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도의 ‘신행’, 왜 잘못된 제목일까?
    [컬렉터의 서재] 조선시대 혼인풍습, 친영례와 신행
        2023년 09월 20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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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는 용어들 중 의외로 역사적 유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몽골에서 온 말들도 섞여 있다. 고려시대 100년 가까이 몽골(원나라)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처럼 사람을 지칭할 때 붙이는 ‘치’라는 접미사가 대표적이다. 샅바를 붙잡고 하는 씨름도 몽골어 ‘Ссирѳм(씨룸)’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단순히 발음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경기의 규칙 등도 우리의 씨름과 유사하다.

    혼인과 관련된 용어와 풍습 중에도 몽골에서 유래한 것들이 적지 않다. 혼인할 때 신부가 머리에 쓰는 족두리, 얼굴에 찍는 연지, 곤지가 그렇다. 그런데 혼인한 상대방 집의 부모들을 서로 부르는 말인 ‘사돈(査頓)’이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물론 항간에는 이 말이 윤관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다.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고려시대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은 1107년 여진 정벌 당시 각각 도원수와 부원수로서 활동하였다. 그 후 그들은 서로의 자녀를 결혼까지 시켰는데, 자주 만나 술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회포를 풀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오연총 생각이 나서 술동이를 하인에게 지게 하고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지난 밤 비로 인해 냇물이 불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오연총도 윤관과 함께 술을 마시려고 술과 함께 개울 저 편에 와 있었다. 이에 윤관은 오연총에게 “서로가 가져온 술을 상대가 가져온 술이라 생각하고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둘은 개울을 마주하고 나뭇등걸(‘査’; 그루터기, 나뭇등걸 사)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頓’; 머리숙일 돈) ‘한 잔 하시오’하면서 자작하며 술을 마셨다. ‘서로 나뭇등걸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의 한자어 ‘사돈(査頓)’은 여기서 생겼는데, 이후 이 일이 조정 고관들에게 알려지면서 서로 자녀를 혼인시키는 것을 ‘사돈 맺기’ 즉 ‘나뭇등걸에 앉아 서로 머리를 숙여가며 술을 권하고 마시는 사이 맺기’라는 말로 점차 회자되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야사보다 몽골에서 왔다는 설명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몽골어로 ‘사돈(xaдam)’은 일가 친척을 의미하는 말로,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됨으로써 고려는 몽골과 사돈을 맺었다. 그러므로 사돈의 한자 표기는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는 몽골어를 단순히 음차한 것이다. 윤관의 일화는 사돈이라는 한자의 뜻에 맞추어 훗날 사람들이 언어 유희로 지어낸 일화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윤관과 오연총 집안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을 것이다.

    이번 글은 전통 혼례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족두리, 연지, 곤지, 사돈처럼 혼인 풍습이나 용어는 어느 특정 시대의 소산물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고 또 새로 가미되고 변형되면서 우리가 아는 모습을 갖추어 왔다. 우리 시대 혼인 풍습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고정불변의 문화는 없다. 이런 변화의 관점으로 혼인 풍습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의 한 사례가 김홍도의 풍속화 ‘신행(新行)’이다.

    김홍도의 ‘신행’과 엘리자베스 키스의 ‘결혼 행렬’

