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체제의 끝의 시작?
    쇼이블레와 들로르의 죽음
    [기고]유럽의 과거를 대표하는 이들
        2023년 12월 29일 04: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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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가 저물어가는 지난 26일과 27일 독일 기독민주당 출신의 전 재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와 프랑스 사회당 출신의 자크 들로르 전 유럽공동체(현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사망했다.

    두 인물은 유럽의 형성과 정치경제적 행보들에 중대한 영향을 행사하여 현재의 유럽체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때보다 유럽의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사망은 유럽 체제의 변화 혹은 끝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좌파와 진보로부터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죽음은 유럽을 한때 이끌고 유럽연합을 설계한 세대의 종식을 의미하기에 짧은 글로 그 의미를 살펴본다.

    자크 들로르 : 유럽 통합의 주인공

    그의 정치적 성향에 걸맞게 들로르는 1925년에 7월 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의 옛터였던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서 가난한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들로르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프랑스 중앙은행에서 안내원으로 일했고, 부모의 이러한 성격들은 그의 정치 행보와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청년기에는 가톨릭 노동운동에 관여하면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여기저기 피난을 다니는 고초를 겪었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프랑스 중앙은행에 취직하며 금융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50년대에 프랑스 중앙은행에서의 승진 기회를 거절하며 가톨릭 노동조합에서 경제학 강사로 활동했다.

    정계로의 진출: 드골부터 미테랑까지

    드골 정부에서 자문으로 잠깐 몸을 담은 시간을 그의 정계 인생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정치 여정은 사회당 대통령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1년 대선에서 승리한 시기부터라도 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당에서 소수파였던 기독교 흐름에 속했지만 미테랑은 그를 핵심 요직인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사회당의 공약들이 필요로 했던 정부 지출의 확대, 프랑 화폐 가치 유지와 인플레이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프랑의 연속 평가 절하와 실업 증가로 비판을 한몸에 받으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유럽연합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미테랑의 재무장관으로서 활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들로르는 내각 내부의 갈등과 미테랑이 그가 총리로서는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 총리 자리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대신 그는 유럽공동체*(이하 EC)의 집행위원장으로 지목되었고, 1985년 브뤼셀에 위치한 EC 집행위원회 본부로 향했다. 취임하자 그는 유럽단일시장(European Single Market, 국경의 구분 없이 상품,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된 유럽의 시장 제도) 추진 계획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유럽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단일시장 제도로 만족하지 못한 들로르는 유럽공동체의 세금, 사회, 경제 법안들의 대다수를 집행위원회가 입법화하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런 대담한 유럽통합 계획은 영국의 마가렛 대처 등 반-유로주의자들로부터 야유와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임기 끝까지 들로르는 영국의 유럽 회의주의자들(Eurosceptics)에게 비토(veto)의 상징이었다. 대처 등 유럽 회의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는 1988년 당시 영국 보수당 정부로부터 표적이 되어 공격을 받던 노동조합들에게 유럽공동체 집행부가 친노동, 고용안정 등의 정책들을 집행부가 회원국 정부들에 요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자 대처주의(Thatcherism)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영국 좌파와 노동조합들의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의 유럽통합 계획은 결국 통화통합(유럽중앙은행과 유로화)과 정치연합(초국적 행정)으로 이어졌으며,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으로 다시 한번 유럽공동체의 확장이 예고되자 들로르 집행부는 1992년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연합에 관한 조약)에 12개 회원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들이 서명하면서 유럽 연방제의 꿈은 가까워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들로르는 임기를 마무리했다.

    *유럽의 석탄, 철강 산업들의 관리 목적으로 탄생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1957년 로마 조약의 체결로 통해 경제 통합의 목적인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창설되며(1967년에 유럽공동체, EC로 이름 변경)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경제통합을 완성하면서 현재 유럽연합(EU)가 만들어졌다.

    무너져가는 들로르의 업적

    하지만 들로르의 업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져갔다. 퇴임 직후 발칸 반도에서 심각한 민족 분쟁이 발발했지만 신생 유럽연합은 이를 막거나 조정하는 데 무능했고, 21세기에는 2008년 유로존 위기(Eurozone Crisis)로 인해 유로화의 위험을 증가시키며 유로 회의주의는 더욱 거세지고 확산되었다. 결국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로 이어지면서 유럽연합의 미래가 더욱 불확실해졌다.

