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하려고 그렇게 모으나요?
    4가지 효용과 역사 컬렉터의 보람
    [컬렉터의 서재] 역사자료 수집의 쓸모에 대하여
        2023년 11월 20일 07: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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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생(許生)은 한양 묵적동(墨積洞)에 살았다…. 집이라야 비바람을 채 가리지 못할 작은 초가집에 불과했다. 그러나 허생은 오직 책 읽기만 좋아할 뿐이어서, 그 아내가 삯바느질을 함으로써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지경이었다.

    어느 날 허생의 아내는 너무 배가 고파서 울면서 말했다.

    “당신은 평생에 과거도 보지 않으면서, 책을 읽어 무엇에 쓰시려오?”

    허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독서는 아직 미숙하오.”

    아내가 묻기를,

    “공장(工匠) 노릇도 못한단 말입니까?”

    허생이 말하기를,

    “공장 일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할 수 있겠소.”

    아내가 다시 묻기를,

    “그럼 장사치 노릇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허생이 대답하기를,

    “장사치 노릇도 밑천이 없으니 어찌 할 수 있겠소.”

    부인이 화를 내며 내쏘았다.

    “밤낮으로 글만 읽었어도 배운 것이라곤 오직 ‘어찌 할 수 있겠소’뿐이구려. 공장 노릇도 못한다, 장사치 노릇도 못한다, 그러면 도둑질도 못한단 말이오?”

    허생이 어쩔 수 없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박지원, [허생전] 중에서

    주변 사람들은 마치 허생의 아내인 양 나에게 묻곤 한다.

    “당신은 그 따위 역사 자료들을 모아서 무엇에 쓰시려오? 또 그런 것들이 무슨 쓸모나 이로움이 있는 것이오?”

    사실 나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서 어떤 효용이나 쓸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처음 수집 입문 때 나에게는 수집한 자료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수업에 관심과 흥미를 더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수집하다 보니 규모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러므로 ‘역사 컬렉터’를 자칭하는 나는 수집의 효용과 쓸모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이제는 그럴듯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답을 해야 질문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을까?

    맹자(孟子)처럼 ‘하필왈리(何必曰利)’라고 반문하면 어떨까?

    양혜왕이 자기의 나라를 찾아온 맹자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이에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로움만을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이런 반문에 그 질문자는 이 개명한 자본주의 시대에 무슨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읊조리냐고 핀잔을 줄까? 아니면 자신을 이익이나 밝히는 사람 따위로 낮추어 봤다고 화를 낼까?

    이 대답이 마땅치 않다면 장자(莊子)가 설파한 ‘무용지용(無用之用)’으로 답하면 괜찮을까?

    일찍이 장자는 혜자(惠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쓸모없는 것을 아는 자라야 무엇이 참으로 쓸모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광야가 아무리 넓어도 그곳을 걷는 자에게는 두 발 둘 곳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고 발 둘 곳만 남기고 주위를 천 길 낭떠러지로 파 버린다면 사람이 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주변의 쓸모 없는 땅이 있기에 발 둘 땅이 쓸모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답을 듣고 질문자는 수집의 쓸모를 이해하기에 대답이 무용지물이라고 비웃지는 않을까? 보다 와 닿는 설명을 해달라고 재촉할 수도 있겠다.