    15여년 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국정 국사 교과서에 ‘신행’이라는 제목으로 김홍도의 풍속화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그림은 조선후기 사회사를 서술하는 부분에 들어간 도판이었다. 그런데 이는 명백히 제목을 잘못 붙인 것이다. 이는 옛 혼인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교과서가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다. 국사 교과서만 그런 게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이 그림의 공식 제목도 ‘신행’으로 소개되어있다. 김홍도는 자신의 풍속화에 별도로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뒷사람들이 제목을 잘못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간다’ 혹은 ‘처음 간다’는 뜻을 가진 신행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그림에 붙은 신행이라는 제목이 잘못되었는지 독자들께서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사진] 왼쪽은 국정교과서로 사용된 2009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이고, 오른쪽은 이 책의 223페이지에 실린 김홍도의 풍속화로 그림 아래에 ‘신행’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그림 제목이 왜 잘못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 혼례에 대한 개략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옛 혼인 풍습을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시대 이전 우리나라 혼인 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처가살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혹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 한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풍습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구려의 서옥제에서도 그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귀여가혼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바로 신부집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신랑이 장인 장모의 집, 즉 장가(杖家)에 가서 사는 것이니 ‘장가간다’, ‘장가든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성리학 국가를 표방한 조선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이것은 좋은 풍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리학적 예법을 규정한 『주자가례』에서는 남성 중심의 혼인 예법을 올바른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신랑이 ‘친영(親迎;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는다는 뜻)’이라고 하여 신부를 직접 신부집에 가서 맞이해와서,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른 후 신부가 바로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친영례, 혹은 친영제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와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바로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주자가례』의 가르침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바로 처가살이를 하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점이었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은 건국 초부터 친영을 권장했다. 태종은 특히 이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의 이런 의지가 자주 엿보인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이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준수하는데, 유독 혼례만은 오히려 구습을 따르니 심히 편하지 않다. 마땅히 고금을 참착하여 제도를 정하도록 하라. – 『태종실록』 14년 10월 18일

    태종은 사대부의 혼인을 모두 친영례를 따르도록 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죄’로 처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백년 내려온 습속을 금방 바꿀 수는 없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태종을 이은 세종은 왕실로부터 솔선수범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그 아래로까지 범위를 확대해가는 방침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친영례(親迎禮)가 세종 17년인 1435년 거행되었는데, 이때 윤평이란 이가 태종의 13녀인 숙신옹주를 친영하였다. 그러나 이런 왕실의 솔선수범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고유 풍습과 배치되는 친영제도는 민간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6세기 명종 연간에 중국식 친영제도와 고유의 풍습이 반쯤 절충된 ‘반친영(半親迎)’이 권장되기 시작했다. 반친영은 다음과 같은 절차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먼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신부집으로 간다. 이건 『주자가례』에서 규정한 것이므로 중국식이다. 그런데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른다. 이건 우리식이다. 혼례를 치른 신랑은 3일간 신부집에서 머문다. 이건 평생 처가살이할 것을 3일간 압축해서 한다는 개념이므로 우리식이다. 그후 신랑은 신부를 대동하여 신랑집(신부입장에서는 시집)으로 첫 행차를 하게 되는데, 이를 ‘신행(新行) 혹은 ‘우귀(于歸)’라고 한다. 혼일 치른 후 3일 후에 간다고 하여 이를 ‘삼일신행’ 혹은 ‘삼일우귀’라고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혼례를 치른 이튿날 신랑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고, 시댁이 가까운 경우에는 ‘당일우귀’라 하여 혼례를 치른 후 바로 시댁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혼례 후 시댁 가는 것은 꼭 정해진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혼례를 거행한 달을 넘기고 가는 달묵이가 있는가 하면, 해를넘기는 ‘해묵이’도 드물지 않게 존재했다. 심지어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정에서 묵다가 신행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절차로 행해진 조선시대 반친영은 우리 전통의 혼인풍습과 중국식 친영이 절충된 것이었다. 신부집에서 혼례를 거행함으로써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아와 혼례를 치른다는 친영례 본래의 정신에 어긋나는데도 ‘반친영’이라고 명명한 것은 친영혼의 절차 일부를 받아들여 남귀여가혼의 절차를 변용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비록 혼례는 신부집에서 행하지만 3일 후 (혹은 다음날) 신부를 대동하고 신랑집으로 돌아와 시부모를 뵙는다는 점에서 ‘친영’ 요소가 대폭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어쨌든 친영례였기 때문에 이름에 친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런 ‘조선식 친영제도’인 반친영제도에 따르면 신행은 혼례를 치른 후 신부가 처음으로 신랑집(시댁)으로 가는 행차를 말한다. 이렇게 신행으로 시집에 처음 온 신부는 현구고례(見舅姑禮)라고 하여 시부모에게 첫 인사를 올린 후 그 혹독하다는 시집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다시 정리해보자. 조선시대 일반적으로 통용된 반친영례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간다 →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른다 → 신랑이 신부집에서 3일간 (혹은 하루) 머문다 → 신부가 신랑집, 즉 시댁으로 간다(신행) → 신부가 시부모에게 첫 인사를 올리고 시집살이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신행’이라는 제목의 김홍도 풍속화를 살펴보자. 그러면 이 제목 때문에 신랑의 운명이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신행’이란 제목이 붙어있는 김홍도 풍속화, 오른쪽은 신랑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목대로 해석하자면 이 그림은 혼례 후 며칠간 신부집에서 머물던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신부입장에서는 시집)으로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제목이 ‘신행’이라면 새신랑 뒤에 장옷을 덮어쓴 채 말을 타고 따르는 여인이 신부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저 여인이 과연 갓 결혼한 신부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첫째. 신부가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이상하다. 신행할 때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부가 탄 가마 안에는 요를 깔고, 요강과 짚방석을 넣었다. 짚방석 아래에는 ‘목화씨’, ‘찹쌀’, ‘고추’ ,’숯’, ‘종이조각’, ‘헝겊조각’ 등을 놓기도 했다. 이렇게 가마 타고 시댁에 가야 하는 새 신부에게 말을 태워서야 되겠는가.

