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기후소설의 소재가 될,
    ‘진짜 스카우트’ 새만금 잼버리의 파행
    [에정칼럼] 새만금신공항 백지화부터 당장 선택해야
        2023년 08월 14일 0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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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소설(Climate Fiction)은 먼 미래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윤이안 작가의 <온난한 날들>(안전가옥, 2022)은 ‘탄소 배출 감독관’이 활동하는 가까운 미래의 평택 ‘에코시티’에서 신소재 플라스틱을 둘러싼 음모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 유리 온실에서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산 사람들 이야기를 나는 믿지 않는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세상 안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살면 편했을 테니까. 이건 에코시티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어떨 때는 이 지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온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고.”(326쪽)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피해자에서 ‘에코시티 테러범’ 생존자로 신분이 바뀐 어느 등장 인물이 작성한 편지의 한 대목이다.

    1991년 강원도 고성 잼버리 이후 32년이 지나 개최된 새만금 잼버리 스토리는 이런 K-기후 소설의 소재로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케일과 장르가 바뀔 뿐. 새만금을 생태학살의 피해자가 아닌 자연권의 담지자로 설정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

    ‘새만금 온실’에서 거행된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8월 1~12일)는 약 4만여 명의 14~17세 청소년들이 기후위기 폭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는 대규모 임상실험이었는지 모른다. 2017년 잼버리 유치에 성공한 이후 새만금 간척사업에 속도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참가자들의 꿈을 펼치게 한다(Draw your Dream!)는 행사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에서 잼버리 이탈 상황이 발생하는 가운데 태풍 카눈 북상 소식에 조직위원회는 결국 K-컬처 체험과 관광 그리고 선물 공세로 방향을 틀었다.

    작년부터 대회 준비 부족에 대한 문제 제기가 꾸준히 나왔고, 8월 개영식 직후 전북 지역사회 등에서 대회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렇게 새만금 잼버리 파행은 기후위기 대응 모의실험에서 공적 기구의 무능한 기획과 안일한 실행의 구태를 여과 없이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 같다. 집중호우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벌어진 게 7월 15일이니, 이 정도면 학습력이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해창갯벌이 사라진 매립지 위에 모인 기후 세대의 ‘정신력’을 탓하기에는 이번 스카우트는 그야말로 실전 야영 테스트, ‘진짜 스카우트’였다.

    300년 후 미래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가상의 역사책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M. 콘웨이, 갈라파고스, 2015) 부록에 ‘미래사회에서 본 옛날 용어 사전’이 실려있다. 인간의 적응성 낙관주의(human adaptative optimism)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인간의 적응력에는 한계가 없어 인간은 어떤 상황이 닥치든 상황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맞게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지구공학이 기후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믿음도 그 가운데 하나다. (2) 상황이 달라져도 낙관하고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막대한 어려움이 닥치거나 ‘적응’ 과정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더라도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이다.”(99쪽)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이 강조한 정신력은 적응성 낙관주의의 두 번째 의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태도는 결국 엄청난 오류로 판명됐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전라북도,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조직위원회와 정부지원위원회의 위기대응 능력 평가를 국제행사 운영에 초점을 맞춰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태풍 카눈 덕분에 뒤늦게, 그것도 지방 곳곳을 긴급 동원하여 야영지 철수 결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진짜 최악을 면한 건 하늘이 도왔기 때문일지도. 이 지점에서 기후위기 적응의 역설이 드러나고, 동시에 국가 시스템의 기능 마비 또는 적응장애(maladaptation) 상태를 재확인하게 된다.

    탄소중립기본법은 기후위기 적응을 이렇게 규정한다. “기후위기에 대한 취약성을 줄이고 기후위기로 인한 건강피해와 자연재해에 대한 적응역량과 회복력을 높이는 등 현재 나타나고 있거나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위기의 파급효과와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유익한 기회로 촉진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취약성, 적응역량, 회복력 같은 개념은 새만금 잼버리에 통용되지 않았다.

    제3차 국가 기후위기 적응 강화대책(2023~2025)은 ‘기후위기에 안전하고 회복력 높은 대한민국’을 위해 ① ‘과학적 기후 감시·예측 및 적응 기반 고도화’, ② ‘기후재난·위험을 극복한 안전사회 실현’, ③ ‘기후위기에 적응하는 사회적 기반 구축’, ④ ‘모든 주체가 함께하는 기후적응 추진’을 주요 정책으로 제시한다. 폭염 취약 중점관리지역(Hot spot)을 담당하는 환경부 장관이 공동조직위원장에 포함되지 않아서였을까. 이 정책 중 어떤 것도 새만금 잼버리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폐영식 기념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거론한 “유례없는 폭염과 태풍”은 얼마나 한가한 소리인가. 세계 곳곳에서 기후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유례 여부는 더 이상 핑계도 배경도 될 수 없다. 잼버리 파행에 대한 책임 공방은 적응, 감축과 전환의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K-민주주의는 문제의 해결자라기보다 당사자에 가깝다. 기후위기 시대의 전환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정치질서가 필요하다. ‘새만금의 죽음’에서 그 실체를 목격한 개발이익 카르텔과 기후위기 복합체를 대면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온난한 날들>에는 자칭 ‘날씨의 신’이라 부르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교리는 간하다. 종말에 대비해 공동체 생활에 헌신해야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 비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이런 기후종교 종말론이 새롭지 않지만, ‘적응성 비관주의’의 다른 버전이기도 하다. ‘피와 흙’으로 외피를 바꾼 다른 극우 정치적 버전도 가능하다. 현 추세로는 솔라펑크(solarpunk)보다 실행 가능성이 큰 전망들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새만금신공항 백지화공동행동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라갯벌을 없애고 기후위기를 가중시킬 새만금신공항을 백지화하는 게 잼버리 사태에서 우리가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이다. 천안으로 옮긴 스웨덴 대원 200여 명이 다큐멘터리 ‘수라’를 관람한 경험을 미담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금 세상을 위해서든, 다음 세상을 위해서든.

    *<에정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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