    맹자나 장자의 권위에 기댄 답변 정도로 만족 못할 질문자들을 위해 역사 컬렉터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답변을 준비할 수 밖에 없겠다. 역사 컬렉터는 역사 자료 수집의 효용이나 쓸모에 대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질문자들에게 와 닿게 설명해보려 한다. 순전히 내 수집 경험에 근거하여 역사 자료 수집의 효용과 쓸모에 대해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역사 자료 수집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첫째. 수집된 역사 자료들은 옛 문화 유산의 원래 모습과 변천을 이해하고,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도움을 준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광화문 현판에 대한 이야기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만들어질 때, 철거될 위기를 간신히 피하고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 문루가 전소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 원래 자리로 옮기면서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만들었다. 이때 광화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그 후 목조건물을 콘크리트로 복원한 광화문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의 원형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복원을 위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3년 8개월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목조건축으로 복원된 새 광화문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이때 광화문에 걸린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 대신 조선후기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걸었던 대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체로 새로 제작한 현판이었다. 이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光化門’이라고 쓴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현판이 걸린 지 3개월 만에 현판 오른쪽 부분에 두 군데나 큰 균열이 발견되었다. 부실 복원 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더 큰 문제는 2016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광화문 사진이 발견되면서 발생했다. 2010년 복원된 현판은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였는데, 새로 발견된 사진 속 현판은 그 바탕 자체가 검은 색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글씨는 사진만으로는 어떤 색인지 명확히 식별할 수는 없었다. 1900년경에 일본인 세키노 다타시가 찍은 광화문 사진 속 현판도 동일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2018년 와세다 소장의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가 공개되면서 광화문 현판의 형태는 명확해졌다.

    光化門懸板 墨質 金字 以片銅 爲畵 以十品金 四兩重 塗之 (광화문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다. 동판으로 글자를 만들고 가장 좋은 금 넉 냥을 발랐다.)

    – 『경복궁영건일기』 을축년(1865, 고종 2) 10월 11일 기록

    이런 자료들이 새롭게 확보되면서 광화문 현판 교체가 최종 결정되었고, 이렇게 해서 다시 제작된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의 광화문 현판은 2023년 10월 15일 광화문에 새로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의 광화문 사진과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등은 이렇게 광화문 현판 교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래도 자료 수집이 쓸모없는 것인가?

    [사진] 위 사진은 2006년부터 시작된 복원 공사가 끝나고 2010년 8월 15일 공개된 광화문 모습이다.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광화문 현판이 보인다. 아래 왼쪽 사진은 1895년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의 광화문 사진으로 현판의 바탕이 흰색이 아니라 검은 색 바탕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2018년 와세다 대학에서 공개한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로 이 책에는 광화문 현판에 대해 ‘묵질금자(墨質 金字)’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른 사례다. 2018년 5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36주년과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개설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워싱턴D.C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의 배경에 걸린 태극기에 대해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태극기가 뒤집어 걸린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공사관에 걸려있던 태극기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대통령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금방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893년 촬영된 대한제국공사관 1층 식당 입구 사진 속 태극기와 2018년 태극기가 동일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사괘 배치가 확립된 것은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이후부터였으므로, 그 이전 역사에 이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 논쟁으로 비화될 뻔했던 이 일도 결국 옛 사진을 통해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도 역사 자료 수집이 무용한가?

    [사진] 2018년 5월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미국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을 방문해 박정량 대한제국 초대공사 손녀 박혜선 씨, 이상재 서기관 증손 이상구 씨, 장봉환 서기관 증손 장한성 씨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893년 당시 공사관 1층 식당 모습.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진]

    강원도 속초 설악산 자락에 있는 신흥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이야기도 덧붙여야겠다. 2010년 미국 LA카운티박물관은 용인대 박지선 교수에게 1998년에 자신들이 구입해 소장하고 있던 불화 영산회상도에 대해 수리 복원을 의뢰하게 된다. 이 불화는 모두 여섯 부분으로 잘려져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이후 이 불화는 2011년 복원을 완료한 후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런데 용인대 박지선 교수가 이 불화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그림의 하단에 적혀있는 화기(畫記) 내용 중 “건륭 20년 을해 6월 양양 북령 설악산 신흥사(神興寺)에 영산해회를 마치고 불화를 봉안합니다.”라는 부분을 통해 이 불화가 설악산 신흥사에 걸려있던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속초시와 신흥사를 중심으로 이 불화를 환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 불화는 어떤 경로를 통해, 또 언제 미국으로 유출된 것이었을까? 신흥사가 있던 설악산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지구로 미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이영희가 장교로 근무했던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951년 겨울까지는 신흥사 상태는 대체로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흥사는 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 성한 모습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지나온 낙산사가 거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없게끔 파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절은 성한 채였지만 절을 지켜야 할 스님은 그림자도 없었다. 연대 지휘부에 앞서 도착한 본부 중대의 병사들이 몸을 녹이려고 절 안쪽 여기저기서 활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불이 반가워서 지프차를 세우자마자 요란하게 타는 한쪽 불 둘레에서 서성대는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장작이나 나뭇가지인 줄 알았던 불 속에서 돌과 도끼, 삽 같은 것으로 마구 빠개진 불경 목판더미가 타고 있지 않은가?

