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금 은행제도를 넘어
    [책소개] 『주권화폐』(조세프 후버(지은이), 유승경(옮긴이)/ 진인진)
        2023년 11월 18일 05: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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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금융은 왜 어렵게 느껴지나?

    화폐와 금융은 전공자들도 무척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사실 그 이유는 많은 경제학 교과서가 화폐와 금융에 대해서 현실과 괴리된 잘못된 통념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통념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토대로 대안적인 새로운 화폐체제의 모습과 이행의 방도를 전하고 있다.

    화폐의 본질은 교환수단이 아닌 부채의 청산수단이다.

    이 책은 화폐의 본질에 대한 경제학 교과서의 설명을 비판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화폐가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들이 그 불편함을 덜고자 서로 합의를 통해 특정 상품을 교환수단으로 선택함으로써 탄생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실제 역사에서 사람들은 화폐가 없을 때 물물교환이 아니라 신용/부채 관계에 의존하여 거래를 했다. 그리고 화폐는 신용/부채의 최종적인 청산 수단으로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탄생했다.

    민간은행이 화폐를 발행한다.

    그 다음에 저자는 현재 누가 화폐를 발행하는가를 묻는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 혹은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은행계좌의 기록으로 존재하는 은행화폐이며 전체 통화량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권의 경우에 3%에 불과하다.

    은행은 금융중개기관이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은 예금자가 저축한 예금을 모아서 대출하는 금융중개기관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통화량 중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은행이 예금을 대출로 이어주는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대부분의 화폐는 민간 은행이 발행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대출이 예금의 원천이다.

    이렇듯이 은행이 신용 창조를 통해서 은행화폐를 창조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받아들여지면서도 예금이 대출의 원천이라는 통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저자는 단호하게 예금이 대출의 원천이 아니라 대출이 예금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일상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은행은 대출을 해줄 때 현금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차입인의 예금계좌에 그만큼의 액수를 기입해준다. 이처럼 대출이 예금을 창조한다. 따라서 대출에 의해 창조된 예금은 재대출의 재원이 아니다. 저자는 예금은 은행이 고객에 지고 있는 부채를 의미할 뿐이며 은행은 새로운 예금을 생성하여 대출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대출을 위한 별도의 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지불준비금은 현금이 아니다.

    또한 저자는 지급준비금이 대부분 현금이 아니며 은행들 간의 거래에만 유통되는 계좌상의 화폐임을 특별히 강조하여 설명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한다’고 표현하고 있어서 은행이 마치 지급 준비를 위해서 현금을 중앙은행에 입금하는 듯이 설명한다. 그러나 준비금은 처음부터 중앙은행의 신용으로 창조된 비현금화폐로서 은행 간 거래에만 사용되며 그 이름과 달리 현금 지급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은행은 중앙은행과 거래에서 준비금을 1:1로 현금과 교환할 수 있지만 준비금 자체는 고객에게 직접 전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행들은 왜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서 경쟁하는가? 각 은행들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다른 은행들에게 결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은행이 다른 은행으로 예금이 일방적으로 이체된다면 그 은행의 준비금은 고갈될 수 있다. 결국 예금 유치는 대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금 고갈을 막기 위해서이다.

    지급준비금은 통화량을 통제하지 못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지급준비금 규모가 통화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규모와 통화량 간에는 안정적 비례관계가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즉 대출의 규모는 기존 지급준비금 규모의 제약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급준비금과 통화량 간의 안정적 관계는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첫째, 은행은 전망이 불확실할 때에는 대출 여력이 있더라도 대출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둘째, 은행도 영리기업이기 때문에 이윤 전망이 좋으면 먼저 대출하고 이후 지급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요구하며 중앙은행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지급준비금 규모는 대출의 확장을 제약하지 못한다. 저자는 이런 논의를 전제로 현행 은행화폐체제에서는 화폐의 공급이 일반 상업은행의 영리적 판단과 대출을 받고자 하는 가계와 기업의 의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경기 변동이 증폭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 시스템은 경기변동을 증폭시킨다.

