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마스의 예정된 패배,
    미-이스라엘 중동질서 재편에 비수
    [국방-안보칼럼] 미국, 중재자 아닌 편파적 심판
        2023년 10월 26일 0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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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7일 이른 아침(현지 시간) 하마스의 공격으로 촉발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중동을 격랑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 개전 초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3년 10월 6일 일어난 아랍은 라마단 전쟁으로, 서구는 욤 키푸르 전쟁으로 부르는 10월 전쟁(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 양상과 비슷하다.

    당시 이집트·시리아군은 라마단 기간 동안 전쟁 준비를 끝내고, 유대인 축제인 욤 키푸르(속죄일) 기간에 이스라엘을 기습했다. 전쟁 개시 다음 날인 7일 이집트군은 경계선 역할을 하던 수에즈 운하를 건너가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 방어선인 바 레브 선을 손쉽게 돌파했고, 시리아군은 골란고원 남부를 신속히 장악했다. 따라서 이번 하마스의 기습은 10월 전쟁의 데자뷰인 셈이다.

    이번 전쟁의 중요한 특징은 아랍은 나크바(대재난), 서구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부르는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영토 전역이 일시적으로 전쟁터가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하마스(이슬람 저항 운동의 약칭)는 이스라엘 베긴·사다트 전략연구센터의 추산으로 3,000여 명에 이르는 민병대를 세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역내에 침투시켜 4일 동안 전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이 같은 팔레스타인 전사들의 대대적인 공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네타냐후 총리가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가 손에 든 지도의 이스라엘 영토에는 팔레스타인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스라엘 극우에게 팔레스타인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AFP).

    하마스는 승산 없는 전쟁을 감행했다. 예컨대 하마스의 미사일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이들이 보유한 카삼 로켓은 발사 이후 거의 3분의 1에 달하는 수량이 불발탄이 되거나 가자 지구 밖을 벗어나지 못할 만큼 조악하다. 베긴·사다트 전략연구센터는 하마스의 미사일 대량 발사가 아이언 돔의 명중률(최대 95%)과 조기경보시스템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빈약한 군사기술로 하마스가 중동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동원령을 선포한 이스라엘에 맞선다는 것은 무모하다. 하마스가 가자지구에서 쫓겨나는 결말로 이번 싸움의 막이 내려가더라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정된 패배를 각오했다.

    분명한 점은 전쟁 결과에 상관없이 하마스는 정치적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하마스는 그동안 잊혔던 팔레스타인 문제를 일거에 전세계의 중대 사안으로 부각시켰다. 또한 하마스의 이번 기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걸프 산유국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려 했던 중동질서 재편 구상에 비수를 꽂은 격이 되었다.

    하마스는 공격의 명분으로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 아크사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거듭된 도발을 내세웠다. 그러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마스의 폭력적 행동의 배경에는 다양한 역사적 요인이 결합돼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National Home)’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1917년 영국의 벨푸어 선언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 팔레스타인의 사실상의 새로운 주인이 된 영국은 효율적인 위임통치를 위해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을 활용한 분열정책을 펼쳤다. 1936년 일어난 팔레스타인 봉기의 실패는 팔레스타인 독립 역량이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결의안 181)은 소수 유대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미 국무부는 소련과 중동 석유수출국들을 자극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미국의 결의안 찬성이 국가 핵심이익을 위협할 것이라는 반대 의견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시했지만 이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모두 점령했다. 소련은 이스라엘의 성장을 중동 내 서구 영향력의 강화로 받아들여 아랍 국가들을 지원했고, 미국도 냉전논리에 입각해서 중동정책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25일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1969년에 취임한 미국 닉슨 대통령과 1969년에 취임한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총리가 만났다. 미국·이스라엘 밀월의 공식화이다. 이스라엘 언론 하레츠는 닉슨을 가리켜 “이스라엘인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구한 반유대주의자”라고 평했다(닉슨재단).

