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사도, 방청객도 울어버렸다
    [ 군대 이야기 ] 남문전비행 사건 … 어느 육군 대위의 죽음 ②
        2012년 05월 03일 07: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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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문 입수

    그러나 남문전비행이 적전비행을 잘못 쓴 것임을 알아냈다 하여도 충분하지 않다. 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즉결처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더 이상 자료를 찾지 못한다면 진실을 밝힐 수 없다. 할머니는 어렵게 H대위가 피고인이 기록된 군법회의 판결문을 입수하였다.

    할머니가 입수한 판결문에는 H대위가 1950년 8월 7일, 공격명령에 불응해 후퇴했고, 그로부터 열흘 후인 8월 17일,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이 선고됐으며, 선고 나흘 후인 21일 오후 3시에 총살형이 집행됐다고 적혀 있었다.

    판결문에서 유죄의 증거로 대고 있는 것은 작전장교와 연대장의 증언이었다. 할머니는 수소문하여 그 작전장교를 찾았다. 그는 당시 H대위의 명령불복종은 물론 후퇴도 없었고, 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조사나 재판에서 증언한 사실도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 작전장교는 “재판 자체가 없었으므로 판결문이 조작된 것이 확실하다.”고 말해줬다. 그는 공증진술서까지 작성해 주었다.

    재심청구와 기각, 항고

    할머니는 거주표와 판결문 등 자료를 분석한 결과 판결문이 위조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2000년 육군보통군사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보통군사법원은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 할머니는 고등군사법원에 항고하였다.

    할머니가 제출한 항고이유서는 그 어떤 변호사가 작성한 것보다 뛰어났다. 항고이유서의 형식이나 표현은 낯설고 서툴렀다. 그러나 그 내용은 판사가 도저히 내칠 수 없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명백히 모순이라 지적한 항고 이유는 21가지에 이른다.

    이미 밝힌 남문전비행과 작전장교의 증언 외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당시 H대위의 거주표에는 “1950. 8. 14. 1대대장으로 부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판결문에는 “대대장으로 적전비행을 범한 시점이 8. 7.” 로 적혀 있다. 

    거주표에는 “실종으로 보고되어 있으나 사실은 사망임. 정식 보고는 없음”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그와 다른 내용의 판결문의 존재 자체가 거주표와 모순이 된다. 

    거주표에 “적전비행 즉결처분”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즉결처분이 아니라는 판결문”이 있어 이 역시 판결문의 존재 자체가 거주표와 모순된다. 

    재판을 받았다면 ‘구속’, ‘사형’ 등 인사기록상 반드시 기재하여야 할 사항이 거주표에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재판은 “육군 제1군단 고등군법회의”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판결문의 용지는 군단용지가 아닌 “8사단이라 인쇄된 용지”이다. 

    판결문에 첨부된 판결심사장관의 조치란에는 당시 제1군단장인 김홍일(金弘壹) 소장을 대리하여 부군단장인 김백일이 서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그 서명 바로 위에 김홍일 소장의 본래 한자명인 “金弘壹”과는 달리 “金弘一”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일선 지휘관인 대대장에 대한 사형집행과 같은 중대한 사안에서 군단장이 아닌 부군단장이 대리하여 서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정도가 되면 고등군사법원 판사들도 항고이유를 배척할 방법이 없다. 만일 배척한다면 대법원에서 파기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육사5기 동기회 김재춘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주효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 시가전 모습.

    고등군사법원의 판단

    고등군사법원은 2002년 12월 30일, 할머니의 항고를 받아들여 보통군사법원으로 파기 환송하였다. 고등군사법원은 파기 환송할 때 다른 기록들을 조사하여 판결문이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더 찾았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면 H대위 판결문에 제1군단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으로 기재되어 있는 조00은 당시 제1군단 본부가 아니라 제8사단 소속이었고, 같은 군법회의 심판관으로 기재되어 있는 최00도 당시 제2군사령부 소속으로 1군단 고등군법회의를 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군단장에 보내는 판결심사 건의문 말미에는 당시 제1군단 법무심사관 육군 소령 0민기(0玟己)가 한자로 ‘0玟己’라고 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형 집행기록에는 동일인인 0민기의 인장을 ‘0문기’로 잘못 새겨 날인한 것도 찾아냈다.

