대에서 북한이 국가를 강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의 재발견은 핵과 함께 시작됐다. 2017년 11월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과 동시에 ‘우리 국가제일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우리 국가제일주의’는 기존의 ‘우리 민족제일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개념이다. ‘우리 민족제일주의’에는 남과 북을 별개로 보는 토대가 만들어져 있다. 민족이라는 말에는 남북한을 한 겨레로 보는 동질성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수령, 당, 주체사상’을 가진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제도’에 사는 ‘김일성 민족’이라는 한국과는 다른 민족, 또는 한국을 민족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 담겨져 있다. ‘김일성 민족’은 ‘우리 국가제일주의’에서 ‘사상적 일색화’한 나라와 ‘계승성이 확고한‘ 나라로 이어진다. 북한은 ‘우리 국가제일주의’ 아래 국호, 국기, 국가, 국장, 국화, 국견, 국조 등의 국가 상징물을 공식 제정하고 이에 대한 사상 교양을 강화해 왔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두 개의 한국’론의 근거가 된다. 북한이 제8차 당대회 이후 당규약을 개정하면서 당의 목표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과업’과 당원의 의무에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삭제한 것을 두고도 ‘우리 국가제일주의’와 더불어 북한이 두 개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가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2022년 8월에는 담대한 구상을 겨냥하여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라는 김여정의 담화가 있었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동질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북한의 국가 재발견은 ‘영토 평정’이라는 비평화적 통일 또는 ‘두 개의 한국’과 연관지어진다.

    북한은 한국에 대해 줄곧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져왔고, ‘두 개의 한국’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같은 의식은 ‘전략국가’라는 용어에 드러난다. ‘전략국가’ 또는 ‘전략적 지위’는 “세계가 공인하는 강대한 국력을 갖추고 세계정치구도 변화와 국제정세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는 나라”를 말한다. 북한은 핵무기가 고도화될수록 국가의 위상과 격이 상승한다는 논리체계를 구축했다. 홍민(통일연구원)에 따르면 ‘핵보유국’은 핵능력은 있지만 미국에 대한 실제적 핵위협 능력은 여전히 불투명한 국가라면, ‘전략국가’는 ICBM을 통해 미국에게 실제적 핵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전략국가’는 북한이 미국과 대등해졌다는 과시의 표현이자, 미국에게 북한에 대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한국에게는 북한이 미국에 맞설 정도로 강해졌고, 한국보다 우월해진만큼 국가의 위상에 차이가 나니, 핵무기로 위협당하지 않으려면 적대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통일뉴스를 비롯한 자주파 언론들은 북한이 전원회의에서 통일을 포기하고, 영구 분단으로 흐를 우려가 있는 ‘두 개의 국가’를 수용했다는 견해를 무리한 해석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무리한 해석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무리한 주장이다. 지금까지의 조치로 보건대 북한은 ‘두 개의 한국’이라는 새로운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김정은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한다는 우리 헌법 제3조를 비판한 것은 근대국민국가 형성의 가장 중요한 제도 가운데 하나인 국경을 명확히 하여 한국 국민을 이방인으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북한이 남북한을 국가 관계로 가져가려고 하려는 이유를 헤아려 볼 때 체제붕괴에 대한 거부감 이외에도 ① 향후 협상에서 남북기본합의서상의 특수관계와 6.15공동선언의 민족 당사자 해결 원칙이 무력화될 경우 한국이 참여를 주장하는 근거를 불명확하게 만들 수 있고, ② 북한의 핵보유·핵고도화가 특수관계에서 합의했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등 남북한 상호 군축에 발목이 잡힐 여지를 없앨 수 있으며, ③ 북미협상의 방향을 비핵화가 아니라 ‘핵보유국가와 핵보유국’ 사이의 군비통제로 가져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라진 신냉전과 다극화

    북한이 핵능력 고도화로 국가의 전략적 지위는 상승했으나, ‘전략국가’의 다른 한 축인 국제질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의미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 위해서는 미중관계의 비정상화는 최상이다. 그동안 북한은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형성된 대치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그런데 이번 전원회의 결론문에서 신냉전과 다극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정철(서울대)은 미중정상회담 이후의 일시적인 유화 분위기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주창하는 가치외교의 허점을 파고들거나(일본 지진 위로 친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에 대한 제스처로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미중 관계의 정상화가 최선이다. 북한에게는 신냉전이 유리하고, 한국에게는 탈냉전이 유리한 서로 상반된 국제질서의 이해관계가 있다. 따라서 한국에게는 대중외교, 대러외교의 전향적 검토가 필요하다. 현행처럼 북한과의 대결구도를 지속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는데 같이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북한에게 말려드는 것이다. 정부가 북한이 회피하는 대화와 평화를 가지고 역으로 공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번역이 늦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로 ‘주제의 중심이 한국의 분단이고 그 분단이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데 두었다. 우리는 그 분단이 통일을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북한은 통일이 아니라 이대로 한국과 거리를 두며 살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북한이 말하는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의 ‘적대성’은 한국과 북한을 명확히 구별하는 정치적인 개념이다.

    반자유주의 법학자로 정치라는 개념의 정립을 동지와 적의 구별에서 시작한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적은 ‘나쁘다’는 윤리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나와 다른, 이질적인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적대성’은 한국인과 조선인의 결속을 반대하기 위한 구별이다. 남북 사이의 전쟁은 민족해방(내전)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으로 변한다. 87년 체제가 만든 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공동선언 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림으로써 이제 87년 체제는 남북관계에서 먼저 수명을 다하게 됐다. 북한은 우리에게 통일 이외의 다른 방식의 공존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북관계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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