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
    [L/A 칼럼] 라클라우의 논리를 중심으로
        2023년 11월 15일 04: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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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즘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전문 학자들도 머리가 아파한다. 우파와 좌파 포퓰리즘 출현의 맥락이 다르고 라틴아메리카와 다른 지역의 맥락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여러 담론들이 마구 섞여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1980년대 이래 출현한 신자유주의가 포퓰리즘과 묘하게 병행하면서 새로운 포퓰리즘(neopopulism)이 등장하여 더욱 복잡해졌다.

    구체적으로 페루의 후지모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여기에 미국의 트럼프도 겉으로는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나 극우적 해법을 내놓는 새로운 포퓰리스트인 것은 틀림없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포퓰리즘이 일부 비공식분야의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어 민주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트럼프가 어처구니없게 의회의 공격을 선동한 것을 생각하면 제도적 자유주의를 폄하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고전적 포퓰리즘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선 국회의원, 언론인과 같은 엘리트그룹이 아닌 일반대중의 어떤 사회그룹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포퓰리즘이라는 해석이 상식이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을 싫어하는 자유민주주의 관점은 엘리트에 의한 제도적 대의를 중시하고 이 주류 관점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퓰리즘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좌파 포퓰리즘 이론의 석학인 고 에르네스트 라클라우의 주장을 생각해본다. 라클라우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특히 “헤게모니”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람시의 후계자로 볼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직적 결정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좌파 담론의 중요한 스피커이다. 그는 일부 구좌파의 담론이 지나치게 노동자계급(마르크스주의)/부르주아(자유주의)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기존의 선입견과 달리 “올리가르키아‘라고 불리는 과두 지배 대지주들이 자유주의자인 경우가 흔하다. 포퓰리즘은 라클라우에 의하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모든 정치적인 것의 논리(logica politica)”이다.

    라클라우

    과거에 라클라우는 이데올로기를 중시했지만 조금 달라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겉옷을 벗겨내고 그 속의 정치적인 것을 보자는 주장이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정치 지형이 이미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따르면 어떤 정치가 포퓰리즘적이면 그 정치가 문제인 것이지 포퓰리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애매성과 취약성, 비민주성(?)을 집중 공격하는(거의 모욕의 수준에 가까운) 주류 담론에 대해 라클라우는 “포퓰리즘 담론의 애매성은 실제 어떤 상황에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의 애매성과 비결정성으로부터 온 결과가 아니냐?”고 질문한다. 즉, 포퓰리즘의 애매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을 사회적 현실에서 찾아야지 담론의 내부적 논리 완결성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류 담론의 본질주의를 공격하는 맥락주의를 드러낸다고 보인다.

    또는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다. ‘대중’의 개념을 고정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대중 자체가 애매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중은 어떤 명확한 계급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 맥락에 따라 흔들린다. 또는 중립적이다. 라클라우는 자신의 저서의 앞부분에서 대중을 언급할 때는 대중(masa)을 쓰다가 뒷부분에서는 대중(pueblo)을 쓴다. 두 단어 모두 스페인어로 전자는 대중을 이리저리 휘둘리는 무정형의 집단으로 본다는 맥락이고 후자는 대중이 기득권 집단에 대항하여 스스로 새로운 정체성의 집단으로 출현하며 ‘대중의 요구’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의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소외받고 배제된 가난한 대중(Plebeyo)요구를 중시한다. 라틴아메리카가 바로 그렇다. 이들은 그런 요구를 집단적으로 잘 한다. 아무튼

    우파와 좌파 포퓰리즘이 갈리는 것은 대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은 중산층을 대중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애매하다. 미국과 우리나라 같이 경제가 상당히 발전한 나라에서는 중산층이 대중일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정당은 맥락에 따라 우파 포퓰리즘을 지지하더라도 노골적으로 하지는 못하고 은밀하게 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가 그렇다. 두 나라 모두 그보다 아래의 대중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그들의 요구는 있어도 잘 들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같은 일부 정치인은 배제된 대중을 대변하며 ‘변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극우 이데올로기와 포퓰리즘을 교묘하게 접합하면서 자유주의 제도정치를 완전히 파괴하려 든다.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이 이것 말고 다른 것이 또 있다는 점이다. 라클라우에 의하면 배제되는 대중이 능동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요구’하지 않으면 좌파 포퓰리즘은 성립하지 못한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난한 대중이 당당하게 그런 ‘요구’를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포퓰리즘의 사례는 페론주의와 차비스모를 들 수 있다.

    라클라우는 말하길 “포퓰리즘은 조잡하고 촌스러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작업을 넘어 고유한 자신의 이성을 가진 수행적 행위가 아닐까? 즉 어떤 상황에서 애매하다는 사실은 뛰어난 정치적 의미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라 했다. 이 언급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성숙하고 점잖은”것으로 스스로 자부하고 가정하는 관점을 전복하고 보다 민주적인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는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셔츠도 못 입고 지낸 것을 언론사 기자 또는 대학생 등 엘리트 지식인들이 “셔츠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웃던 상황을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것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페론정권은 1946년에서 1955년까지 권력을 유지했지만 페론주의는 1976년 군부 쿠데타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최근 2023년 대선에서도 극우 신자유주의 포퓰리스트를 누르고 페론주의자가 승리함으로써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대중의 감성적인 흐름(정동)의 중시이다. 즉,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탱고와 가우초(시골의 목부들)를 “점잖치 못한 것”으로 치부하였으나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체성으로 높이 중시하게 된다. 특히 군부독재 시기에도 반독재 저항세력은 탱고를 사랑한다. 그러나 거꾸로 엘리트적, 금욕적 관점에서 볼 때 천하고 위험한 좌파 포퓰리즘은 처음부터 그 위상이 깍여지고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좌파 포퓰리즘도 애매하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 대학의 교수인 카를로스 데라 토레에 의하면 페론주의도 오랫동안 배제된 대중이 광장 등에서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 출현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볼 수 있지만 페론이라는 권위적인 지도자를 대중이 동일시하면서 페론이 반대세력을 억압한 것은 분명히 비민주주의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불리는 차비스모의 경우에도 차베스 진영 내부의 다양한 이견과 토론을 포용하지 못하는 비민주적 약점을 드러낸 바 있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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