    신흥사가 1954년 초여름까지도 큰 훼손이 없었음은 미군 폴 팬처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촬영한 극락보전 내부 사진을 보면 아미타여래 삼존불 뒤쪽에 분명히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1954년 가을에 방문한 미군 리처드 락웰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극락보전에 걸려있던 영산회상도가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이 영산회상도는 1954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에 여기에 주둔했던 미군들에 의해 약탈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근거 자료들을 바탕으로 신흥사는 미국 LA 카운티박물관을 상대로 반환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LA카운티박물관은 이 유물을 신흥사에 기증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2020년 8월 이 영산회상도는 미군에 의해 약탈된 지 66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두 미군의 사진 자료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래도 역사 자료 수집이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진] 왼쪽은 1954년 초여름 미군 폴 팬처가 찍은 신흥사 극락보전 내부의 모습으로 불상 뒤로 영산회상도가 온전한 형태로 걸려있다. 오른쪽은 1954년 가을 미군 리처드 락웰이 촬영한 극락보전 내부의 모습으로 뒤에 있던 영산회상도가 이미 사라진 상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 자료 수집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역사 자료 수집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의 두 번째는 이런 자료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그에 수반하여 나타나는 습속의 변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하나의 자료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내용들이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장의 자료를 통해 선연히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보자. 역사 컬렉터는 한때 옛 결혼 사진들을 열심히 수집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결혼 복장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기 결혼식장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는 사진들을 여러 점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사진들이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 강조된 국가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실제로는 사진들 대부분은 1950년대 찍은 것들이었다. 왜 1950년대 결혼식장 한가운데 태극기가 걸렸던 것일까?

    나는 그 유래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렇게 결혼식장에 국기가 걸린 모습이 일제 강점기 신식결혼(결혼식장에서 식을 올리던 결혼으로 당시는 ‘사회결혼’이라 표현하였다.)이 처음 등장할 때 도입된 것임을 알아냈다. 대일본제국이 강조하던 국가주의에서 파생된 풍습이 해방 이후에도 그래도 살아남았던 것인데, 다만 일장기만 태극기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또한 사진에 찍힌 결혼식 식순을 통해 1950년대 태극기 걸린 결혼식장에서는 국기에 대해 손을 가슴에 얹는 ‘경례(敬禮)’정도가 아니라 아예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배례(拜禮)가 이뤄졌음도 알 수 있었다. 이 결혼식장의 태극기는 60년대를 거치며 70년대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교과서나 개설서에 나오지 않는 이런 습속의 변화를 나는 옛 사진들을 통해 생생히 알 수 있었다.

    (위 내용에 대해서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레디앙 칼럼 참고)

    옛 여성들의 외출이나 여행 복장도 그렇다. 근현대 시기 사진들을 보면 여성들의 외출이나 여행 복장은 한결 같다. 남자들은 양복, 한복, 점퍼 등 다소 자유로운 데 비해 여성들은 예외 없이 한복이었다. 1년에 한두번 연례 행사처럼 있는 여행이나 계모임 등에 최고의 예를 갖춘 것이 한복 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장 차림의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복장에 변화가 생긴다. 대체로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 시기의 모임 사진을 보면 반반 정도 섞여있다. 이 시기를 지나면 한복은 급격히 퇴조하고 양장이 대세를 이룬다. 이런 복식의 변화를 이렇게도 쉽고 간단하게 보여주는 자료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래도 역사 자료 수집이 무용한가?

