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의 쿠데타 도미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혹과 배경
    [국방칼럼] 주변부도 세계질서 변화에 고민 깊어
        2023년 12월 13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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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먼 옛날 아랍 무역상들이 아프리카 북쪽에서 사막의 바다를 건넜다. 이들은 사하라의 남쪽이자 열대우림의 북쪽이며, 서쪽으로는 세네갈과 동쪽으로는 홍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빌라드 앗 수단(약칭 수단, 흑인의 나라)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유럽에 건너가 니그로랜드의 어원인 라틴어 니그리티아가 되었고, 현재 아프리카 두 나라의 국호에 등장한다.

    사막을 건넌 대상들은 알 사힐(해안)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이로 인해 서부 사하라에서 남쪽 니제르강에 이르는 좁고 건조한 초원은 사헬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동쪽 홍해의 해안지역은 스와힐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리 개념에 입각한 사헬은 서쪽의 세네갈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수단과 에리트레아까지 이르는 사하라 이남의 반건조 지역을 말한다. 바로 이 지역에 속한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났고, 주변 국가로 확산되면서 사헬 지역은 뜨거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쿠데타는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행정부를 장악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고, 인권 유린과 같은 사회를 불안과 비정상으로 몰고가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국민을 해롭게 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민주주의 역시 아프리카의 가난과 부패, 갈등, 독재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선거는 국민들이 지도자를 선출할 수는 있지만, 지도자를 교체하는 수단은 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지난 8월말 중앙아프리카 가봉에서 일어난 궁정 쿠데타는 장기집권의 폐해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종식한 민주주의 실패의 전형적인 예이다.

    군타(Junta)는 스페인어로 1961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군부통치기구를 말한다. 위 이미지는 라틴아메리카 가상의 나라인 바나나공화국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소재로 한 보드게임 군타의 케이스 이미지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가봉 쿠데타의 사례에서 드러난 문제의식만 가지고서는 최근·서부·중앙 아프리카 지역에서 쿠데타가 늘고 있는 상황을 온전하게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대 들어 쿠데타가 발생한 국가들이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미루어보건대 쿠데타 도미노의 실마리는 무엇보다도 이들 국가와 프랑스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관계는 1957년 중도좌파연합정권의 법무부장관인 프랑수와 미테랑의 “프랑스는 아프리카 없이는 21세기에 역사가 없을 것이다’라는 발언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 외교가 기필코 사수해야 할 마지노선을 정의한 것이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58년 5월 또 다른 식민지의 이탈을 용납할 수 없었던 군부 일각의 쿠데타 시도가 우파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프랑스는 드골의 복귀를 선택했다. 기니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가 제5공화국 헌법을 지지한 가운데, 프랑스와 식민지의 관계는 프랑스 연합(모든 권력이 본국에 집중된 하나의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동체(식민지에 대한 광범위한 자치권 인정)로 변화하였다.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는 독립의 조건으로 식민지들에게 협약 체결을 요구했다. 협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식민지 독립 이후에도 프랑(현재의 유로) 통화 블록의 변함없는 존속이었다. 따라서 독립과 함께 자국통화를 발행한 신생국들이 식민지 통화 블록에서 이탈하여 달러패권체제에 흡수되던 현상이 1960년에 대거 독립한 사하라 사막 이남 프랑스 옛 식민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 견제의 하위 파트너인 프랑스가 필요했다.

    은동고 삼바 실라에 따르면 달러패권체제에서 프랑스가 자체 통화 블록을 유지한 것은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프랑스는 프랑권역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달러가 아닌 자국 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외환을 절약하고, 환율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프랑스가 계속해서 식민지 독립국의 환율·통화정책을 주도함에 따라 프랑스 기업들은 위험 부담 없이 프랑권역에 자유롭게 투자하고, 자본수익은 얼마든지 프랑스로 이전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현재 아프리카 15개국이 가입한 이른바 세파프랑(Franc CFA)체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고정환율(1999년부터는 유럽 유로에 고정)에 있다. 1945년부터 이어진 고정환율제는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프랑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었다. 프랑권역 국가들은 이로 인해 경제가 실체력보다 과대평가됨에 따라 수출 경쟁력이 악화하고, 협약이 부여한 자본 이동의 자유로 인해서 성장에 필요한 자본 축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신생 독립국들은 국제수지가 불균형일 경우 수반되는 환율의 평가절하와 그로 인한 대외 가격 경쟁력 우위를 위기 탈출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긴축 정책을 선택했지만, 이는 경제 침체를 가속화하여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악순환의 계기가 되었다.