    둘째. 신부의 얼굴을 보면 나이가 족히 40-50대로 보인다. 앞에 가는 신랑이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의 앳된 청년인 것과 크게 대비가 된다. 게다가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민 모습이어야 하는데, 그림 속 신부는 아무런 장식과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 탄 저 여성을 신부로 볼 수 없으므로, 이 그림 역시 신행을 그린 그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일까?

    이 그림은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집으로 향하는 신랑 행렬을 그린 것이다. 좀 더 어려운 표현으로 하자면 초례를 위해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는 길이다. 초례(醮禮)란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마주하여 절하고(교배례), 서로 합환주를 마시는(합근례) 혼례의식을 말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그래서 ‘초례를 올리러 가는 신랑 행렬’이어야 한다. 제목이 길다면 ‘신랑의 초행(醮行)’도 좋겠다.

    이제 ‘신랑의 초행’이라는 제목으로 김홍도 풍속화를 다시 살펴보자.

    산모퉁이를 급하게 꺾어 가는 행렬이 보인다. 제일 앞서가는 것은 청사초롱이다. 청사초롱은 관리들이 밤나들이에 썼으나 평민들의 결혼식에 쓰이기도 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길을 떠난 신랑 행렬은 오후 늦게나 밤에 신부집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런 청사초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뒤를 따르는 이는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두 손에 쥐고 있는 기럭아범(기럭아비)이다. 기러기는 한번 짝이 정해지면 평생을 함께하고 짝을 잃게 되면 혼자 살기 때문에 기러기처럼 평생을 사랑하고 다복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혼례에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 기럭아범이 가져간 기러기를 신랑이 신부 부모에게 드리는 의식을 전안례(奠雁禮)하는데, 혼례의 첫 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신부 어머니가 기러기를 받으나 지역마다 차이가 나타난다. 조선 초기에는 진짜 살아있는 기러기를 사용했을 것이나 구하기 어려워 나무로 깎은 기러기, 즉 목안(木雁)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목안은 이후 결혼식에서도 사용되는데 목안을 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신랑 신부가 평생을 금실 좋게 살기를 다짐하며 서로 맞절을 했던 것이다.

    [사진] 왼쪽은 김홍도 풍속화 중 청사초롱 든 인물들과 기럭아범 부분, 오른쪽은 전통혼례에 사용된 나무 기러기로 흔히 ‘목안(木雁)’이라고 불렀다.

