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로 가는 선거제도,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기고] '최소한의 염치' 사라진 정치
        2023년 12월 06일 03: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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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기고가 김찬호(비더슈탄트) 님이 부정기적으로 칼럼 글을 보내주기로 했고 그 첫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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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합의정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한국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018년이었다. 과거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있었지만, 정치권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2018년 12월 15일, 원내 5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를 이루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 비례대표 확대, 석패율제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합의였다.

    하지만 합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거대 양당은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합의를 사실상 파기했다. ‘적극적인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아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역시 연동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석패율제도 도입할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비례대표의 연동 비율은 50%로 줄어들었다(준연동제). 석패율제도,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도입되지 않았다.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도 물론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은 소위 ‘위성정당’을 창당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정치권은 결국 ‘위성정당’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들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의 후신인 미래통합당은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도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었다. 원내 5당 원내대표가 서명했던 합의문은 결국 단 한 조항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합의 정신은 파기됐다

    이미 지난 일을 두고 누군가에게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제도에는 허점이 있었고, 미래통합당은 그것을 악용했다. 선거 결과에 큰 타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 있다. 원칙만 안고 있다 패배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랐던 것은 최소한의 염치다. 원내 5당 원내대표는 분명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 개혁안 마련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그 합의안을 1년 만에 파기했다면, 최소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양당의 지도부에 이 사태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누가 있었는가?

    그저 합의안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양 뭉개버리는 것이 양당의 태도였다. 그렇다면 정당의 원내대표란 왜 존재하는 것이며, 그들의 서명에는 무슨 무게감이 있는 것인가? 우리 정치가 앞으로 만들어낼 수많은 합의와 타협의 결과물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을까? 그 ‘신뢰의 토양’을 파괴했다면, 최소한 미안하다며 머리 숙이는 사람 하나는 있어야 했다.

    미래통합당은 지유한국당 시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합의문에 서명했지만, 적극적인 검토도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4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은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미래통합당은 끝내 ‘위성정당’을 만들어 과거의 합의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미래통합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동의할 수 없다면 과거에는 왜 ‘적극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는지, 자성의 목소리조차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기 바빴다.

    더불어민주당은 다양성을 위해 비례연합정당을 택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면서도 ”성소수자 문제처럼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킬 정당과는 연합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던 것이 민주당이었다.

    다른 정당이라고 달랐는가? 녹색당과 민중당은 민주당에 비례연합정당 참여를 타진했다 거부당했다. 기본소득당은 결국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해 선거를 치렀다.

    여러 진보정당이 원내 진입을 간절히 바란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원내에 진입해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합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진보 진영의 숙원이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는 데 동조하면서 그들은 어떤 책임을 졌는가? 사과하는 목소리는 있었는가?

    4년이 지났지만

    그렇게 4년이 지났다. 총선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한국 정치는 이미 무력화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재설계하는 데 실패했다. 총선은 이제 반년도 남지 않았다. 국민의 총의를 모은 발전적 선거제도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강력히 반대하며 의석의 손해까지 감수했던 정의당도 이제는 선거연합정당을 만들겠다고 한다. 사실상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비판도 일었지만, 정의당과 녹색당, 노동당, 진보당은 연합정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사이 거대 양당은 과거의 병립형 선거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의 약속을 무력화하는 것을 넘어, 아예 파기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병립형 선거제 회귀에 대해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가능한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약속을 못 지키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며 “그런 경우에는 당당하게 약속을 못 지키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하면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의 토양’이다.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신뢰다. 그것이 정치인의 약속을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 한국 정치에서는 신뢰도 합의도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신뢰의 토양’을 파괴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물론 때로 약속도 합의도 파기될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관해, 한 번이라도 국민들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용서를 구한 적이 있었는가?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 양당 선거전략의 전부가 아니었는가?

    책임지지 않는 정치, 대안이 필요하다

    제도의 허점이니, 상대 당이 하니 어쩔 수 없다느니 변명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4년 전에 지났다. 한국 정치는 이 제도의 허점을 분명히 알면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단지 정치권의 게으름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합의 정신을 복원하고, 제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시간은 충분했다. 위성정당 방지법 같은 단순한 해결책을 넘어 석패율제,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 광역형 비례대표제 등 다양한 논의가 충분히 오갈 수 있는 4년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그 4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다양한 선거제도 논의가 나오던 4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 정치의 역동성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양당이 ‘팬덤 정치’와 제 식구 감싸기에 골몰하는 사이, 발전적인 선거제도 개혁 논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한국 정치는 이제 스스로에 대한 개혁을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은 제도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도, 그 고민을 들어줄 사람도 이제는 정치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무력화와 병립형 회귀 논의로, 한국 정치는 자구적 발전이 불가능함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이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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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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