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유주의 파시즘 현상
    [L/A칼럼] 구분과 차별, 배제의 정치
        2023년 09월 26일 11: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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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사회적 파시즘이란 용어를 꺼냈지만 자세히 설명을 한 것 같지 않다. 현재 우리 모두 참으로 답답하고 두려운 것이 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어떤 총체적 위기가 오고 있는 것 같은데 현 정부 여당은 이상한 이념전쟁을 내세워 폭력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사회적 인식 이 있다. 아마 그 이유는 겉으로 그렇게 중요해보이지 않는 어떤 선택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선택이 아주 중요한 국민적 뿌리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예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바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제거 이슈다. 한미일의 국민적 뿌리는 같을 수가 없다. 왜냐면 후자의 두 나라는 적어도 과거에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파시즘은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 파시즘이다. 과거에 히틀러 등이 국가를 내세워 실시한 파시즘과 다르다.

    이런 언급을 하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항상 지식인들이 정치세력을 돕는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를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해 하이에크, 프리드만 등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관련 정책 추진을 도왔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이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을 자세히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 히틀러의 경우에도 유전학, 우생학의 학자들이 인간을 우월한 자/열등한 자로 나누고 구분하는 논리를 개발한 것이 나치즘을 탄탄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자, 사회학자들이 1990년대 초부터 주장한 탈식민성 담론의 핵심은 우리 모두 존경하는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기까지 근대 서구 철학(근대성)의 뿌리가 인간을 이성을 기준으로 해서 이성적 문명인/비이성적 야만인으로 구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엔리케 두셀(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현재 멕시코의 모 대학의 교수임)에 의하면 그리스인들(플라톤도 이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가짐)은 도시 안의 문명인/도시 외곽의 야만인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을 구분하는 습성이 산투스 교수에 의하면 프랑크푸르트학파에게까지 이어져 현재 서구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슬프게도 출구가 없다고 한다. 물론 상당수 서구학자들은 산투스 교수와 달리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런 나누고 구분하는 시각의 예를 들자면 어느 극우 신자유주의 학자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겨우 생존할 정도로 굶주리기 직전의 상황에 몰아넣어야만 두려움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억울하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우리처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얘기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필자가 산투스 교수를 자주 인용하는 이유는 그의 주장 중에 서구의 헤게모니는 기독교를 뿌리로 해서 약 5세기부터 즉, 현재까지 천 오백년 이상 되었고 핵심적 사건으로 약 천 년 전의 십자군전쟁을 언급하는 점, 그리고 유럽의 백인 남성을 은연중에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인종(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인종)에 비해 우월한 듯이(특히 유럽언어를 모르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인종적 편견을 마치 해가 뜨면 날이 밝아지는 자연계의 상식처럼 일반대중이 받아들이게 만든 오랜 지식, 인식적 힘을 지적하는 것에 그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산투스 교수 자신이 페루의 사회학자인 아니발 끼하노의 주장(그의 주장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성 담론이 시작됨)을 잘 이해하면서도 현재 글로벌하게 좌파적 관점의 헤게모니를 가진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콜로니얼즘을 강조하면서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재의 서구-기독교-유럽의 헤게모니는 절대로 만만하지 않아 점진적 개혁을 하면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긴 대화를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과거의 국가파시즘이나 현재의(정확히는 약 40여년 전부터) 신자유주의 파시즘(사회적 파시즘)이나 모두 이런 지적, 인식론적 차별 또는 구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서구에서 만들었다는 맥락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분명하다. 과거의 파시즘은 국가가 직접 나섰다면 현재의 파시즘은 그 주체가 미디어이고 일반사회가 소비주의를 통해 이에 동조하고 있다는 차이다. 따라서 개혁이 쉽지 않다. 파시즘이란 용어의 맥락은 현재 사회적 파시즘이나 또는 신자유주의 파시즘이나 과거의 히틀러 파시즘의 인종차별, 학살 못지않게 야만적이라는 의미다.