    기럭아범 뒤에는 2명의 견마잡이가 끄는 백마를 탄 신랑이 있는데, 백마는 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신랑 뒤에 말을 타고 따라 오는 장옷 쓴 여인은 정체는 무엇일까? 가마를 타지 않은 점, 나이가 무척 많은 점으로 미루어 장옷 쓴 여인은 중매쟁이 아니면 신랑의 유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둘도 아니라면 신랑집에서 혼례를 도와주러 딸려 보낸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흔히 신랑의 혼례 행렬에는 신랑 집안을 대표하는 어른들도 일부 동행하기도 했는데, 이 그림에서는 행렬의 뒤가 잘렸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이 그림이 혼례를 하러 가는 신랑의 행차인데도, 섣불리 제목을 ‘신행’이라고 붙이는 바람에 젊은 신랑의 운명은 크게 요동치게 되었다. 저 중매쟁이 (혹은 유모) 아줌마가 한순간에 새신랑의 신부로 탈바꿈해버리게 되었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중매쟁이 아줌마를 신부로 삼아 신랑집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막장 드라마를 찍게 되었으니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할까? 제목 하나 붙이는 것이 이렇게 무겁고도 무서운 일이다.

    김홍도 그림과 좋은 비교 대상이 되는 그림이 하나 있다.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1921년 그린 ‘Marriage Procession’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결혼 행렬’로 번역할 수 있겠다. 그림을 보자. 저 멀리 산을 등지고 있는 동대문이 보인다. 그 앞으로 화가가 ‘스케치를 하며 정신없이 신부 행렬을 쫓아가다 물에 빠졌다’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청계천 양옆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청계천 돌다리를 막 건너고 있는 행렬을 구경하고 있다. 저 멀리 산과 오른쪽으로 보이는 초가집, 청계천에 남아있는 잔설을 통해 이 때가 겨울임을 말해 주고 있다. 차가운 물가에 앉아 호호 손을 불며 빨래하는 아낙도 무심히 고개를 들어 결혼 행렬을 올려다보고 있다. 오래 전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진]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Marriage Procession’ (1921)

    행렬 앞에는 말을 탄 신랑을 위한 일산(日傘)이 보이지만, 신랑의 모습은 어딘가에 가려서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뒤로 신부가 탄 가마가 따르고 있다. 가마 위에는 ‘호피’가 덮여있는데, 이는 액을 막고 잡귀가 덤벼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신부가 탄 가마에 씌우던 것이다. 호피가 귀했기 때문에 호랑이를 그린 담요가 호피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 행렬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다르다. 즉 신랑이 혼례를 올리러 신부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 날에는 신랑이 혼자 사모관대에 말을 타고 일산을 받으며 신부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신랑이 신부가 탄 가마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혼례를 치른 후 삼일 후 (혹은 다음날) 신랑집으로 가는 신행 행렬이었음을 의미한다. 흔히 신행 때 신부가 혼수를 가져갔으니, 뒤따르는 일행이 가지고 가는 짐보따리가 혼수품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비록 ‘Marriage Procession’이라는 영어 제목을 붙이고 있지만, 우리 말로 제목을 붙인다면 ‘신행’으로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사진] 조선후기 기산 김준근이 신행을 그린 풍속화이다. 김준근은 신행이라는 제목 대신 ‘시집가는 모양’이라고 제목을 썼다. 신부를 태운 가마 사인교의 지붕에는 액을 막기 위해 호피를 덮었다. 가마 앞뒤로 혼수품을 나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신행’일 수 없는 이유는 신행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신부를 태운 가마가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행가(新行歌)

    남녀가 결혼할 때 각각 쓰는 ‘장가간다’와 ‘시집간다’는 말은 참 재미있는 말이다. 두 말은 역사적 배경을 전혀 달리하는 말이다. ‘장가간다’는 말은 남자가 처가살이하던 남귀여가혼의 역사가 담긴 말이고, ‘시집간다’는 말은 조선후기 정착된 친영제도(실제로는 반친영제도)의 역사가 담긴 말이다. 이렇게 배경을 달리하는 말이 지금 동시대에 같이 남아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원칙적으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랑이 장가(처가집)로, 신부가 시집(신랑집)으로 교차로 가버리면 두 신혼 부부는 같이 부부생활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의 혼인 풍습은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살던 것에서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조선 중기를 거치며 조선 후기에 보편화되었다. 이런 변화는 딸 가진 부모와 딸이 생이별을 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딸을 가진 친정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이전 남귀여가혼에서는 딸은 결혼을 하기 전이나 후에도 큰 변함없이 하나의 가족으로 같이 살았다. 사위가 새 식구로 들어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친정 부모들은 나중에 자신들을 딸과 사위가 부양해줄 것이기 때문에 관계는 더더욱 돈독할 수 밖에 없었다. 15세기 편찬된 『고려사』의 기록이다.