    사형 집행관련 서류에는 제1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1호의 2에 의거 1950년 8월 21일 15시에 경주 부근에서 헌병소령 송00, 검찰관 대위 권00, 군의관 소령 최00, 정보관 소위 김00의 입회하에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의 또 다른 판결집행기록에 의하면, 제1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8.9.10.11호에 의하여 H대위를 사형 집행한 똑같은 시각인 1950. 8. 21. 15시 정각에 경북 경주군 내동면 덕동리 부근 산록에서 헌병 대위 서00, 검찰관 대위 권00, 군의관 소령 최00, 정보관 소위 노00 입회하에 H대위와 다른 2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동일한 시각에 동일한 검찰관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사형집행기록이 참여 헌병, 정보관 등에서 서로 차이기 난다는 것은 좀처럼 수긍할 수 없고, 이는 H대위에 대한 판결 및 사형집행 기록 자체가 다른 2명에 대한 사형집행기록에 맞추어 조작되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작전에 관계된 사건의 군사재판을 할 때에는 작전 또는 정보병과 장교 중 피고인보다 상위 계급자가 재판장을 맡는 것이 관례였고 또한 합리적인데, 위 판결에는 피고인과 같은 계급(대위)의 법무관 3명만으로 재판부를 구성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큰 의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민간법원으로 이송, 그리고 판결

    파기환송받은 육군보통군사법원은 재심 피고인 H대위가 이미 사망하여 군인의 신분이 아니므로 관할이 없다고 판단하여, 재심청구인인 누이동생, 즉 할머니의 주소를 관할하는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으로 이송하였다.

    성남지원 형사부는 당시 작전장교의 증언을 직접 듣고 거주표와 판결문, 형집행서류 등 여러 증거를 종합하여 고등군사법원이 인정한 사실과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하였다.

    H대위와 같은 육사 5기생은 400명 중 약 120명의 생존자 모두 H대위가 전쟁 중 전사하였다고 알고 있을 뿐, 적전비행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된 것으로 작성된 판결문과 서류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을 유리한 사실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연대장 김00는 1950년 2월 경 파면되었던 전력이 있고, 만주군 출신으로 지휘관으로서 자질이 떨어지는 편이었으며, 안동작전에서 실패하여 병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김00가 작전 실패 내지 반격 문제로 1950년 8월 7일부터 8월 11일 사이 H대위를 즉결처분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나아가 당시 연대장이었던 김00가 H대위를 즉결처분으로 사살한 후, 비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판결문을 조작하였고, 재판의 전제가 되는 공소 제기마저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서는 실체적 판결인 무죄 판결보다 형식적 판결인 공소기각 판결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H대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재판에 회부된 적도 없으므로 무죄 판결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외형상 유죄 판결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공소제기, 즉 재판에 붙인 것 자체가 없었지만, 재판에 붙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보아 공소기각 판결을 한 것이다.

    2003년 12월 3일 법정에서 선고하던 판사와 육사 5기생 동기회 김재춘 회장 등 모든 방청객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울먹였다. 할머니와 그 가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손해배상청구

    재심 판결로 H대위의 부인과 아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유족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국가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항변하였으나 법원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유공자로 연금을 받는 것과는 별도로 연대장의 살인행위와 판결문 조작, 국가의 감독 및 통지의무 위반, 가족들의 요구에 대한 생사확인 거부 등, 국가의 불법행위가 인정되었다. 결국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하였다.

    즉결처분, 그리고 현재

    즉결처분은 1950, 6. 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열세였던 남한 정부가 통상적인 재판 절차 없이 지휘관 또는 지휘자가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현장에서 처형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이다. 당시 당황한 정부는 일부 군인들이 겁에 질려 후퇴하거나 탈영하는 등 혼란이 확산되자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즉결처분제도를 만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 후인 1950년 7월 26일 0시부터 ‘작전 명령 제12호’로 분대장급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을 주었다. 그러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도입 1년 만에 육본훈령 제191호를 공포, 1951년 7월 10일 0시부로 이를 폐지하였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하여도 변명하거나 변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야만이다. 즉결처분으로 희생당한 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1950년 전쟁 당시 H대위는 28세, 그 아내는 22세였다. 그리고 3세 된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이 있었으나 딸은 20대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은 3년 간 눈보라, 비바람 맞으며 대전 육군본부, 용산 국방부, 전쟁기념관, 육군보통군사법원, 고등군사법원, 성남지원 등…. 오로지 진실을 밝히려는 일념으로 찾아 다녔다.

    할머니는 긴장이 풀리자 건강이 악화되었고, 최근 노환으로 넘어져 쇄골 골절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고 한다. 미망인과 아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H대위를 죽이고, 판결문을 위조한 연대장 김00는 1960년대 사망했다.

    필자소개
    이덕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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