    [사진] 근현대 시기 사진들을 통해 여성들의 외출이나 여행, 혹은 계모임 복장이 한복에서 양장으로 언제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알 수 있다. (박건호 소장)

    역사 자료 수집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역사 자료 수집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효용은 추상적 이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되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보통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무척 추상적이라 그것이 동떨어진 세계의 것이고,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나의 생활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옛 사진들, 특히 남녀 학생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자. 사진들 속에서 흥미로운 점은 남녀 학생이 절대 섞여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졌듯 남녀 학생 사이에 구분선을 명확히 그을 수 있다. 이것이 남녀유별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1910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해에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갑자기 작동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수백 년 간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 습속에 관성으로 남아 맹위를 떨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리 되는 것! 남녀유별의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진 찍던 습속은 역사 컬렉터가 수집한 사진들을 보면 1990년대 이후 점차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반공이데올로기 이야기도 해보자.

    ‘반공(反共)’이나 ‘멸공(滅共)’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전개하는 이념 공세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부의 국민 생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매우 구체적으로 작동했다.

    먼저 우리 생활 속에서 사용하던 말들 중 불온하다는 딱지가 붙어 퇴출된 말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중에는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포함된다.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줄여서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 달이 채 못되어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줄여서 조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직후 한국 정부는 자신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 북쪽에 대해 ‘북한’ 또는 ‘북한 괴뢰(북괴)’로 불렀다. 이와 함께 ‘조선’이라는 말은 ‘한국’이나 ‘대한’으로 다 바뀌었다.

    [사진] 1960∼70년대 TV에 중계된 여자배구 장면이다. 자막에 북측 선수들을 ‘조선’ 혹은 ‘북한’이라고 쓰지않고 ‘북괴’라고 쓴 점이 인상적이다.

    ‘조선옷’은 ‘한복’으로, ‘조선음식’은 ‘한식’으로, ‘조선해협’은 ‘대한해협’으로, ‘조선반도’는 ‘한반도’로, ‘조선어’는 ‘한국어’로, ‘조선체육연합회’는 ‘대한체육연합회’로, ‘조선교육연합회’는 ‘대한교육연합회’로 ‘창씨개명’했다. 이런 변화는 심지어 과거 역사에 소급되어 적용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교과서나 공식 역사에서는 모두 ‘대한독립만세’로 기록하고 가르쳤다.

    ‘인민(人民)’이라는 용어도 퇴출 대상이었다. ‘인민’은 ‘국민’이란 말로 교체되었다.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미군정기 미국공보원이 1948년 5.10선거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제목은 ‘인민투표’(감독 최인규)다. 처음으로 동시 녹음하여 찍은 영화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포털에 검색해보면 인민투표로는 검색이 안된다. 동일한 영화인데 제목을 ‘국민투표’로 해야 검색이 된다. 앞의 ‘대한독립만세’처럼 반공은 이렇게도 역사에 소급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왼쪽은 1948년 제작된 영화 ‘인민투표’의 포스터로 최근에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오른쪽은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서 ‘인민투표’로 검색한 결과이다. ‘인민투표’라는 제목 대신 ‘국민투표’라는 제목으로 등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몰아낸 말은 ‘조선’, ‘인민’ 외에도 ‘동무’란 말이 있다. 동무는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지를 뜻하는 ‘Comrade’를 동무로 번역 사용하면서 남쪽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동무가 들어간 단어는 대부분 한자어 ‘친구(親舊)’로 대체되었고, ‘어깨동무’, ‘길동무’같은 합성어에만 남아있다. 이런 이유로 ‘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로 바뀌었다. 1946년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의 [독립행진곡]이란 노래가 있다. 1절과 2절의 원래 가사는 아래와 같았다. 그런데 각 절에 등장하는 저 ‘동무’라는 가사는 곧 ‘동포’로 바뀌고 말았다.