    신생 독립국들이 세파프랑체제를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1958년 제5공화국 헌법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선택한 기니는 프랑스의 관계 단절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가 규범에 저항한 기니에 보복하는 것을 지켜본 식민지 지도자들은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1994년 미테랑 정권이 투치족 학살을 자행한 르완다 후투족 정권을 지지하는 명백한 과오를 범하고, 같은 해 IMF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프랑스는 굴욕으로 여겼을 세파프랑의 50%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 반프랑스 정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주황색으로 칠해진 국가들이 아프리카의 사헬지역이다. (출처- 영국 Conversation)

    두 번째 배경은 리비아 가다피 정권의 붕괴가 준 후폭풍이다.

    네오콘의 새로운 전쟁으로도 불리는 서구의 2011년 리비아 개입의 근거는 독재국가를 대상으로 인도주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유엔의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원칙이다. 하지만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가 2016년 9월 발간한 리비아 개입 검토보고서는 서방의 리비아 개입이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아니었으며, 특히 개입의 명분이 된 가다피 정권의 민간인 위협은 과장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표면적인 원인 말고도 가다피 정권이 리비아가 보유한 금을 기반으로 아프리카 통화 블록을 창설하려는 (누구는 망상이라고 부른) 장기 계획을 미국은 석유·달러체제 이탈로, 프랑스는 세파프랑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전쟁 초기부터 등장한 바 있다.

    리비아는 이슬람주의의 발호를 막고, 투아레그족의 움직임을 진정시키는 등 북아프리카와 사헬일대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순기능을 해왔다. 서구는 후속 전략의 부재와 무능을 드러내며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의 리비아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책을 범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나비효과를 초래했다.

    ① 국가체제가 붕괴하면서 통제력을 상실한 리비아에는 무기가 넘쳐났고, 리비아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무장조직들이 원하는 군사장비를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 있는 무기시장의 쿠팡으로 변모했다.

    ② 사헬지역에서 리비아를 경유해 튀니지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섬에 이르는 비공식 국제 이동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었다. 이탈리아 주도로 2010년 5월 유럽연합과 리비아는 이주협력의제에 합의하여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이주, 인신매매, 밀수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비아 정권이 붕괴한 이후 국경 통제가 불가능해지면서 유럽행을 차단하는 방파제는 무너졌다.

    ③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운동이 재차 촉발해 사헬 위기의 서막을 열었다. 투아레그족은 북아프리카 선주민인 베르베르인의 후예로 중개무역상 역할을 하던 유목민이다. 이들 중 가다피의 배려로 군복무 등 리비아의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던 말리와 니제르 출신의 많은 투아레그족은 가다피 정권이 붕괴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말리 북부의 아자와드(키달)지역을 중심으로 기존 분리주의자들과 함께·2012년 독립투쟁에 나섰다.

    ④ 말리의 대혼란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확산의 토양이 되었다. 서구가 반카다피 세력으로 지원한 반군의 상당수는 이슬람주의자였고, 말리 북부지역에는 1990년대 알제리내전(암흑의 10년)에서 살아남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있었다. 이들이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투쟁에 동맹으로 합세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가 주도한 다국적군이 아프리카 살쾡이라는 이름의 세르발 작전을 펼쳐 2014년 7월 투아레그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슬람반군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라흐마네 이드리사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때 무력 개입을 멈췄어야 했다.

    세 번째 배경은 테러와의 전쟁의 실패이다.