    고려 풍속으로 보면 남자는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아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여자의 임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딸을 낳으면 애지중지하여 이를 키워서 밤낮으로 그가 장성하기를 바라니 그것은 딸이 부모를 부양해주기 때문이다. -『고려사』

    그러나 딸이 결혼과 함께 시집으로 가는 상황에서는 딸은 이제 친정 식구가 아니었다. 물론 결혼 후에 딸이 친정으로 다니러 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딸은 점차 출가외인으로 인식되었다. 딸이 출가외인이 되는 과정과 함께 사위와 처가의 끈끈했던 관계도 점차 느슨해져 갔다. 원래 남귀여가혼일 때는 처가와 사위의 관계는 매우 끈끈하였다. 15세기 성종 때의 기록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이 친영하는 예가 없으므로 처가를 내집으로 삼아 처의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처의 어미를 어미라고 부르며 평소 부모의 일로 여기니……[성종실록]

    그러나 풍습의 변화와 함께 처가살이를 비하하는 속담도 새로 만들어져 점차 퍼져 나갔다.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 “뒷간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

    처가살이는 이제 청산의 대상이 된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대는 변했다. 친정 부모는 결혼과 함께 자신의 딸과 이별해야만 했다. 친영제도 (실제로는 반친영제도)가 정착되면서 시집가는 딸들은 이제 죽어서도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윤리 도덕관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새로운 혼인제도와 함께 등장한 것이 ‘신행가’라는 가사 문학 작품들이다. 신행은 부모 형제와의 가슴 아픈 이별과 함께 시집살이의 시작을 의미한다. 신행가는 친정 부모가 딸이 신행을 가기 전에 당부하는 내용의 글을 적어 신행하는 딸의 가마에 넣어준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부가 부모 및 형제들과 헤어지는 슬픔을 표현한 것도 있다. 따라서 신행가에는 친정 부모의 딸에 대한 당부, 부모 및 동기간과의 이별의 한과 서러운 시집살이를 예고하는 아녀자의 심사, 시집살이에 대한 다짐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신행가는 대체로 긴 두루마리 형태로 작성했는데, 모두 한글을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친영제도가 조선후기 정착되었으므로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조선후기 이후의 것으로 보면 된다.

    [사진] ‘아희야 들어봐라’로 시작하는 조선후기 신행가이다. 친정어머니가 신행가는 딸에게 써 준 것으로 보인다. 세로 23cm, 가로 290cm의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되었다. 작자와 지역 미상이다. (박건호 소장)

    컬렉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신행가를 수집하여 현재 4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 신행가들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두 점의 신행가는 따로 제목을 신행가로 하지는 않았다. 한 점은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았고, 한 점의 제목은 전별가로 되어 있다. 이 두 점의 신행가는 친정 어머니가 시집으로 떠나는 딸에게 이별의 심정을 표하면서, 시댁의 풍속을 잘 따라야 한다는 계녀(戒女)의 내용을 담았다. 두 점의 신행가는 각각 이렇게 시작한다.

    “아희야 들어봐라. 내일이 신행이라 친정을 하직하고 시가로 들어갈제 네마음 어떠하며 내 심사 갈 바 없다.”

    “유실(유씨집안에 시집가는 딸)아 들어봐라. 오늘은 신행이라 친가를 하직하고 시댁으로 들어가니…”

    세 번째 신행가는 다소 특이한데 친정 부모 대신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써 준 신행가이다. 다른 신행가와 달리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당부하는 내용이다.