    어둠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한숨아 너 가거라 현해탄 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두 손 들어 만세 부르자
    아득한 시베리아 넓은 벌판에
    아 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반공은 우리의 언어 생활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색깔에도 적용됐다. 장년층 이상의 독자들은 예전 학교 운동회에서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나누어 경기를 했던 걸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부터의 전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회가 보편화되었던 일제 강점기에 열린 운동회에서는 청백전이 아니라 홍백전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홍백전이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되면서 붉은 색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색이었으므로 곧 퇴출되고 말았다. 홍군이 청군으로 바뀌게 된 이유였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붉은 색은 2002년 월드컵 때 “Be the Reds”라고 쓴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붉은악마’가 거리에 몰려 나올 때까지 내내 위험하고 불온한 색깔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실린 매체 레디앙Redian도 붉은 색을 표방하고 있다.)

    최근에 자료 정리를 하다가 내가 중학교 때 방학 숙제로 그렸던 세계 지도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런데 이 지도에 그려진 나라들은 모두 다른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한반도는 전체가 푸른색으로(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다), 중국은 황색, 일본은 분홍색, 소련은 보라색이었다. 처음에는 이 색깔들을 내가 임의적으로 사용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색깔들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린 지도는 아마 당시 발행된 어떤 지도책을 베껴 그렸을 것인데, 그 색깔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일단 붉은 색은 한반도 지도에는 쓸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사정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1950년 1월 16일 정부 관보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이나 사용의 편의상 [대한] 또는 [한국]이란 약칭을 쓸 수 있으며, 북한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 조선은 지명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조선해협], [동조선만], [서조선만] 등은 각각 [대한해협], [동한만], [서한만] 등으로 고쳐 부른다. 정치구분지도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색은 녹색으로 하고 붉은 색은 사용하지 못하며, 우리나라의 색을 뚜렷이 나타내기 위하여 이웃의 중국은 황색, 일본은 분홍색, 소련은 보라색으로 한다.

    [사진] 위는 필자가 중학교 시절에 그렸던 세계지도이다. 나라별로 다른 색이 칠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는 1950년 1월 16일자 대한민국 관보이다.

    이렇게 반공은 1950년대에서 70년대, 80년대까지 맹위를 떨치다 사라져버린 과거의 옛 구호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활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유교의 남녀유별 이데올로기가 조선이 망하는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수십년 혹은 100년이 지난 후 남녀 학생들이 서로 구분을 지어 사진을 찍는 형태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는 역사 자료를 통해 자신을 구체화하고 물성화해서 그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 자료를 통해 그 거대담론의 세계를 접촉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화들짝 놀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 교재가 어디 있는가? 이래도 역사 자료 수집이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 자료 수집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가?

    역사 자료 수집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네 번째 효용은 수집자료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연결해주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자료를 남긴 이들은 이미 죽고 역사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남긴 자료들마저 함께 죽고 소멸되지는 않았다. 옛 사람들이 남긴 역사자료들은 이후 홀로 남아 눈 밝은 컬렉터들에게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새롭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고, 현실 세계에 작용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역사 컬렉터는 그동안 수집 자료들을 통해 자료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월군수 강봉원의 수탈 장부를 발굴해 글을 쓴 것을 계기로 나는 영월문화원의 초청을 받아 그 문서가 작성된 지역을 직접 방문해 학술 심포지움에서 강봉원의 수탈을 소개할 수 있었다. 또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한 이름표를 단 합격자들이 찍힌 사진 한 장을 수집하고 그 사진을 탐구하다 그 사진이 충북 옥천 지방의 청산국민학교 제26회 졸업사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옥천신문사 황민호 기자의 도움을 받았고, 당시 직접 옥천의 청산초등학교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이 사진 한 장을 통해 나는 옥천과 옥천신문과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시흥공립보통학교 1919년 7회 졸업사진과 1920년 8회 졸업사진을 수집해 이를 비교하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시흥초등학교 동창회를 통해 『시흥초등학교 백년사』란 책을 얻을 수 있었다. 나와 시흥초등학교는 그 사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맺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2023년 2월 말 3.1절을 맞이하여 시흥공립보통학교에서 120여 명의 학생이 동맹휴교를 하고, 만세를 부르며 일본의 통치에 항거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다는 신문 기사를 보며 내 일인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1940년 발행된 ‘대문 없는’ 씰과 ‘대문 있는’ 씰 두 종류의 씰을 수집하지 못했다면, 나는 셔우드 홀 가족의 놀라운 헌신에 대한 이야기를 몰랐거나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이끌어 헌화하게 한 것도 그 씰들이었다.