    시리아에서 다에쉬(이슬람국가), 알 누스라전선(알 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반군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프랑스는 2단계로 사헬 지역의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근절하기 위한 바르칸 작전에 돌입했다. 이 작전의 실패가 지역질서에 강력한 파장을 불러왔다.

    프랑스가 지금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지속한 또 다른 이유는 우파의 정치 기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아프리카에 투자한 프랑스 자본은 전통적으로 우파의 든든한지지 기반이었으나, 현재 프랑스 우파는 이 기반을 놓고 극우파와 경쟁 중이다. 그러나 1960년 대대적인 독립 이후 평균 15개월에 한 번씩 아프리카에 무력 개입을 해온 프랑스가 차드를 거점으로 3천명에서 5천명으로 병력을 증원하고, 이슬람 반군 척결을 명분으로 투아레그족과 협력체계를 구축한 것은 사헬을 재식민화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샀다.

    투아레그족의 반란은 ① 치안에 위협을 느낀 공동체들이 민병대로 무장하기 시작하고, ② 식민지 유산이기도 한 사헬지역 남쪽의 정주민과 북쪽의 유목민 간의 반목이 격화하고, ③ 유목민과 유목민 간의 경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과 과다한 사용, 기후변화로 지역이 황폐해짐에 따라 유목민이 이동하면서 정착민과 갈등이 불거졌고, 방목지를 두고 유목민과 유목민 그리고 도곤(전통적인 사냥꾼 집단)이 경쟁했다. 사소한 갈등은 공동체의 무력 충돌로 비화됐다. (식민지 이전의 초원은 공유지였다.)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니제르가 만나는 삼국 접경지대(주황색 동그라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테러가 빈번한 위험 지역이다. 이 지역이 원래 평화로웠다는 점에서 카다피 정권의 붕괴와 테러와의 전쟁이 그 이유로 지목된다. 지도의 5개국이 군사동맹인 G5 사헬이다. (남아공 Institute for Security Studies)

    이 같은 근본적인 갈등 구조를 국가가 치유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테러와의 전쟁은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이슬람 무장조직은 알 카에다 계열의 JVIM이라는 연합체로 재편됐으며, 그 일원인 풀라니족의 카티바 마시나는 2019년 한국인을 납치하기도 했다. 다에쉬는 보코 하람과의 유대 속에 서아프리카 이슬람국가(ISWA), 대사하라 이슬람국가(ISGS)라는 지역 거점을 확보했다. 이들은 이슬람주의만이 오직 문제 해결의 대안임을 설파했고, 이같은 선전은 효과를 발휘했다. 호주 경제·평화연구소의 2023 세계테러지수에 따르면 지난 2년간의 통계로 볼 때 테러리즘의 중심은 중동·북아프리카에서 사헬로 이동했고, 사헬은 테러의 진원지가 됐다.

    네 번째 배경은 지정학 질서의 변화이다.