    “류실 살피어라. 이십여년 키웠든 나의 손녀 동익이를 명문 귀족 류씨가문에 월노연(?)을 마지하여 원앙 봉황 좋은 배필 우리 예를 마치오니 연연한 나의 심사 금할 길 바이 없어 두어자 경계 넣어 보내오니 허술하게 보지말고 명심하여 잊지마라.” 이렇게 시작된 할아버지의 신행가 끝에는 “두서 없이 횡설수설 괴이하기 그지없다. 너 혼자 고이보고 부디 찢어 버리거라. 명문대촌 안목 앞에 무식하다 말이 나면 내 낭패는 고사하고 너의 수치 오죽하랴. 남의 눈에 안띄도록 혼자보고 불태워라”며 글을 없앨 것을 두 번이나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손녀 동익이는 이 글을 차마 없애지 못했고, 지금 이 글은 컬렉터의 소장품이 되었다.

    네 번째 소장품은 위의 세 신행가와 형식을 달리한다. 글쓴이가 친정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신행을 떠나는 신부가 친정 식구들 또는 동무들과 헤어지는 심사를 적은 글이다. 시댁으로 떠나는 신부의 심정을 직접 적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런데 가사를 읽어보면 화자의 시점이 여럿이라 이 신행가를 신부가 썼다고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가사 앞부분에 ‘신행갈 일 생각하니 적막하기 짝이없다 / 친가일 생각하니 도무지 가기싫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내 어데로 가잔말가’라든가 ‘부모님 슬퍼하야 나를 위로하는 말이 /설워마라 설워마라 여자일생 예사로다 /조이가서 잘 있거라. 내 수이 다녀오마 / 너를 훌처보낸 후에 앞이 막혀 어찌할고 / 이 말씀 들은 후에 나의 마음 어떠하리’라는 부분에서는 주어가 신부인 ‘나’로 되어있다. 그러나 또 어떤 곳에서는 신부의 동무가 쓴 듯한 표현들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글의 앞부분에서 ‘신행날 받아오며 너의 마음 어떠한가’라는 부분과 글의 마지막 부분에 쓴 대목, ‘너의 시가있을 때 친정 생각 간절하고/ 동무생각 그리울 적 이 가사 내어놓고 / 재삼사 읽어보면 동무 서로 마주앉아 / 정담하는 기상이라 평생이 다가도록/ 부디부디 잊지마세’라는 부분을 보면 신부를 ‘너’라고 지칭하고 있어 신부의 친한 동무가 이별의 마음을 담아 쓴 것 같기도 하다. 보다 정밀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는 다음으로 미룬다. 날려쓴 부분이 많아 해독이 안되는 부분이 중간중간 있지만 해독 가능한 대로 아래에 옮겨 본다. 다소 긴 글이지만 조선 후기 시집으로 떠나야 하는 신부의 불안한 마음, 가족과 헤어져야하는 슬픈 마음 등 신행을 앞둔 신부의 심정을 대략이라도 느껴보시기 바란다.

    [사진] 컬렉터 소장의 신행가로 신행 떠나기 전 신부가 부모 형제, 동무들과의 이별의 정회를 노래한 것이다. 신부의 친한 동무가 써 이를 신부 가마에 넣어 주었을 수도 있다. 세로 13cm, 가로 140cm 정도이다.

    …….(앞부분 일부 소실)

    이별하면 다 같을까 꿈결에나 보았든가
    소문이나 들었던가 평생 못본 남의 집에
    백년 가 있단 말가 가련하고 불쌍하다.
    여자 유행 예사로다 신행날 받아오며
    너의 마음 어떠한가 분수를 모르00
    일월이 훌훌하여 받은 날이 다돼간다.
    신행갈 일 생각하니 적막하기 짝이없다.
    친가일 생각하니 도무지 가기싫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내 어데로 가잔말가
    평생이 다 가도록 갔다왔다 하고저라.
    그럭저럭 나달가서 하룻밤 지나가면
    동무친척 다모아서 작별을 하소한다.
    그재야 웃둑하여 내 어데를 간단말가.
    어찌할고 어찌할고 부모이별 어찌할고
    이십여년 깊은 은덕 무엇으로 갚사오리
    원통하고 슬프도다 업고안고 키운 은덕
    무엇으로 갚사오리 슬하를 떠나가면
    애석하고 섭섭하다 모여 각각 눈물일세
    부모님 슬퍼하야 나를 위로하는 말이
    설워마라 설워마라 여자일생 예사로다.
    조이가서 잘 있거라. 내 수이 다녀오마
    너를 훌처보낸 후에 앞이 막혀 어찌할고
    이 말씀 들은 후에 나의 마음 어떠하리
    오지가 분분하여 촌촌이 끊어지네.
    심신을 정치못해 눈물흘려 하는 말이
    엄마엄마 생각마오 나같은게 자식인가
    골물만 끼쳐주고 효행한번 못하다가
    일년이나 반년이나 모녀 각각 흩어지네
    잘 있으소 잘 있으소 엄마 부디 잘 있으소
    명년 삼월 하시절에 부디 부디 다녀오소

