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 비판
    2007년 04월 10일 03: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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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곧 발간될 『反 자본주의, 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의 한국어판 해제 중 일부입니다. 도서출판 유토피아에서 4월 중 발간될 예정인 『反 자본주의, 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은 영국 학자 사이먼 토미의 저서로서, 자본주의 ‘이후’를 꿈꾸는 다양한 운동과 이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 비판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운동은 남아공, 브라질, 베네주엘라, 스웨덴 같은 나라를 따라 배우려 노력했다. 이 나라들의 경험에 대한 책자와 보고서들이 발간되고, 수 백 명의 한국 사회운동가들이 이 나라들을 직접 방문, 견학했다.

논자에 따라 찬반이 갈리기도 하지만, 남아공의 사회운동조합주의, 참여예산제 등 브라질의 직접민주주의, 베네주엘라의 민중주의 정치, 스웨덴의 사회연대 복지 모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제3세계 저개발 국가와 세계 최부국인 북유럽이 함께 거론되는 게 이상스럽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운동이 주목하고 있는 이 네 나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평화적 이행을 시도하여 성공하고 있는 점, 둘째, 제한적인 국유화와 적극적 복지 확대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점, 셋째, 동구 국가사회주의와 유럽 대륙 사민주의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점.

이러한 경향 또는 노선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의 이론가들은 1997년 국민승리21 이래의 경험과 종합하여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라 이름 붙인 언술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위 의장을 지냈던 주대환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의 경험과 사례를 정력적으로 소개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가 주장하는 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들이 인류가 다다른 최선의 지점이라는 말도 옳고, 미약한 우리로서는 배격할 것보다 사민주의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는 말도 옳고, 사회민주주의적 과정을 경과하지 않고 비약하기 어렵다는 말도 옳다.

   
  ▲ 주대환 민주노동당 전 의장(사진=매일노동뉴스)
 

무엇보다도, 거시 전망이 해체된 상황에서 사민주의적 단기 정책을 가져다 쓰면서 장기적인 모색을 혼용하는 전략은 도덕이나 이념적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실천일 뿐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전시(戰時) 체제와 고성장에 힘입어 사회개조를 이룬 유럽 사민주의가 근래 보이고 있는 모습은 그 시스템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스럽게 한다.

소유 변혁보다 분배 확대에 우선 주력하는 사민주의의 우익적 경향, 즉 실존하는 사민주의 전체는 결국 조세 정책으로 귀착되는데, 이는 자본주의 경기 부침에 의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사민주의 정치의 위기로 전환되는 불안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분배를 유보한 극악한 자본주의와의 시장 경쟁에서 노동 안정성과 수요 안정성이라는 장점을 가지는 한편 초과이윤과 사회적 잉여의 부족이라는 난점에 상시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근래에 사민주의 나라들에서 복지가 축소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민주의 전략 자체에 내포된 모순으로 인해 그 사회 시스템의 선순환이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높은 노조 조직률과 고성장을 배경으로 하는 유럽 나라들의 역사특수적 경험을 낮은 조직률과 저성장기의 한국 사회에 곧바로 이식하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정치와 사회의 변화 속도와 폭이 합리적 기획자들의 이성적 판단을 언제나 넘어섰던 사실(史實)을 환기해보아야 한다. 사민주의적 요소들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권리 확보에 의해서 뿐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합리적 운용을 위한 조건으로도 수입될 것이다. 이 때 사회주의 운동은 합리적 자본가들과의 양적 차이만을 선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위기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이 ‘한통속’으로 취급되는 현실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다.

   
  ▲ 김종철 민주노동당 전 서울시장 후보 (사진=매일노동뉴스)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자들로 ‘민주적 사회주의’가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 그룹인 ‘전진’의 일부 이론가들이 그것을 주창하고, 민주노동당의 서울시장 후보 김종철은 그것을 선거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 정신 그리고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관용적으로 표현하는 정도라면 ‘민주적 사회주의’는 충분히 훌륭하다. 그런데 민주적 사회주의론자들은 그것을 사민주의 등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대별되는 수준의 특정한 노선인 양 선전한다.

“오래 전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을 논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관점을 가져왔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입각해 사민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민주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통일시켰다.