    볼프강 쇼이블레 : “제가 좀 고집이 있어요

    81세로 사망한 볼프강 쇼이블레는 많은 업적과 직책들로 기억될 것이다. 기독민주당 대표, 원내 대표, 내무부 장관, 재정부 장관, 연방의회 의장, 독일 연방의회의 아버지 등 그의 삶과 철학을 한두 마디의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친절한” “상냥한” 등의 표현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수식어들이다.

    2015년 인터뷰에서 자신을 “고집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쇼이블레는 1942년 프라이부르크시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법과 경제학을 전공한 쇼이블레는 대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기독민주당에서의 그의 오랜 여정을 알리는, 기독민주당 청년 부문인 독일청년연합(JungeUnion Deutschlands)에 가입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기독민주당 학생협회들에서 회장을 역임했으며, 변호사로 활동하기 4년 전인 1972년부터 그는 오펜부르크 지역구의 연방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사망하기 직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쇼이블레는 1980년대에는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의 핵심 고문이었으며 1989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동독이 붕괴하면서 서독-동독, 양 국가 간의 통일이 불가피해 보이자, 그는 통일 협상에서 서독의 대표로 참석했고 1990년에 양국이 통일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독일 통일 과정의 마무리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다음 해인 1991년 그는 기독민주당의 원내대표로 승진하면서 다음 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98년 선거에서 기독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총리직에 대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09년에 앙겔라 메르켈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서의 임기를 21세기 이후 유럽 경제가 가장 위태로웠던 유로존 사태 한가운데에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그리스 등의 국가 채무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자, 초기에 쇼이블레는 이들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을 반대했으며, 지원하더라도 정부 지출 대폭 삭감과 가혹한 긴축 재정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스 등에서 많은 국민들이 반대했지만 해당 국가들의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이런 가혹한 조건에 굴복했다. 그 반발로 스페인, 그리스 등에서 반발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강한 지지세를 보였지만, 집권한 그리스 강경좌파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또한 결국 쇼이블레에 투항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경제 불안과 비극은 여전히 현재형인데 그런 의미에서 쇼이블레의 영향도 현재형이다. 이 사태와 함께 쇼이블레는 균형재정 정책의 단호한 옹호자, 설계자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고집

    재무부 장관 역임 후 쇼이블레는 독일 연방의회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연방의회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얻으며 원내 최고령 의원이라는 타이틀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도 기독민주당에서 쇼이블레만큼 권력욕에 대한 야망과 고집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쇼이블레가 2000년대에 당대표 역임하던 시절 후계자로 지명된 현 기독민주당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쇼이블레의 철학은 법, 제도, 규범, 규율의 준수와 유지를 위한 “질서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2011년 그는 인터뷰에서 “어떠한 것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지대)을 분열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유로화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쇼이블레의 고집은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를 희생시키면서 관철되는 경우도 있었고, 대표적인 경우가 그리스 구제금융 사태다.

    2015년 3차 그리스 국제금융 협상에서 당시 그리스 재무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시리자의 이전 정부들(2010년부터 2015년 까지 걸친 PASOK, 신민주당 정권들)의 구제금융 조건들에 대해 반발하자 그는 “선거가 경제 정책을 바꿀 수는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바루파키스는 쇼이블레의 사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역사는 그를(쇼이블레) 가혹하게 평가하겠지만, 사람들이 그의 정책들로 인해 받은 고통보다는 적을 것입니다.”

    유럽 체제의 끝의 시작인가?

    들로르와 쇼이블레의 사망은 우리가 늘 접하게 되는 베테랑 정치인들의 사망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현대 유럽을 만든 철학과 아이디어의 사망이기도 하다.

    들로르가 상상했던 유럽 연방제의 꿈은 좌우파 포퓰리즘의 등장과 위협으로 이미 빛을 바랜 듯하고, 쇼이블레가 맹신한 자유주의적 질서주의는 자신의 고향인 독일에서도 극우파 독일대안당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두 사람이 만들고 다듬어 놓은 유럽 체제는 프랑스의 마리 르펜, 네덜란드의 게르트 빌더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등의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으며, 최근에 집권한 이탈리아의 극우파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계속 유럽 연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상처럼 들로르와 쇼블레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결과에 들로르와 쇼이블레가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확장 배경에 간접적인 책임은 있다. 들로르의 통화 통일(유로화)은 덴마크 국민들이 거절했고 들로르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받았으며, 본인의 집행부가 비-민주적이라는 유로회의주의자들의 비판에 그는 “민주주의에서 ‘반대’만 외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라며 더 많은 비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들로르와 쇼이블레의 공백 속에서 유럽연합 체제가 다시 한번 재검토가 되어서 새로운 기조들과 아이디어들이 그 공백을 채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유럽이 이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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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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