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년생 김동훈의 파란만장 해방일지
    [책소개]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김동훈, 김형민(지은이) / ㅁ(미음))
        2024년 01월 06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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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1939년 토끼띠 김동훈은 대한민국 80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특히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고,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이 책은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에게는 자서전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올 뿐 아니라, 후속 세대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다듬고 정리한 아버지의 자서전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아버지가 쓴 살아온 이야기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50대 아들 김형민이 본 80대 아버지의 가장 큰 ‘달란트’는 예전 이야기를 파노라마처럼 유장하게 읊을 수 있는 기억력이다. 수십 년 전 만난 사람의 이름과 스친 사연을 생생하게 되살려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아버지가 팔순 잔치 즈음 말씀하셨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가 보이는 개인 기록물의 탄생

    아버지는 이후 워드프로세서를 새로 익히고 독수리 타법으로 천천히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 기간이 2년이 넘는다. 이 기록물을 무심히 흘려보냈다면 아버지의 기억은 방대한 세월의 창고 속에서 부스러져 먼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아들은 아버지 원고를 다듬고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글들을 정리해 다듬던 아들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단순히 개인의 회고록이라 생각했던 글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의 역사가 보인다. 이 책 본문 곳곳에는 종종 ‘주’가 등장하는데, 이는 아버지 개인의 삶에서 역사적 맥락의 갈피를 잡아보는 재미에 빠진 아들이 아버지의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한 ‘오지랖’의 결과물이다.

    여느 역사소설보다 재미난 우리 조부모 세대의 한국 근현대사

    이 책의 주인공 김동훈은 1939년 토끼띠로 대한민국 80대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한강의 기적’ 등 해방 전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겪는다. 한반도 최북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만주와 북한을 오가며 살았던 그는 만 열한 살 때 6.25 전란을 겪으며 가까스로 남으로 내려와 이후 부산, 제주, 거제, 밀양, 대구, 포항, 서울 등 수많은 도시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다.

    특히 그가 경험한 극적인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한다. 부산과 제주, 거제에서의 피난살이는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특히 배고픈 아이들이 찬송가 가사를 개사해 “내 평생의 찰떡”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울컥하는 감정을 함께 느끼게 한다. 피난 생활 중에도 학업을 이어 거제 장승포국민학교에서 마침내 졸업식을 치르는 모습에서는 교육열 가득한 대다수 한국인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부산과 밀양, 대구를 넘나들며 보낸 학창 시절 이야기에서는 악동의 성장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풍 사라호를 직접 경험한 이야기,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수산대학을 나와 시작한 공무원 생활, 고려원양을 거쳐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을 지내는 등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거인의 어깨 위에서 놀던’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여느 역사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함을 선사한다.

    우파 아버지 세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자서전 글쓰기의 힘

    이 책의 주인공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돌이켜보니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는 것을,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에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비록 거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어깨 위에서 신나게 일하면서 그런 거인과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을, 자신은 고향 없는 ‘삼팔따라지’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곳이 자신의 ‘고향들’이었으며, ‘복 많은 놈’이라는 것을.

    80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정리한 50대 아들과 그 가족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아래 세대는 위 세대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성장한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 세대의 꽉 막힌 반공 이데올로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들은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듬으며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전쟁을 거쳐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투의 세대’를 만난다. 아들은 아버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그 세대가 왜 그러셨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넉넉히 짐작하게 되면서 사고의 확대를 경험한다.

    말로는 세밀하게 담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가 글로 정리되는 순간, 글쓴이의 성찰에 더해 그간 우파 아버지 세대와 거리두기해온 아들 세대가 서로 교감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자서전 글쓰기의 힘이라 하겠다.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을 위한 자서전 쓰기의 모범

    “나와는 한 세대 차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글을 본 가족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응집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며 급변해온 이 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아버지 세대는 그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짱돌이 되고 징검돌이 되고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되면서 오늘을 일구어왔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것이 비단 이 책의 주인공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조부모 세대라면 누구나 한 편의 대하소설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은 부디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이분들이 스스로의 일생을 정리해보거나, 또는 후대가 나서서 선대의 지난날을 각자의 작은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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