    2014년부터 서방 경제제재에 봉착한 러시아는 돌파구의 하나로 아프리카에 다가갔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그 같은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2021년 미국과 아프리카의 무역액인 640억 달러를 같은 해 2,500억 달러로 훨씬 능가한 아프리카와 중국의 경제관계는 러시아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바그너그룹을 앞세운 러시아는 중국은 줄 수 없고, 서구는 이미 실패한 안보·군사지원과 식량, 광산업 등 러시아가 경쟁력을 가진 분야 중에서 아프리카가 필요로 하는 협력 분야를 묶은 실용 노선을 구사했다. 궁극적으로 이 접근법은 나이지리아의 천연가스를 니제르와 알제리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공급하려는 TSGP계획에 참여하여 잃어버린 유럽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가즈프롬의 장기 전략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사하라 횡단 가스 파이프라인(TSGP, Trans-Saharan Gas Pipeline)지도이다. 여기서 니제르는 1인당 GDP가 578달러에 불과한 최극빈국이다. 이 나라에 미국군, 프랑스군이 모두 주둔해왔던 이유는 7개 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바그너 그룹의 확장이 지정학 경쟁의 일환이냐, 수익 창출의 수단이냐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어왔지만 미국은 강대국 경쟁으로 받아들였다. 올 상반기 미국의 부통령(아프리카계), 영부인, 국무장관(사헬 방문), 재무장관, 유엔대사(아프리카계)의 연이은 아프리카 순방은 미국이 러시아의 아프리카 활동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대응은 너무 늦었다. 미국의 판단 착오는 프랑스처럼 아프리카의 부패·가난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않고, 군사작전만 지속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2007년 아프리카사령부를 창설했고, 2013년 니제르에 병력 100명을 배치한 이래 2016년부터 건설에 들어간 니제르 무인기 기지를 2019년에 본격 가동하는 등 아프리카를 반테러 전쟁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이상 네 가지 배경을 종합해 보면 사헬의 쿠데타는 탈냉전 이후 서방과의 유착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국가 예산의 부족분을 채우던 아프리카 민선 정부의 시대가 탈냉전의 쇠퇴와 더불어 끝나간다는 신호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보를 위협하고, 지역을 황폐화시켜 국가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쿠데타 세력에게 봉기할 명분을 준 강대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 실패라는 선고를 내린 법봉이다.

    군부통치라는 연결고리를 가진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는 지난 9월 그들을 적대시하는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ECOWAS)에 맞서 사헬국가동맹이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었다. 부르키나파소와 니제르는 지난 2일 말리에 이어 프랑스가 후원하는 군사동맹인 G5 사헬에서도 탈퇴를 선언했다. 쿠데타 도미노 이후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의 패권체제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보장한 프랑사프리크(프랑스·아프리카)의 시대가 서아프리카에서 저물고 있다는 증거로 회자된다. 프랑스는 니제르에서 군을 철수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으나, 미국 상원은 니제르 철군을 압도적인 표차로 거부했다. 따라서 사헬 쿠데타 벨트에는 쇠퇴하지만 무너지지 않은 규범 기반 국제질서와 실체는 분명치 않지만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국제질서 사이의 공백기에 놓인 아프리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올해는 스페인 카탈루냐 총사령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1923년 9월 13일 마드리드 카스코로 광장에서 쿠데타군의 권력 장악을 선포한지 백년이 된다. (컬러 복원 사진) 그의 퇴진의 후유증으로 1936년 스페인내전이 발발했다.

    나폴레옹에서 시작된 국민의 수호자인 군부가 도탄에 빠진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사고는 보나파르티즘으로 정의된다. 비스마르크와 푸틴 또한 보나파르티즘의 변형으로 평가받는다. 아프리카에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을 보도하는 서구 언론 기사에 습관적으로 붙는 ‘다음 차례는 어디인가’라는 소제목에서 민간 권위주의에서 군부 통치로 이행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을 쿠데타의 유혹에 빠뜨린 것은 미국과 프랑스이다.

    끊임없는 군사작전을 위해서는 사헬지역 국가의 군사화가 필요했고, 이들 국가의 병력 규모는 미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인해 예컨대 니제르의 경우 만 명 규모에서 대략 2만 5천명 수준으로까지 급증하여 군부의 권력이 비대해졌다. 테러와의 전쟁의 수단으로 미국군의 훈련·교육을 받은 고위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주도해왔다는 사실은 미국의 아프리카 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뜻으로 군사 분야 위주의 대외 원조 정책이 역효과를 낸 것이다. 과거 쿠데타의 경우라면 주도세력이 프랑스나 미국의 추인을 받는 절차가 필요하였겠으나, 이들이 현재 외국의 간섭을 배격하고 있고, 러시아라는 대안의 출현과 보이지 않는 손인 중국은 쿠데타 주도 세력의 입지와 권력 획득의 폭을 넓혀준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보나파르트의 귀환이 비극의 반복인지, 아니면 희극의 반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부도 우리 못지 않게 세계질서 변화에 고민이 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방-안보 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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