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토끼』 혹은
    정보라식 리얼리즘에 관해
    [비판과비평] 초현실과 현실의 교차
        2023년 11월 06일 0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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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위 있는 국제 콩쿨이든 문학상이든, 그 기능은 우수한 역량을 지닌 예술가, 작가를 선별해주는 데 있다. 유명 출판사의 기능도 마찬가지다. 책이 출판될 가치가 있는지를 원고 상태에서 검증해 주기 때문. 이는 독자들이 어떤 작품을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단축하게 해준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탐색 비용을 줄여준다고 한다.

    정보라 작가는 과학소설이나 호러 장르에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본격’ 문학계 일반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작가라고 생각된다.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차이가 뭐냐고 누군가 말할 수 있겠지만 『저주토끼』가 발간되었을 때 문학계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이 경계는 존재한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호러물을 대중문학 장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 같은 이들이 호러물 소설을 읽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포우의 소설집 같이 고전에 올라있는 작품들은 너무 유명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말이다.

    정보라라는 작가가 지인의 동반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내가 대학교에 일하고 있을 때, 전국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책을 읽지 않았었다.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저주토끼』를 정독했다. 친구의 동반자가 ‘한강이 받았다는 그 세계 3대 문학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고?’ 하는 속물적인 관심이 작품을 진지하게 읽게 된 이유이다. 친구에게 언제 정보라 작가를 양산에 초청할 수 있을까 문의했던 것도 작년 부커상 최종 후보 발표 이후였다. 그 이후로는 정 작가님이 너무 유명해져 초청하는 것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저주토끼』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것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2.

    『저주토끼』의 10개의 단편들에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은 ‘비판’이다.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 <저주토끼>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돈과 권력이 정의이고 폭력이 합리이자 상식인 사회에서 상처 입고 짓밟힌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그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들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기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주토끼』의 단편들은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저주토끼>에 나오듯 비판은 ‘개인적 원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용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해서도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부커상 평론에서 이 소설집을 ‘마술적 리얼리즘’의 계보에 위치 시켜 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백년의 고독』의 마르케스나 『수도원 비망록』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제 사라마구 작품이 마술적 리얼리즘에 속한다. 이 소설들은 모두 초현실적 상황과 현실을 교차시켜 사회체제와 인간존재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재현한다. 소설에서 재현은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다. 창작은 작가들만의 새로운 소재와 장치를 통해 현실을 ‘표상’하는 활동이다. 상징적 질서를 통해 현실을 다시 보여주는 것 말이다. 의미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저주토끼>는 주술적 장치를 통해 중소 자본을 괴롭히는 ‘악질’ ‘대자본’의 응징에 대한 이야기다. ‘탐욕’은 자본가계급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우화의 형식을 빈 <덫>과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에서는 인간 존재 자체의 탐욕에 초점을 둔다. <덫>의 주된 캐릭터는 아들과 딸을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잔혹한 아버지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에서 위정자는 부를 얻기 위해 전쟁을 부추기고 인민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따른다. 무기력한 여성만 이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서 ‘황금의 배’에 탄 초현실적 존재에 의해 구해진다.

    <몸 하나>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설정을 통해 가부장제가 짓누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소설에서 ‘아버지가 부재’한 아이는 ‘불완전한 핏덩어리’로 태어나자 마자 ‘터져’버려 무의 존재가 된다. 현실에서 아비 없이 태어난 이를 ‘호로자식’으로, 비정상적인 아이로 치부되는 현실의 메타포다. 소설은 아버지의 부재를 ‘아이 결손’과 동일시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더불어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는 데 결정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을 지우는 문화에 대한 고발이다.(아이는 남성의 성을 따른다!)

    <차가운 손가락>에서는 ‘직장 그만두고 남편 따라 지방으로 내려간 여자 선생이 결혼 1년 만에 남편 바람 피고, 자살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량인 남편은, 빚 내어 아내를 곤란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학 친구를 사기치고, 바람피는 새 애인에게 빚을 내어 큰 선물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나가 놀다(‘등산 간다’)가 귀신의 저주로 저세상으로 간다. 반면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착하지만 가련하고, 비참하고, 무기력한, 고립된 존재다.

    10편의 단편들에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결합되어 있다. 『저주토끼』는 자본주의적 탐욕, 가부장제, 인간의 근원적 욕망, 민중들의 무관심과 동조, 소외된 자들의 무기력, 고립, 쓸쓸함과 우울한 ‘자아’들로 가득차 있다. 작가가 호러적 장치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호러 그 자체라는 점이다. 평범하고 선량한 인민들에게 그렇다. 비록 작가는 소설 내용을 곧바로 이런 현실과 동일시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초현실적 실재들(귀신, 우화, 주술 등)을 동원하지만 말이다.