    1970년 9월 요르단 내전, 이른바 검은 9월이 일어났다. 6일 전쟁 이후 요르단으로 거점을 옮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대한 요르단 내 지지세가 늘어나면서 왕정과 충돌하자 베트남 전쟁으로 여력이 없었던 미국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활용해 아랍 민족주의의 확산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의도대로 요르단의 제공권을 장악함으로써 시리아의 추가 군사력 투입을 막았고, 요르단은 이스라엘의 엄호 아래 PLO를 축출했다.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 위기는 중동 전역에 파장을 끼쳤으며,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중동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다. 이 지점에서 6일 전쟁 이후 중동 문제에 본격 개입을 시작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분쟁이 격화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임을 왜 미국에 묻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지역 패권국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 패권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각 지역에서 일어난 위기를 수습하고 해결해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스티븐 월트는 가자 전쟁에 대한 최근 칼럼에서 탈냉전 이후 지난 30여 년간 미국은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않고 반창고에 의존하는 해법으로 중동 문제라는 상처를 키워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그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은 1993년 9월 체결된 오슬로 협정으로 자치권을 획득했다. 이 결과에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지배받고 있다는 현실을 일단 수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에 따라 평화프로세스가 담겨 있지 않은 오슬로 협정은 향후 협상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고착화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가 이 협정을 가리켜 ‘팔레스타인 항복의 도구’, ‘팔레스타인 베르사이유조약’으로, 협정의 당사자인 PLO를 ‘이스라엘의 집행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격렬히 비판한 것은 이스라엘의 점령구조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안지구는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이후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어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은 마치 조각보처럼 여기저기 고립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사회기반은 이스라엘의 점령계획으로 파괴되어, 자치정부는 이스라엘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94년 체결된 가자·예리코 협정의 일부인 파리 의정서에 의해 자치정부의 외부 경계선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며, 관세동맹 채택으로 팔레스타인 경제는 이스라엘 경제에 통합되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를 공식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부른다. 우파가 선호하는 용어이고, 좌파는 서안지구를 선호한다.)

    이스라엘 언론인인 메론 라포포트는 자치정부의 주요 세원인 수입관세를 이스라엘이 징수하여 매달 자치정부 계좌에 이체하는 현실을 가리켜 이스라엘 재무장관이 사실상의 자치정부 지배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협상 자체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오슬로 협정이 부여한 명목상의 팔레스타인 자치권마저 무력화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이익이며, 이스라엘이 유대인만의 국가로 남길 바라는 국민정서에도 부합한다.

    하마스는 6일 전쟁 이후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계가 주축이 된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을 집중 탄압하면서 가자지구에서 부상한 이슬람 정치조직이다. 이스라엘은 PLO의 주축인 세속주의 세력에 대한 맞균형 수단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을 용인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게 결코 해롭기만한 존재는 아니다. 현재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가지지구에서 하마스를 제거한다거나 비무장화하는 것이 과연 이스라엘의 진정한 이익인지는 불분명하다.

    10월 24일 윤석열 대통령이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와 단독 환담을 가졌다. 빈 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스라엘과와의 관계 정상화 추진을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보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마스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관철된 셈이다. 왕세자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2002년 수립된 아랍 평화 이니셔티브의 지지자로서 팔레스타인 문제만큼은 아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정도로 강경하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일소함으로써 가자지구가 국제적 정당성을 갖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 자치정부의 힘이 강화되고 팔레스타인이 통합되는 것은 이스라엘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지금처럼 자치정부를 주도하는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관계가 계속 이어져 팔레스타인의 분열이 지속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된다. 하마스가 이슬람주의와 테러리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에게는 팔레스타인을 악마화하고, 팔레스타인에 책임을 전가하고, 서구 사회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 하마스만한 매력적인 장난감은 없다.