…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이러한 민주적 경제체제를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 국가사회주의는 그동안 일당독재를 옹호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일당독재를 분명하게 반대한다. …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넓은 가치, 우리는 그것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확신한다. … 민주적 사회주의 아래 단결하라!” – 「민주노동당의 이름을 지키는 민주적 사회주의자 선언」, 2005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 이 부분은 자본주의적 방식을 탈각하고, 정부와 사회가 책임을 지고 역할을 다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 대상은 교육, 의료, 주거, 에너지, 교통, 환경, 노후, 장애, 보육 등이다. … 기업이사회의 절반 이상은 노동자 투표로 선출해야 한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강력한 차별적 세금정책, 공공입찰 제한 정책 등을 추진할 수 있다. … ‘산업의 산업’인 금융부문은 가장 먼저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운영체제에 편입시켜야 한다.” – 김종철, 「민주적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07~08년 승리를」, <레디앙>, 2006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시발인가? 그것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우경화의 계기였고, 사회주의인터내셔날(SI), 즉 사민주의로 현존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 중심의 민주적 경제 체제’를 ‘민주적 사회주의’라 부르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대강을 표현한 것이지, 경제정책의 수용자인 국민들을 납득시킬만한 이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당제는 사회주의 이론에 고유한 것이며, 소련과 북한의 초기에 실질적으로 기능했다. 즉, 국가사회주의에 차별화된 민주적 사회주의만의 것이 아니다. 김종철이 들고 있는 정책들은 모두 ‘그냥 사민주의’다.

물론, 국가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적 사회주의 내용을 만들어 나갈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변별력 없는 것만 가지고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상표나 포장을 먼저 내세우는 것은 기술도 자본도 없이 ‘물로 가는 자동차’ 만들겠다고 사업 설명회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언명은 “우리는 사민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예요. 게다가 민주적이기까지 하죠”라는 최고선(最高善)의 자족적 선언이다. 말(言)의 차별화이고, 심리적 자기 위안이다. 따라서 정치적 기만이다. 현재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민주의Ⅱ’이거나, 주대환 노선 추수에 자존심을 혼합한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며, 그 결과물이어야 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선언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이것은 철권을 휘두르는 국가사회주의 통치자들이 “노동자 천국”이라고 외쳐대는 것, 복지 축소하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이 “지금도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사회민주주의’도 ‘민주적 사회주의’도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강령 초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강령이 불변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의 7년이라는 세월은 일사부재리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 무슨 ‘주의(主義)’를 내세우는 것은 실천적 유보, 그리고 집합행동을 통한 인식 확대라는 사회주의 방법에서의 일탈이다.

생각, 편린

자본주의를 넘겠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사회에 대해 잘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주로는 사회에 대한 관찰과 도전의 성과일테고, 자본주의에 대한 전복적 관찰자였던 마르크스와 그 후계자들의 언설, 실천을 공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언설 또는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과거는 더 이상 미래를 밝게 비추어 주지 못하고, 정신은 어둠 속을 행군하고 있다.’ 토크빌이 살았던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처럼 우리 당의 처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도 드문 것 같다. 우리는 행군의 발길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않을 것이지만, 우리의 발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신치 못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렇다 저렇다, 속출하는 다양한 논(論)은 냉정히 말하자면, 공당(公黨)에게는 모두 개연성 있는 가설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당은 이념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살아난다면, 정글의 제왕이 될까? 영화에서처럼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군림할까? 천만의 말씀. 티라노의 보폭은 인간보다도 짧고, 무는 힘은 악어만도 못하다. 공룡이 멸종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포유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유전공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공룡은, 인간이 보호하는 쥬라기공원 안에서만 생존 가능하다. 옛 교조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혁명과 세계대전, 공황을 이겨낸 진화한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른 한편 당의 지도 이념은, 아무리 급해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처럼 급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정당이니까 이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형식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이념이 변혁을 이루는 당의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전도(顚倒)된 인식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념 문제는 어떤 사상을 취사선택하거나 적당히 조합하여 내놓는 일이 아니라, 당을 이끌고 나라를 경영할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럴듯한 상표 없음이 장애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능동적 노력이 가능한 열린 상황을 긍정하자. 우리는 사후 선택이 아니라, 주체적 실천적 구성이라는 이념의 본령에 다가서 있다.

급진적 민주주의자였던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데는 1848년 노동자혁명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 후, 그는 바뵈프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식과 용어를 차용하였고, 프랑스 내전 과정에서 블랑키즘의 ‘체제 자체의 파괴’라는 아이디어를 흡수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상 또는 이념은, 개인(소집단)의 연구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계급운동과의 부단한 교호작용에 의한 역사적 산물, 인류 지식과 구체적 실천의 화합물이라는 가르침이다. 또, 그것이 비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동맹과 독일사회민주당에 보고하고 활동했던 당원에 의해서만 표출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장 주목해야 한다.