    섭섭하다 동생들아 형님형님 부르면서
    치마끈 마주잡고 수이오라 우는 거동
    어여쁘고 애석하다. 차마 어찌 떠나갈고
    나같은 걸 형이라고 지극히 따르더니
    아무리 못잊은들 생각하면 어찌하리
    너희들 못거두어 무심한 말 다할손가
    섭섭하다 어린 동생 눈에 밟혀 어찌할고
    화단에 국화들아 부디부디 잘있거라.
    명년 구월 국화필 때 다시 너를 찾아오마
    어렵고도 애닮도다. 동무이별 어찌할고
    이십여년 놀던 인정 어찌어찌 이별할고
    이별이 자내든(?) 사람 나와 백년 원수로다.
    잘놀아라 동무들아 서로 잡고 울고나니
    치마폭이 다 젖는다 아지매야 형님네야
    잘있다가 수이보자. 우리 동무 동갑들아
    애련하고 무정하다 서로 각각 흩어질새
    다시보기 쉽겠는가 색시편윳 언제놀까
    내 오거든 편윳놀자 어느 봄에 화전 갈 때
    내오거든 화전가자. 잘 있다 수이보자.
    연연색질하는 모양 섭섭하고 보기싫다
    간직에(?) 눈물닦고 일어나 앉아 하는 말이
    동무들아 날 찾으소 과거 행편 다니든가
    우리 집쪽 지나거든 잊지말고 날 찾으소
    남자여식 무심하나 석목간장 아니로다.
    내사 차마 말이 없다. 유정이 놀던 인정
    말이야 많건마는 내말을 다하자면
    너희들이 더욱 섧다. 못잊어하는 말이
    부디 가서 잘있거라. 어렵고도 난처하니
    시집살이 고단하니 조심하고 경계하오
    장내토록 조심하오 말도많고 흉도많다.
    시집살이 말도많다 혼전신성 늦게하면
    아침과 저녁사판 시부모님 말할거요
    제사에 부정하면 친척이 말할 것이오
    부모회갑 잘못하면 동리사람 말할 것이오
    언어상하없이하면 가장이 성내나니
    조심하오 조심하오 부디부디 조심하오
    너의 심정 고약하면 친가부모 욕먹나니
    구곡간장 섬길 적에 효순하기 주장이요
    반간을 할때라도 훌훌하기 주장이요
    백사가 미진하나 참고잊기 주장이요
    애매한 말 들어나마 발명하면 그뿐이요
    즐거움 볼 때라도 정광찬이(?) 하지말고
    어려운 중 쉬운 것은 구고게(?) 효양하고
    노소를 화순하고 마을사람 인심쓰고
    고향사람 칭찬하며 아무네 아무댁이
    현숙하고 유순하여 친가견문 넉넉하니
    차차로 소문나서 우리게로 듣기면은
    반갑기 짝이 없고, 즐겁기 그지없다.
    너에게서 떠날적에 못잊어 찾는 거동
    나도 또한 애석하다 장내토록 잊지말자
    깊은 정담 이별 글을 두어자 지어주니
    너의 시가있을 때 친정 생각 간절하고
    동무생각 그리울 적 이 가사 내어놓고
    재삼사 읽어보면 동무 서로 마주앉아
    정담하는 기상이라 평생이 다가도록
    부디부디 잊지마세…..

    [사진]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신부’라는 제목이 그림이다. 신부의 표정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진다. 키스는 그림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좌석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큰상에 놓인 온갖 먹음직한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 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뎌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다른 별채에서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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