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권주의' 부상의 배경과 의미
    '혼돈의 시대'에 대한 병적인 징후?
    [국방칼럼]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또 다른 이름
        2024년 01월 04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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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 파문을 계기로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짧은 우화를 떠올려보았다. 그 우화의 핵심 소재인 땅을 ‘독도’로, 그 땅의 주인이고자 했던 최초의 인간을 ‘한국인’ 등으로 바꿔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어떤 섬에 울타리를 두르고, ② “이 섬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③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④ 최초의 한국인이 대한민국 정부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루소는 이 과정을 통해 불평등의 기원이 되는 사유재산제도에 기반한 문명사회가 출현했고, 그것이 결국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루소가 결단코 바라지 않았던 경계를 나누는 역할을 하는 어떤 땅을 둘러싼 울타리, 곧 국가의 국경은 명확하게 물질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성을 통해 나의 영역과 너의 영역을 구분(마르코 데라모)하고자 하는 가상의 경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특정한 임의의 선을 그은 후 그것을 국경이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국경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국경 근본적으로 영구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다. 국가가 등장한 때부터 안고 있는 국경의 가변성으로 인해 주권에 대한 위협에 국가가 경각심을 가지는 순간 국경은 힘과 힘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접점이자, 관계와 관계의 연결을 가로막는 벽으로, 우리가 아니라 너희를 배척하는 칸막이로서의 사명이 부여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같은 대응 방식이 영토주권을 수호하는 숭고한 의식이라고 생각해왔다.

    21세기에 들어와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국경과 주권에 대한 인식이 더욱 더 강해지고 있다. 영토의 사수라든지 국경 통제력 회복과 같은 국가주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사조는 바로 지금의 세계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이자,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세계화에 적대적인 진영을 대변하는 정치 슬로건이다.

    위 이미지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에 등장하는 소버린 행성의 대사제 아이샤이다. ‘위’를 뜻하는 라틴어 수페르에서 유래된 소버린은 우수한, 아주 오래된, 최고라는 뜻을 가지며 국가와 금을 상징한다. 주권은 원래 수평적이지 않고 수직적인 개념이었다.

    대표적으로 미국 보수의 주권 강조는 이미 트럼프 정권에서 강하게 나타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로켓맨으로 지칭하고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고 공언한 2017년 9월 제72차 유엔총회 연설의 핵심 키워드는 ‘주권’이다. 그는 41분 동안의 연설에서 주권을 무려 21회나 언급한 바 있다. 주권을 ‘독립된 힘’으로 정의한 트럼프는 국가는 독립적이고, 강한 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정부의 주권에 대한 기본 원칙은 주권을 가진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외교 분야에서 미 행정부의 국민에 대한 의무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 first), 다시 말해서 미국과 미국의 국익과 미국의 미래를 보호하는 것이다.

    1년 후의 제73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그는 외부 위협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자신이 ‘주권주의자’임을 선언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사람이 직접 선출하지 않은 세계무역기구, 유엔인권이사회, 국제형사재판소 등의 국제기구가 미국인의 통치행위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미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애국주의(patriotism) 원칙을 수용해서 세계화(Globalism), 글로벌 거버넌스 이데올로기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트럼프의 생각은 현재 유럽에서 유행하는 정치 이념인 ‘주권주의(souverainisme)’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주권주의는 주권을 국가의 핵심 가치로 여기고, 국가행위의 자율성을 추구하며, 대외주권의 보호를 주창한다. 이 개념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민족해방론과는 분명히 결이 다른 민족주의 성향의 이데올로기이다. 주권주의는 우리가 주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국가들에서 형성되어 왔으며, 세계화와 국제 의제에 입각한 정책에 반대하고, 이에 저항하는 정치 이념이다. 다시 말해서 주권주의는 이 시대의 지배이념인 국제주의, 일극체제, 연방주의, 그리고 이들 사상에 기반해 설립된 다양한 국제기구의 본질적인 특징인 초국가주의와초국가성(supranationalité)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이다.

    주권주의의 발생지는 캐나다 퀘벡이다. 1960년 퀘벡주 선거에서 퀘벡자유당이 승리함으로써 1944년부터 시작된 국민연합의 1당 통치가 종식되었다. 거대한 암흑인 ‘그랑 누아르’가 끝난 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 시작되었다.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민족주의가 정교일치, 가톨릭 보수주의, 반공·반노조이념을 대체했다. 퀘벡자유당의 ‘우리 집의 주인(Maîtres chez nous)’ 노선 아래 복지체계 도입, 전력회사 국유화, 교육부 설립 등 다방면에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1966년 국민연합이 다시 집권했으나, 1967년 7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퀘벡 방문은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퀘벡자유당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캐나다 구성원의 다수인 영어 사용자가 장악한 연방 안에서 소수자인 퀘벡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캐나다연방 밖에서 독자적인 국가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선을 당이 거부하자 1967년 11월 퀘벡자유당을 탈당한 후 주권연합운동을 결성했고, 이듬해 10월에는 중도파, 일부 좌파와 함께 퀘벡당을 창당하여 주권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퀘벡당은 ① 북미 대륙에서 앵글로색슨의 지배력에 포위된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역사·언어·문화 정체성을 지키고, 동화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캐나다연방을 거부하고, 주권퀘벡(퀘벡의 완전한 자유)을 수립하되, ② 캐나다연방 안에서의 자치를 지지하는 측과 독립을 지지하는 강경파 모두를 포괄하는 전략으로 독립이나 자치보다는 개념의 확장성이 있는 주권을 정치 구호로 채택했으며, ③ ‘카나디엔 앙글레즈(영국-캐나다)’국가를 부정하지 않는 대신, ‘카나디엔 프랑세즈(프랑스-캐나다)’국가와 동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전제로 연방을 대신하여 과거의 유럽경제공동체(EEC), 스칸디나비아 통화동맹, 베네룩스 관세동맹을 본뜬 경제연합을 구상하였다.