삼박한 깃발 없음을 두려워 말라. 개념이나 교조가 아니라, 인민의 마음과 세상사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하지 않던가. 우리 당은 지난 100여 년 간 잊혀져 있던 정신, ‘형태로서의 진보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진보’로 복귀하고 있다. 새 세기의 이념을 세우는 주역으로 자임하자.” – 이재영, 「우리 당의 여섯 가지 성격」, 1999

강조하자면 개방이다. 배우는 데 어떠한 제한이나 기피, 꺼림이 있어서도 안 된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남들이 반성도 없이 여러 포스트주의로 변신했다고 비난한다. 본인도 아무 말 없이 주변부 자본주의론에서 개종한 것을 잊은 모양이다.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각종 ‘포스트 스탈린주의’ 경향(정성진,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 2006)”을 배우는 것은 아무 잘못이 아니다. 정성진 자신의 참여계획경제론이 참조하고 있는 『파레콘Parecon』 역시 ‘정통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이거나 공상적 사회주의로의 후퇴다.

그 이론에는 소비자평의회 같이 막스 베버가 제시했던 아이디어까지도 포함돼 있다. 자신은 창의적 사고를 접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남에게는 금서를 두는 것은 중세 기독교나 소련, 북한 정권이 즐겨 쓰는 ‘국가자본주의’식 윤리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뉴튼과 다윈의 시대에 조응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국지적 인지에 의한 국지적 대응이다. 그 시대 인식에 얽매어 있어서는 아인슈타인과 분자생물학의 시대, 강력하게 개량된 자본주의에 승리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그 제자들에게서는 『자본』에 버금가는 수준의 정치학 성과를 발견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학적 이론으로 무장하고 행동에 나서길 바랐는데, 이것은 마르크스 시대의 정치적 낙후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구체적 계기를 사상(捨象)한 고도의 추상 학문으로, 실천 과학 그 자체라기보다는 철학과 실천 과학을 잇는 중간고리일 수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학, 조직학, 사회주의 정치학 등 여러 방법론이 인간 자유의 조건 과학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 칭해지는 운동의 목표는 훨씬 확대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꿈꾸었던 목표들 대부분은 스웨덴 같은 북유럽 나라들에서 훨씬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다.

근대 사회주의 운동이 ‘인간 존재의 물리적 조건’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대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고등교육과 같은 ‘인간 기능의 사회적 조건’까지 보장하고 있다. 생산력 발전과 욕구 증대에 비추어 보자면 우리 운동의 목표는 ‘인간 욕구의 기호적 조건’까지로 확장되어 마땅하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기회의 보장에서 성취의 보정(補正)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인간 종(種)에 대한 균등한 조건 부여에서 인간 개체의 다양한 욕구 충족, 다른 종과의 공존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모델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생산력 등 이전 사회의 발전 수준, 특수한 제도와 문화, 변혁 주체의 힘과 의지, 그리고 역사 우연의 복합적 산물이다. 게다가 산술합이 아니라, 그 기하 폭발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우리의 모델이 어떠할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위의 구성 요소 대부분이 규명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바 이념형에 접근할 가능성 그리고 궁극적 승리 가능성은 우리가 가질 정치적 권능의 크기와 우리가 거치게 될 경험의 누적에 정비례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앞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전에 지나간 것에 비해 반드시 더 잠정적이고 덜 완벽할 것이다(토마스 쿤, Thomas Kuhn, 『과학혁명의 구조』).” 우리가 사회민주주의나 국가사회주의처럼 정치(精緻)한 이론 체계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운동에 대비하여 준비되어야 하는 지식보다는 폭넓은 운동 속에서 얻게 될 지식의 양과 질이 압도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둔 밤 숲 속에 길 잃은 자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한 곳에 숨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거나, 숲 밖으로 난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거나, 한 방향을 정하여 흔들림 없이 걷는 것이다. 도움을 기다리다 들짐승들에게 해코지 당할 수 있고, 길을 못 찾고 방황하다 끝내 주저앉을 수도 있다.

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걷는 것이 가장 합리적 선택일텐데, 우리 운동에게는 노동자 대중운동에 기반한 진보정당이라는 방향이 이미 주어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도가 없지만, 나침반이 있고, 더 필요한 것은 도전에 나설 용기 뿐이다. 걷는 와중에 길을 발견할 수도 있고, 우리의 걸음이 길이 될 수도 있다. 진리는 도전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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