    저자는 현행 은행화폐체제에서의 경기변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데, 지금 최근의 한국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다: “경기 전망이 좋으면 은행들은 이윤을 쫓아서 대출을 늘리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가계나 기업의 대출 수요도 늘어난다. 따라서 경제의 낙관적 분위기는 쉽게 경기 과열과 자산가격의 거품을 낳아 금융위기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 특히 새롭게 창조된 화폐가 부동산과 금융자산의 매수를 뒷받침하게 되면 고질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대출의 증가는 자산에 대한 수요를 높이지만, 그러한 자산시장의 공급은 매우 늦게 반응하기 때문에 쉽게 자산가격이 급등한다. 더구나 대부분의 대출이 기존 자산의 매입에 사용되는지라 실물 경제의 생산능력은 그만큼 개선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 부채의 수준은 높아지지만 국민소득을 직접적으로 높이지 못한다. 그래서 민간부채 수준이 소득증가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부채를 수반하지 않은 화폐 발행이 필요하다.

    저자는 부채를 수반하지 않는 화폐의 발행을 현 경제시스템의 고질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안한다. 통화량이 늘어난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한다. 그렇지만 경제의 순조로운 성장을 위해서는 통화량이 생산성 향상에 맞춰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화폐경제의 가장 부정적 현상인 디플레이션이 일어나 기업은 이윤을 실현하지 못하고 매출로써 부채도 청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통화량은 꾸준히 증가해야 경제는 순조롭게 성장한다. 그런데, 현 화폐시스템에서 현금과 같은 본원통화는 국가부채 누적을 통해 늘어나고 유통화폐는 즉 대출을 통해서 늘어난다. 이처럼 현행 시스템에서는 경제가 요구하는 화폐가 공공 및 민간 부채의 과잉을 수반하기 때문에 경제 위기와 금융 위기는 숙명과도 같다는 것의 저자의 결론적 진단이다. 따라서 저자는 국가가 (중앙은행을 통해서) ‘부채 아닌 화폐(debt-free money)’를 창조하고 그 화폐를 은행의 대출이 아니라 정부의 지출을 통해서 공급하는 주권화폐체제를 제안한다. 과연 ‘부채 아닌 화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저자는 미국의 주화를 주권화폐의 원형으로서 제안한다. 미국의 주화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재무부가 발행하기 때문에 미국의 지폐는 중앙은행의 부채이지만 주화는 중앙은행의 자산으로 기록된다.

    주권화폐의 발행은 오래된 제안이다.

    이상의 내용이 저자 조세프 후버 교수가 자신의 저서 ‘주권화폐’에서 수행한 현행 화폐은행제도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이자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화폐체제에 대한 구상의 요약이다. 후버 교수의 주장은 그 혼자만의 독특한 입장이 아니다. 20세기의 초반부터 화폐를 은행의 부채로서 발행하는 현대 화폐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등장했다. 그리고 대공황 시기에 시카고 대학에 적을 둔 일단의 저명한 미국 경제학자들이 부분지급준비금제도를 완전 지급준비제도로 전환하자는 이른바 『시카고 플랜』을 제안했다. 2012년에는 IMF 소속 경제학자들이 『시카고 플랜』을 다시 상기시키며 완전지급준비 제도로의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그 외에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서는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폐지하고 주권화폐를 도입하자는 시민학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모든 제도는 변한다. 화폐의 기원은 고대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주화가 등장한 시기부터 따져도 25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현재와 같이 상업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은 길어야 200년에 불과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현대의 화폐체제는 사실상 크게 변했다.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라는 정책을 통해서 인쇄기에 의존하여 화폐를 발행하고 그 화폐로써 금융상품을 사들였다. 그런 현실 변화를 반영하여 최근 들어 화폐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으며 후버 교수의 ‘주권화폐(sovereign money)’도 그런 새로운 세계적 논의의 맥락에서 출판된 대표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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