    위 그림은 1837년 퀘벡의 전신인 로어 캐나다(Bas-Canada)에서 영국에 맞선 ‘애국자 전쟁’의 퀘벡 전사를 묘사한 삽화이다. 이 그림은 1837년 시점의 전사 모습에 나이든 노인을 투영함으로써,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도 그 정신이 살아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1970년대 초까지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퀘벡해방전선의 상징이었다.

    유럽연합(EU)가 공식 출범했던 1990년대에 퀘벡의 주권주의는 유럽에 상륙했다. 1992년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51% 찬성으로 유럽 연합에 관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비준됐다. 비준 투표의 찬반 논쟁 과정에서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흐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후 퀘벡의 주권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우익 반대파들이 등장하며, 주권주의는 1999년 유럽의회 선거 국면에서 프랑스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2005년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55%의 반대로 유럽헌법 제정 조약의 비준이 부결되는 파란이 일어났다. 이후 프랑스 정치에서 주권주의는 공화주의 정당과 사회당이 주도하는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에서 주권주의가 부상한 배경에는 드골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다. 1935년 4월 징병제를 재도입한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체제를 체결했으나, 바로 두 달 후에 영국은 독일과 해군 협정을 체결하며 독일의 군비 증강을 용인했다. 프랑스는 영국의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친영 정책에 집착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1945년 얄타회담에는 초대조차 받지 못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 같은 프랑스 근대사는 드골에게 반면교사가 됐다. 드골주의의 핵심은 핵 억제력을 기반으로 한 주권의 독립성이다. 드골은 특정 국가를 추종하기보다는 거리를 두었으며, 전략적 자율성에 입각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했고, 단일통화의 유럽이 아니라, 프랑스의 핵 억제력이 중심이 된 외교·국방분야에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유럽을 구상했다.

    유럽에 주권주의가 확산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 있다. 1992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마지막 보루로 일컬어지던 미테랑 정권의 프랑스가 비준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식 선언이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무역, 금융, 서비스, 이주 등 여러 분야에서 전세계를 연결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 과정에서 주권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자본 이동을 방해하고, 시장과 기업, 그리고 소비자를 통제함으로써 자유를 침해하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만약 신자유주의가 급격한 변화 속에 늘어난 혜택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부작용의 파급과 피해 확산의 문제들을 최소화하는 기조 아래 그 영역을 확장했더라면 세계화와 주권의 상호 인정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화의 확산으로 관세와 무역장벽이 무너지며 글로벌 무한경쟁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고용조건이 악화되었으며, 규제 완화의 효과인 금융 부문의 이익은 부유층과 투기적인 거래자들에게 집중돼 자산 불평등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확산의 최종 결과물은 중국의 부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ECB), 아이엠에프가 부채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임시의사결정기관인 이른바 트로이카의 등장과 경기 침체, 글로벌 테러리즘, 지정학적인 불안, 미중 경쟁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이 높아져갔다. 샹탈 무페는 칼 폴라니의 분석을 인용하여 사회가 혼란을 겪을 때 대중의 주된 관심은 보호 받는 것에 있으며,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 같은 정치세력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엘리트의 세계화 정책으로 인한 국가주권의 포기로 위기가 닥쳤고, ‘우리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제기구의 주권 침탈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우파(간혹 좌파) 포퓰리즘의 애국주의에 기댄 호소에 대중은 2015년 7월 그리스 국민투표의 3차 구제금융과 연계된 긴축안 거부, 2016년 6월 영국 국민투표의 브렉시트 통과, 같은 해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선거 당선으로 호응했다.