    예를 든다면 우리 사회처럼 기업가와 노동자 사이에 노동계약만 존재하고 제대로 된 노동법이 없다면(현재의 노란봉투법, 노동법 2,3조 개정 등) 그 상황은 야만적이고 파시즘적이다. 산투스 교수는 바로 이 사례로 2000년의 볼리비아 물 전쟁을 제기하고 있다. 아무튼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벌써 1997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때문에 우리 사회는 이상한 방향(경제 제일주의, 돈 최고주의)으로 더 흘러갔다. 지금 우리가 매우 심각한 것은 다른 모든 부분이 망가져도 경제는 괜찮았는데 현재는 이것도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언론에서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잘 쓰고 있지 않다. IMF 당시 진보를 내세운 민주당 정부는 김대중 정부였고 위기를 비교적 빨리 벗어났다. 이 정부는 잘한 일이 많지만 민주화와 동시에 금융(자본)시장 개방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전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것은 어느 사회든지 가장 아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아예 배제(호모 사케르)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는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이에 해당했다. 이에 따른 논리적 귀결로 정치권의 진보, 보수 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 이런 현상은 자유주의 정부에서 더 뚜렷한데 우리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은 특히 상층 중간계급의 행복과 이익에 맞춘다. 그래서 금융을 통한 부동산 떠받치기 정책(지대추구)을 선호하고 시행한다. 전임 문재인 정부도 경제 지형을 진보적으로 바꾸어보겠다는 의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가장 중요한 부동산 정책에서는 정직하지도 못했고 무능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집권 초기에 경제정책의 흐름을 신자유주의 파시즘을 깨트리는 정책 방향(예를 들어, 중대재해처벌법, 노란봉투법 등)을 신속하게 추진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집권했을 때 못한 것(하지 않은 것)을 야당이 되어서서 보수 정부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80년대 초반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다. 특이한 것은 가난한 대중(주로 여성들)이 조합(칠레와 페루에서 각각 국그릇공동체, 우유 잔 위원회 등)을 만들어 자신들보다 어려운 이웃과 연대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세계적으로 유력한 사회학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유럽과 다른 점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8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이에 항의하는 실천이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1979년 초에 페루의 리마에서 저소득층 약 50명의 여성들의 그룹에 의해 시작되어 1982년까지 이런 조직이 약 1,500개 이상이 생겨났고 약 6500개 이상의 우유 잔 위원회가 생겼다. 칠레의 산티아고에서도 국그릇 공동체가 도시 변두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여성들에 의한 협동조직으로 만들어졌다. 피노체트 체제의 극단적인 정책 하에서 더욱 늘어났다. 1982년에 산티아고에 34개의 국그릇공동체가 생겨났다.”(헨리 벨트마이어 & 제임스 페트라스 2012,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전망], pp. 195-196).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경험으로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살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 여당의 체계적 반동 또는 퇴행에 대한 항의와 저항도 과거에 하듯이 일부 엘리트 지식인들이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파시즘 성격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사회적 변화 때문이다.

    하나는 볼리비아에서 2000년에 일어난 물 전쟁이 상징적인데 이 전쟁은 정부의 물 민영화로 수혜를 받은 다국적 기업이 갑자기 물값을 올려 서민 대중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 ‘야만적’인 물 전쟁을 산투스 교수는 사회적 파시즘의 사례로 들었다. 한편, 안토니오 네그리는 물 전쟁을 그의 독창적 이론인 다중, 공통체의 대안 근대성의 사례로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노동자를 정규직/비정규직 하청으로 분리시킨 것을 사회적(신자유주의) 파시즘의 사례로 들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민영화 추진은 매우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잠재적으로 야만성에 대한 투쟁 또는 저항이 장난이 아닌 것을 기득권계급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채 소비주의(이를 주도하는 것은 중산층과 젊은이들이다)에 빠져 들어가는 사회를 가리켜 산투스 교수가 신자유주의 파시즘으로 부른다. 우리 사회는 둘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더 비극적이다. 라틴아메리카는 후자는 약하다.

    필자소개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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