    나를 충남 예산군 오가면과 연결시켜 준 것도 수집자료인 『(오가면) 범죄인명부』라는 장부였다. 나는 예산군 오가면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이 『(오가면) 범죄인명부』는 내가 올 3월 태형에 관한 글을 쓸 때 활용했던 자료였을 뿐이다. 다소 길지만 당시 이 장부에 대해 썼던 글 내용 일부를 옮긴다.

    (전문은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①” 레디앙 칼럼 참고)

    벌써 15년은 더 지났을 것이다. 경매를 통해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흥미로운 장부 한 점을 수집했다. 장부는 200페이지 정도로 두꺼웠는데, 표지 제목은 거의 지워져 『犯罪人 名簿(범죄인 명부)』라고 적힌 것을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였고, 왼쪽 위에는 비밀 문서임을 뜻하는 붉은 색의 ‘秘’자(字)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목 왼쪽 아래에는 너무 많이 지워져 읽을 수는 없지만, 세 자의 한자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명부를 만든 관공서 명칭일 것이다. 장부를 펼쳐보니 대정 7년(1918)부터 소화13년(1938)까지 20년간의 범죄인 총 194명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들의 주소지는 모두 ‘충남 예산군 오가면’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읽을 수 없었던 큰 제목 옆의 세 자는 ‘吾可面(오가면)’이었을 것이다. ‘오가면’이라고 하더라도 이 장부는 면사무소 같은 행정관서보다는 경찰관서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장부에는 벌금, 태형에서부터 징역, 사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벌을 받은 당시 ‘범죄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특히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죄명은 도박, 삼림령 위반, 주세령 위반이었다. 내가 이 명부에 흥미를 가져 수집한 것은 한 면소재지의 사례를 통해 일제 강점기 당시의 범죄 현황을 살펴보겠다는 생활사적 관심도 없지 않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 범죄인 명부가 3·1운동 시기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명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충청도 어느 면 소재지 사람들이 3·1운동에 참가한 후 어떤 죄목으로, 어떻게 처벌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이 장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충남 예산군 오가면 사람들 중 3·1운동과 관련하여 처벌 받은 사람은 총 13명이다. 1919년 4월 7일부터 4월 23일까지 그들은 모두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 받았다. 3·1운동 당시 이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던 것일까? 3·1운동 당시 이 예산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를 검색해보면, 오가면을 포함하여 여러 면이 4월 4일과 5일 밤을 이용한 봉화 시위를 전개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10일자 기사를 보자.

    예산군 내에서는 지나간 4일 오후 10시경부터 예산면 대술면 오가면 신압면 고덕면 각 리, 신양면 일부 약 15개소에서 각각 다수한 군중이 각각 봉화를 들고 소요를 하였고 5일에는 예산장날을 이용하여 오후 1시경에 장꾼 일동이 소요하며 행동이 불온하였으므로 헌병분대에서 출동하여 진압한 바 군중편에 중상자가 4,5인에 달하였고 동일 오후 7시경에는 또 예산군 읍남면 형제고개와 서편 관영산과 북편 금오산과 동편 시산 4개소에서 다수한 군중이 거화하고 소요하였으므로 해산케 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부득이 발포 해산을 하자 또한 비가 오므로 모두 헤어졌다더라.