    지리학의 관점에서 주권은 단순한 행동의 자율성을 넘어 영토라는 특정하게 주어진 공간에서 특정한 인구, 특정한 공동체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주권주의는 그 주어진 공간의 경계인 국경에 대한 국가의 통제권을 회복하여 국가의 통치가 미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주권 영역과 비주권 영역의 분리는 장벽 건설, 난민 거부와 이민법 강화, 코로나19 위기에서 단행된 국경 폐쇄, 여행 금지 등으로 나타난다. 그 밑바탕에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의 백인대체론(Grand Remplacement)과 미국의 백인말살론(White Genocide)에 기반한 극우 민족주의인 정체성주의(Identitaires)가 함께 한다. 주권주의는 이와 같이 지리적 구분의 영토주권에 국한되지 않고, 주권공간 내에서 상이한 정치적 정체성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두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진정한 국민’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극우 포퓰리즘이 주권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윤석열 정부의 정신전력교재에 나오는 “헌법에 반해 북한 이념과 체제 등을 추종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 근간을 흔들려는 세력의 위협이 있다.”는 문장이 의도하는 바도 같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주권주의는 국가가 막상 ‘우리’를 수호해야 할 상황에 접어들자 확산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공중보건정책에 자유를 달라며 저항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 주권주의는 ‘대유행’ 시기에 국민주권의 회복에서 개인주권의 보장으로 담론을 전환하며 초국가성이 국가의 주권을 위협한다는 개념을 그대로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에 적용하려고 했다. 이 같은 새로운 상황의 전개는 ① 주권주의 개념이 본래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수단에 불과하거나, ② 주권주의가 내세우는 국민주권이 애초에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가치에 기반하고 있으며, ③ 국가와 국민의 정치적 관계가 주권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책임과 권리와 중산층의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주권을 집단과 공동선을 보호하는 국민주권과 사회연대에 우선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또는 포퓰리즘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드골이 1958년 9월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면서 프랑스의 새 헌법 초안을 제시하고 있다. 드골은 현대 프랑스의 창시자이다. 드골주의는 러시아의 대외정책개념인 주권국제주의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정치인이 드골을 비판하려면 정치생명을 걸어야 한다. (Le Point)

    러시아도 주권주의를 표방한다.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수용한 정치이념인 자유주의의 혼란을 목도하면서 국가 안정의 가장 큰 저해 요인은 과도한 자유이고 대중에게 주어진 다양성은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주권민주주의를 ‘혼돈과 질서의 적절한 타협’으로 묘사했다. 주권민주주의의 개념은 ① 자유주의와 서구주의를 배격한 국가주의로, ② 정당의 경쟁을 소모적으로 인식해서 국가의 각종 규범을 준수하는 ‘충성스러운 반대파’를 육성하고, 러시아 주권을 침해하는 외국정부의 대리인들인 과거 ‘시장 볼셰비키’의 과두정치, 현재의 나발니, 그리고 체제의 관리를 거부하는 정당을 정치영역에서 배제하는 정치적 일체성(wholeness)과 중앙집중화된 권력이자, ③ 러시아가 이미 수용한 민주주의에 대한 공식 약속을 훼손하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형식적인 민주주의 제공이 주는 환상으로 대신하는 ‘정치의 의인화(personification)’이다.

    이 같은 모습은 미국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보수는 헤리티지재단을 중심으로 차기 보수정권의 정책 의제와 처방을 담은 ‘리더십 지침: 보수의 약속(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 이하 지침서)’을 출간한 바 있다. 이 지침서가 주장하는 차기 보수정권의 핵심 명제 중 하나는 내부와 외부 양 측에서 위협 받고 있는 미국 주권의 방어이다. 내부 위협의 진원지는 좌파와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국가의 관료조직이다. 보수정권이 좌파와 엘리트가 침해한 국민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행정국가를 해체하고, 연방정부를 개혁해야만 한다. 지침서는 대통령과 신념을 같이 하는 인물로 주요 직위를 채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드골이 주도한 프랑스 제5공화국이 1830년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과 오를레앙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프랑스 대통령직에 대해 ‘공화국 군주제(monarchie républicaine)’라는 비판적인 용어를 만들었는데, 드골 스스로가 이상적인 권력체제는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의 종합(synthèse)’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수르코프 또한 공화정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가 된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주권민주주의의 모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견해는 주권주의가 민주주의제도를 형해화하면서도 대중의 동의는 어떻게든 얻으려고 하는 권위주의 포퓰리즘임을 드러낸다.

    르 몽드는 2016년에 트럼프의 승리가 베를린장벽 붕괴와 9.11테러에 맞먹는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예외주의와 국가와 진정한 국민과 주권의 결합이라는 시대 상황이 여전히 낯설고 당혹스러운 이유는 근본적인 전환이 안개 자욱한 무진을 뜻하기 때문이다. 경제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통치 공백기(Interregnum)’를 이 같은 혼돈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하였다. 이 개념은 낡은 질서는 무너지고 있으나, 새로운 질서가 대신하지 못함에 따라 두려움이 점철되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국면에서는 미래를 가늠할 수 없기에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주권의 위협을 거론하고, 제2 핵보유국인 러시아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침공을 하는 것과 같은 매우 기괴하고, 위험하고,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새로운 질서가 구현될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람시가 말한 병적인 증상이다.

    주권주의는 혼돈의 시대에 방향감각을 상실했으나, 나침반은 주어지지 않았고, 낭떠러지로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대중의 마음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장뤼크 멜랑숑과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좌파적 관점에서 주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볼프강 슈트렉에 따르면 안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질서를 구성할 수 없을 때 인간은 환상과 상상에 더 많이 의존한다. 어떻게 보면 주권주의는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대중에게 즉흥적으로 보여주며 마음에 위안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인 셈이다. 이 슬로건에 대한 팬덤의 열정을 진보의 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국방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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