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
    [그림책] 『초강력 아빠 팬티』(타이-마르크 르탄 글. 바루 그림)
        2023년 12월 18일 01: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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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티 바람으로 출근하는 아빠

    세상에! 정말 팬티만 입고 출근하는 아빠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림책 『초강력 아빠 팬티』에 나오는 아빠는 정말 팬티만 입고 출근합니다. 왜냐고요? 아빠의 직업이 바로 프로레슬링 선수거든요. 그림책에서는 주인공 꼬마가 아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볼까요?

    우리 아빠는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었을 때 엄마를 만났어요. 엄마는 아빠의 레슬링 팬티에 슈퍼 챔피언의 약자인 CS를 금실로 수놓아 주었어요. 아침마다 고기와 콩과 칠리고추로 만든 칠리 콘 카르네를 도시락으로 싸주었지요. 아빠는 정말 힘든 하루를 보냈어요. 링 위에서 ‘지옥의 팽이’, ‘노르망디 장롱’ 같은 거인들과 싸워야 했거든요. 거인들은 경기하는 동안에는 적이지만 사실 직장 동료이기도 해요. 아빠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아빠를 안마해 주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제가 태어났어요. 아빠는 제가 아기였을 때 자장가를 불러줬어요. ‘지옥으로 가는 길’이나 ‘난장판의 맹세’ 같은 노래요. 아빠는 어릴 때부터 멋진 팬티를 좋아했고, 팬티만큼 칠리 콘 카르네도 좋아했대요. 칠리 콘 카르네를 너무 많이 먹어서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져서 레슬링 선수가 되었대요. 그리고 마침내 ‘지부티 거인’과 싸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런데 아빠와 ‘지부티 거인’의 대결에서는 과연 누가 이겼을까요?

    우리 아빠는 예비군

    요즘도 온 가족이 모여서 프로레슬링을 볼까요? 저에게는 김일 선수와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의 레슬링 경기를 함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가슴 졸이며 김일 선수를 응원했지요. 엄마는 레슬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도넛을 튀겨 주셨습니다. 갓 튀긴 도넛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요.

    우리 아빠는 군인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기억하는 아빠는 예비군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자 아빠는 대위로 전역했고 곧 예비군 중대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서울시 오류동에서 예비군 중대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빠는 평생 군복을 입고 출근했습니다.

    물론 우리 아빠도 처음부터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제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칠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바로 위 형과 함께 대구로 가서 공장에 취직했고 중학교 때부터 야간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공장을 다니며 고등학교에 갔는데 한국 전쟁이 터졌고 아빠는 군사 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속성으로 군사 교육을 마친 아빠는 바로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부대원들을 자기 손으로 묻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많은 장교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아빠는 예비군 중대장이 되었습니다.

    아빠는 동사무소에 근무했고 동사무소 옆 논에는 겨울마다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혼자 스케이트를 타고 나면 저는 아빠가 일하는 동사무소에 갔습니다. 군복을 입은 아빠가 라면을 끓여 주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아빠는 더 이상 전쟁에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아빠는 오류동에 삽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팬티만 입고 출근하는 아빠 이야기는 정말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빠가 싸웠다는 상대 선수는 키가 12층짜리 건물만 하고 이빨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빠는 상대 선수의 새끼손가락을 잡아 하늘을 향해 여덟 번 붕붕 돌린 다음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물리쳤다고 합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군복만 입고 출근하는 우리 아빠 이야기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빠는 예비군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동사무소로 출근했습니다. 여름에 아빠를 찾아가면 부라보콘을 사주었고, 겨울에 찾아가면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아빠는 군복을 입었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장난으로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저에게 매를 들지 않았습니다.

    진짜 거짓말 같은 이야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 중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등 수많은 나라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도 휴전 중인 분쟁 지역입니다. 전 세계에서 실제로 폭격과 총격전이 이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난민이 되고 있습니다. 진짜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아빠가 팬티를 입고 출근하든, 군복을 입고 출근하든,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세상을 기원합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우리를 긴장시킬 뿐, 실제로는 평화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아빠들이 어떤 싸움에도 휘말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빠 엄마의 슈퍼 파워는 누군가를 해치고 죽이는 능력이 아닙니다. 아빠 엄마의 슈퍼 파워는 가족을 지키고 헌신하는 능력입니다. 프로레슬링 선수의 위대함은 실제로 아무도 해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동료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평화의 선수입니다. 예비군 역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힘은 언제나 전쟁을 막고 모든 생명을 보호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입니다. 『초강력 아빠 팬티』라는 유쾌하고 다정한 그림책을 보면서도, 독자를 슬픔에 잠기게 만드는 이 시대가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그림책 이야기> 칼럼 링크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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