    오가면 『범죄인 명부』에 실린 1919년 4월의 보안법 위반자 13명은 아마 이 봉화 시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에 실린 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살펴보면 오민영(50), 박치덕(34), 강덕몽(25), 이명노(27), 이순태(22), 고성보(33), 나덕재(29), 박영근(32), 김덕삼(42), 박인석(25), 전봉석(26), 윤희두(28), 박덕준(32)으로 20∼30대가 중심이었다. 직업란이 비어 있는 윤희두와 고성보 2명과 아예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표기한 박덕준을 빼고는 직업은 모두 농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 중 봉화시위를 주도한 이는 누구였을까?

    오가면 신장리에 살았던 강덕몽(姜德夢)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강덕몽이 받은 처벌이 다른 이들에 비해 무거웠기 때문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 받은 13명 모두 ‘태형(笞刑)’ 처벌을 받았는데, 그 중 7명은 30대, 5명이 60대에 머물렀다면, 오로지 강덕몽만 90대를 맞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강덕몽이 주동자, 60대를 맞은 5명(오민영, 박치덕, 전봉석, 윤희두, 박덕준)이 중간 주동자급, 나머지는 모두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명부를 통해 3·1운동에 가담한 이들이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 받았고, 처벌 형태는 주로 ‘태형’이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13명의 기록 내용 중 ‘판결 또는 즉결관청명’항목에 모두 ‘예산헌병분대’라고 적힌 사실을 통해, 그들이 정식 재판을 통해 처벌 받은 것이 아니라, 예산헌병분대에서 즉결처분으로 태형을 당했다는 것도 알았다…….

    이 글을 쓴 얼마 후 나는 국가보훈부에서 근무하는 서동일 연구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이 범죄인 명부 속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 받은 분들, 즉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아직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 못한 분이라며 정식으로 추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원래는 2023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 포상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상자가 많아 3개월 후인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포상을 추진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결국 총 8개월간의 자료조사와 심사를 거쳐 11월 17일 총 11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게 되었다. 그 11명은 강덕몽, 고성보, 김덕삼, 나덕재, 박덕준, 박영근, 박인석, 박치덕, 오민영, 이명노, 전혁규 선생이다. 11월 15일 국가보훈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서는 11명 중 전현규 선생을 대표로 해서 이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보도 자료 내용은 이러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컬렉터는 국가보훈부의 서동일 연구사와도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충남 예산군 오가면, 그리고 11분의 독립유공자와 그들의 후손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게 옛 자료들이 가진 힘이다. 죽었던 자료가 컬렉터를 만나 새 생명을 얻고 현재에 되살아난 것이다. 독립 유공자 11명의 대표로 소개된 전혁규 선생을 살펴보니 1890년 6월 28일에 태어나 1969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그 해는 역사 컬렉터가 태어난 해다. 전혁규 선생과는 이 나라에서 10개월 정도 같이 살았던 인연이 있었다. 그것 이외에 연결되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3.1운동 참여 사실을 증명하는 범죄인 명부가 있었고, 그 장부를 역사 컬렉터는 수집했고 그리고 역사 컬렉터는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고, 그 글은 다시 컬렉터와 국가보훈부의 한 연구사를 연결시켰고, 그를 통해 전혁규 선생 등 열 분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니 이런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역사 컬렉터가 한 일들 중 이렇게 큰 보람을 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칫하면 묻혀 사라질 뻔 했던 오가면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명예회복을 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 권의 장부 때문이었다. 이래도 역사 자료 수집이 무용한 것인가?

    [사진] 왼쪽은 역사 컬렉터가 발굴했던 『오가면 범죄인 명부』의 표지이다. 오른쪽은 2023년 11월 17일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필자가 발굴한 독립유공자 11분 중 한 명인 전혁규 독립유공자 손녀가 대통령 표창을 받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이다.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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