    3.

    호러적 리얼리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저주토끼』 읽는 또 다른 재미는 희극적인 요소(코메디)의 적절한 활용이다. 우화나 자전적 단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현실을 다루는 작품들에서는 예외 없이 희극이 등장한다. <몸 하나>에서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은 주인공(main charater)의 맞선 상대를 신문광고를 통해 찾는다. 임신한 여성이 맞선 광고를 낸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더 그렇다. 어떤 남성은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친부라고 폭로하겠다고 협박하고, 또 어떤 돈 많은 늙은이는 자기에게 시집와서 아들을 낳으면 큰 몫을 떼 주겠다고 한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전통적인 주택가에서 주차면을 둘러싸고 어처구니 없는 갈등이 벌어진다. 예전부터 남의 건물 앞에 주차하던 파렴치한 이웃은 새로운 건물 주인이 자신이 사용하던 주차면에 주차했다고 난리를 친다. <머리>에서는, 주인공의 피조물(주인공의 배설물로 만들어진)이 점차 인간의 형상을 띠면서 성체로 되어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날씬한 젊은 여성이 되어 변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라고 부르던 늙은 여인을 변기에 처넣어 죽여버린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멋을 뽐내며 밖으로 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상황은 오싹하지만 웃음은 참을 수 없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 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어보면 메인 캐릭터들은, 스스로는 매우 진지하고, 비판적이고, 이성적이며 심지어 우아한 존재로서 자신을 보이려 하지만 그들이 직면하는 상황은, 그 진지함과 신중함이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어 보이게 한다. 보들레르는 ‘코메디(희극)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중성’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상황의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는 이런 에피소드는 인간 존재의 아포리아(이중성)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독자에게는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마찬가지로 『저주토끼』에서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저주를 받는 상황에서도 희극적 요소가 꾸준히 등장한다. 유머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상황, 맥락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 발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제3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비극적 상황에서 희극적 장치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특징이야말로 정보라 작가의 일관된 글쓰기 특징이다. 『저주토끼』에서 희극 배우들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다. 정보라 작가의 코메디는 호러 세계를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평범한 악’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으로 읽히기도 한다.

    4.

    작가는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왜 고통에 관하여 그렇게 천착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러시아 유토피아 문학들에는 ‘고통에 깊은 관심을 두면서 혁명으로 나아가는 작품’들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의 어떤 대담에서는 자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같은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착취와 억압 속에 고통을 당하는 노동하는 인민들은 점차 체제-구조-권력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집합적 실천을 통해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항하는 집합적 주체들에 관한 서사다. 고리키의 『어머니』,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런 계통의 고전이다. 1980년대, 90년대 쓰여졌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안재성의 『파업』이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가 대표적이다.

    이들 소설에서 투쟁은 승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민중들이 단지 지배자, 억압자에게 착취 당하고 굴종하는 존재만은 아니다. 작품들에서 저항 주체들은 패배할 수 있지만(죽음, 구속, 해고, 분열 등) 그것 또한 역사의 한 과정이다.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은 노동자계급-인민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두고 있다. 비록 일상에서 비겁하고, 분열되고,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특정한 정세들 속에서 구성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선악을 구별하며, 유대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보라의 소설은 이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정보라의 소설에서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 화자이면서 선한 존재다. 그러나 그녀들은 고립되어 있고, 외로우며, 쓸쓸하고, 희망이 없으며, 무기력하다. 민중들은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파렴치한 인간이거나(<몸 하나>, <즐거운 나의 집>) 자식들마저도 약탈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침묵하고 지배자의 억압에 동조한다(<흉터>,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그들은 타자와 소통하고 집합적 선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며 일상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조차 없다. 미래는 그 자체로 어두운 미궁이거나 희망을 가져서는 안되는 세계이다(<재회>).

    세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은 ‘대안적 삶’을 꿈꾸는 자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즐거운 나의 집>의 주인공의 남편은 ‘진보적 한량’이다. 이자는 8~90년대 학생 운동권 생활을 하다가 일자리도 잡지 못했던 필자와 같은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안적 삶을 실천한다는 ‘조직-그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피고용인들에게 제대로 급여도 주지 못하는 곳이다. ‘대안적 삶’을 지향한다는 거창한 구호에 반해 현실은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자기 착취하는 기업이다. 이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조직을 연상시키다. 위대한 대의와 혁명의 수사를 남발하지만 인간적 미, 동료애, 믿음은 없고 권력에 대한 의지와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물든 혁명조직들 말이다.