    예루살렘 전략안보연구소장인 에프라인 인바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파괴하려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을 저해하는 ‘편리한 적’이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해 다른 정치인들도 여러 차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하마스에 대한 승리가 꼭 이스라엘의 국가이익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에프라인 인바에 따르면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전략적 골칫거리’일 뿐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야말로 하마스보다 이스라엘에 더 큰 위협이다. 시민단체인 이란계 미국인 위원회의 공동 창립자인 트리타 파르시는 1991년 걸프전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공동의 적이었던 이라크가 쇠퇴하면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만일 레바논 남부에 이어 시리아에까지 미사일 기지들이 줄줄이 세워져 마치 불의 고리처럼 이스라엘을 둘러싸게 되고, 여기에 이란 미사일까지 가세한다면 이스라엘에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이스라엘의 주기적인 시리아 폭격은 이 같은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마스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분파로써 그 이념은 팔레스타인 수니파 이슬람주의이고, 헤즈볼라의 이념은 이란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사상을 받아들인 레바논 시아파 이슬람주의이다. 중동 분쟁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수니·시아의 갈등이라고 볼 때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협력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현실과 관련이 깊다. 하마스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헤즈볼라는 하마스의 존재로 인해 이스라엘의 전면공세를 억제할 수 있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하마스·헤즈볼라와의 양면전쟁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하마스가 제거된다면,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더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미국은 마드리드회의와 오슬로협정 등 탈냉전 이후 중동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에 이란과 하마스 등을 배제함으로써, 이들은 미국 주도의 중동 질서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왔다. 특히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결과인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으로 이란의 중동 영향력은 더한층 강화되었다.

    오슬로 협정의 체결로 PLO가 이스라엘을 승인한 이상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교류에 더는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불협화음을 겪고, 수혜국인 우크라이나가 지원을 당연시하는 오만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것처럼 아랍 국가들도 팔레스타인을 부담스러워하고 껄끄러워한다. 2011년 아랍의 봄을 계기로 아랍 권위주의 국가들은 정권의 기반을 흔드는 도전을 받았으며 이후 체제 안정은 이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다. 이들 국가는 국방부문 강화에 주력함으로써 한국 무기산업 해외 진출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아랍 권위주의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독립이나 자치권 확대가 자국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아랍 집권층은 더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같은 현실을 집대성한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아브라함 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존의 ‘선 팔레스타인 평화, 후 중동 평화’라는 해결 방식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협정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화해를 내걸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계속 점령한 상태에서도 아랍 국가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에 대단히 유리하며 팔레스타인과 시아파 전체를 배제하고 있다. 이 같은 질서 재편의 정점에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정상화 구상이 있다.

    지난 1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아브라함 협정의 당사국 중 하나인 아랍에미리트 순방 도중 “UAE의 적이 이란”이라고 한 문제의 발언은 아브라함 협정의 또다른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미국이 이란핵협정(JCPOA)에서 탈퇴한 후의 대안으로 추진한 아브라함 협정은 아랍의 적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이며,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아랍의 친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아브라함 협정은 반이란 군사동맹이자 안보협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도 이란의 핵개발은 묵과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아랍의 안보, 특히 권위주의 국가의 체제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이다.

    위 카툰은 2014년 8월 가자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그려졌다. (Orange County Register)

    지난 9월 22일 유엔총회에서 행한 네타냐후 총리의 연설에 이 같은 진실이 담겨 있다. 팔레스타인을 부정하고 새로운 중동 질서 수립을 주장하는 이 연설이 아마도 하마스가 전대미문의 공세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면서, 아랍 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정책은 양립할 수 없는 현안이다. 이를 한반도 문제에 적용한다면, 비핵화는 하지 않고 평화협정만 체결하자거나, 정전협정은 그대로 두고 비핵화만 하자는 것과 같은데, 이는 모두 실현 불가능한 전략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티븐 월트는 이번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모두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이스라엘과 고통을 나누고 있음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미국은 인도주의를 외치면서도 전쟁을 지지하고, 정전을 말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미국이 중재자가 아니라 편파 판정을 일삼는 심판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로버트 쿠트너는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외교를 현재 험난한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것에 비유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이어 중동에서마저 늪에 빠져드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 <국방칼럼>연재 링크

    필자소개
    국방안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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