    그런데 세계는 그 자체로 ‘호러’이고, 민중들은 체제 순응적이며 파렴치한 존재이고, 선한 존재들은 무기력하며, ‘대안적 삶’을 지향하는 자들조차 자기 착취적이라면, 우리들에게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소설 자체만으로 판단하건 데 그런 것은 없다.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은 ‘너무 많은 행복’을 빌지 않으면서 세계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갖지 않되 이 고립되고 고통 받는 세계에서 안착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일상이 ‘호러’인 세계에서 안착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작가는 그조차도 불확실하다고 말한다(<재회>).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고, 체제는 억압적이며, 유대-연대의 형성을 통해 전복의 계기조차 없다면, 도덕적 자아에게 남은 선택은 결단 뿐이다. 비록 세계와의 부딪힘 속에서 내가 패배할지라도 이 모순된 세계와 맞서겠다는 결심 말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적 주체이기보다 실존적 주체의 선택에 가깝다. 실존주의자들은 세계에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홀로 선 개인 주체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존재와 무』에서 샤르트르가 “실존이 존재(의 본질)에 앞선다”고 했을 때 말하고자 했던 바다.

    ‘세월호’ 이후의 참여적 삶(정보라 작가는 세월호 현장에서 유가족과 삶을 함께하며 그들의 투쟁을 기록한다), 2020년 차별금지법 제정에서 보여준 오체투지 참여 등 정보라 작가는 누구보다도 체제에 맞서 참여하는 존재였다. 세계에 대한 어떤 희망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가 어떻게 이렇게 자기 희생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실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를 연상시킨다. 방법과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자아의 완전한 자기 비움을 통해 세계와 맞서는 점에서 말이다. 정보라 작가가 실존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가 하는 필자의 의문이 맞든 그르든 간에, 소설의 비판의식과 일상적 실천이 정보라 작가처럼 완벽하게 조응하는 사례는 드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5.

    2017년 『저주토끼』 초판의 작가 후기와 2023년 4월부터 새롭게 발간된 신판의 작가 후기는 뉘앙스가 달라졌다. 초판에서 작가는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슬은 변화지 않는다”고 했다. 신판에서는 “책 전체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특별한 교훈이나 메시지는 없다. 『저주토끼』는 환상호러 단편집이고, 환상호러 장르는 대중문학에 속하며, 대중문학은 교훈이나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이다.”고 했다. 작품의 사회적 위상이 변하면서 구판과 신판에서의 작가 메시지는 톤을 상당히 달라졌다.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 변화는 대중문학으로 소비되는 장르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혹은 경계 허물기라고 해야 할까? 부커상 최종후보로 선정되면서 『저주토끼』는 자연스럽게 본격문학이 되었고, 그것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집이 되었다.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것은 이를 다시 확증해준다. 이젠 누구도 작품의 위상에 대해 질문할 수 없다. 국내의 유수의 문학상이나 등단 문학 잡지들이 다루기조차 하지 않았던 작품이 세계적인 문학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저주토끼』는 장르문학이 예술성이 없다거나 비평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다는 편견을 날려버린 거다.

    그런 점에서 『저주토끼』는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대조된다. 채식주의자는 이미 국내에서 3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수상 전에도 한강은 여러 작품들이 문학지를 통해 소개된 중견작가이다. 정보라 작가 역시 중견작가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본격 문학’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정보라 작가는 국내 문학계에서는 이단이거나 주변부였지만 영미권에서는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국내 문학계에서는 파란이 될 수 있었다. 현재 국내 문학계가 이 작품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 가와 무관하게 말이다.

    필자는 앞에서 리얼리즘의 핵심은 사회체제나 인간 존재, 부조리한 삶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판’이 있다고만 해서 빼어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의 창조, 소재의 활용 방식, 서사의 구성에서 얼마나 창조적인가가 쟁점이다. 장르는 그런 장치의 일부이다. 장르문학이나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이 질적 구분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이념-사상-가치(혹은 그 무엇이든)를 소설의 양식을 빌어 얼마나 잘 전달되는가가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고맙게도 필자는 『저주토끼』의 질을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커상 최종 후보 및 전미도서상 최종후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질을 판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판에서 작가가 푸근한 마음으로 자기 작품을 즐겁게 읽어달라고 한 것에는 그녀의 ‘비판의식’이 작품을 통해 탁월하게 전달되었다는 ‘안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여하튼 필자에게는 『저주토끼』가 국내 러시아 문학 비평계나 ‘본격 문학’을 다룬 문예지들의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는 점이 가장 유쾌하게 다가온다. 구판과 신판의 작가 메시지의 변화는 그런 점에서 작가의 ‘사후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르문학을 폄하던 자들, 대학에서 가소롭게 권위만 세우며 젠 체하던 인간들에 대한 작가의 ‘우아한 복수’ 말이다.

    *<비판과 비평>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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