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 바웃돌은 왜 도망을 선택했을까?
    [컬렉터의 서재] 조선시대 일천즉천과 노비종모법
        2023년 07월 11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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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 2022년 7월 이 [컬렉터의 서재]란에 ‘장수(長壽) 노비 갑덕에 대하여’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경상도 하동의 양반가 류씨 집안에서 만든 12장의 호구단자에 갑덕이란 이름의 노비가 무려 111세가 될 때까지 계속 기록된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문서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 실제 장수했을 가능성, 도망 노비였을 가능성,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 등 세 가지로 갑덕에 대해 추론해 본 것이었다. (관련 글 링크)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갈파회(乫破回)’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노비와 그 가족을 새로 만나고 있다. 갈파회는 하동의 류씨 집안 노비 갑덕보다 훨씬 많은 나이까지 호구단자에 기록되어 있었다. 갈파회는 전라도 영암군 군시면에 거주했던 황씨 집안의 외거노비였다. 1759년부터 1897년까지 138년간 갈파회는 계속 문서에 등장하고 있었다. 첫 문서 속에서 갈파회는 나이가 40대였으므로 마지막 문서 기준으로는 무려 180대가 되는 것이었다. 이들 문서 속에서 그의 아내는 ‘양처(良妻)’로 기록되어 있는데, 노비 갈파회가 양인 아내와 결혼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름이 ‘철이(哲伊)’였다. 이 갈파회 가족 3명, 즉 갈파회, 그의 양인 아내, 그리고 아들 철이는 주인 황씨로부터 도망하여 보성에 거주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16장의 황씨 가문 호구단자

    온라인 경매에 올라온 영암 황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총 16장으로 주호(主戶; 일종의 호주)는 황석룡 – 황경오- 황장환 – 황종윤- 황진호까지 총 5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연도로는 건륭 24년(1759년)에서 개국 507년(1897년)까지 총 138년의 기록이다.

    [사진] 이 호구단자는 영암 황씨 가문의 호구단자 16장 중 시기적으로 제일 앞서는 문서이다. 건륭 24년 즉 1759년도 작성된 문서로 주호(主戶)는 황석룡이고, 문서 왼쪽에 이 집 소유의 노비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앙역노비(솔거노비)로 세태(世太 21세)가 있고, 외거노비 갈파회(乫破回 47세), 그리고 갈파회와 양처 사이에 태어난 철(哲 17세)이 노비로 기록되어 있다. 갈파회 가족은 ‘逃居寶城(도거보성)’ 즉 도망가 보성에 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에서 ‘노(奴) 갈파회’와 ‘노(奴) 철’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박건호 소장)

    호구단자의 경우 경매에서 보통 한 장에 1만원에서 3만원 정도로 거래가 되는데, 16장 모두 낱장으로 따로 올라온 이 문서들의 시작가는 동일하게 5만원이었다. 컬렉터 입장에서는 이 16장이 한 단위로 묶여 시작가 20∼30만원 정도였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판매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문서들이 낱장씩 그것도 비싸게 올라온 경우 컬렉터는 어쩔 수 없이 선택적으로 수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문서들을 다 수집하려면 80만원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16장의 문서 중 제일 오래된 문서, 제일 마지막, 그리고 기준 연도가 되는 문서들 중심으로 결국 최종 6장만 수집했다. 원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황씨 가문의 호구단자 문서는 결국 계속 하나로 남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16장 고문서 사이를 부지런히 바장이기 시작했다. 새로 수집한 6장의 문서는 직접 실물을 보며, 수집하지 못한 10장의 문서는 경매 사이트의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완하며 문서를 분석했다. 물품이 한덩어리로 올라오면 대체로 자료 사진을 몇 장만 올리고 마는데, 낱장 단위로 물품이 올라왔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모든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판매자가 낱장씩 자료를 올린 것이 이 경우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인다. 16장의 문서들 속에 등장하는 갈파회의 주인 이름과 갈파회의 이름 표기 그리고 갈파회 부자의 나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 문서들 속에서 먼저 눈에 띄는 특이점은 위 표의 ‘갈파회의 이름 표기와 나이’란에서 보듯 갈파회의 이름이 계속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 철이는 첫 문서에서 ‘철(哲)’이라고 기록된 것을 빼면 이후 항상 ‘철이(哲伊)’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반면, 갈파회(乫破回)는 상전이 바뀔 때마다 갈소회(乫所回), 가소회(加所回), 가암회(加巖回), 갈암회(乫巖回)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갈파회의 이름이 우리말로 된 것인데, 이를 한자식으로 적다 보니 생긴 다양한 변용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노비 이름 ‘빗자리(빗자루의 경상도 사투리)’를 한자로 표기할 때 ‘빗’에 해당하는 한자가 따로 없어 ‘光(광)’의 뜻 ‘빛’을 빌어 흔히 ‘光自利’, ‘光自理’, ‘光自里’ 등 다양하게 기록된 경우와 유사한 것이다. 그럼 ‘갈파회’는 우리 말로 어떻게 불린 것일까?

    세 자리의 이름 중 뒤의 두 자리 글자부터 보자. 일단 ‘암회(巖回)’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다. 암회는 조선시대 비교적 많이 쓰인 이름이다. ‘암’은 바위를 뜻하므로 ‘바위’, 또는 ‘바우’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그럼 암회의 뒷글자 ‘회(回)’는 뭘까? ‘회(回)’는 ‘돈다’는 뜻이므로 음이 아니라 뜻으로 읽으면 ‘돌’이 된다. 그래서 ‘암회’는 ‘바윗돌’ 혹은 ‘바웃돌’이 된다. 물론 ‘돌’을 표현할 때 더 많이 쓰인 ‘乭(돌)’이라는 글자를 사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회(回)’를 썼다고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건 엿장수, 아니 노비를 거느린 황씨 양반들 마음이다.

    ‘암회’를 ‘바윗돌’ 혹은 ‘바웃돌’이라고 해석하고 보면 다른 이름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갈파회’라는 이름 속 ‘파회(破回)’에서 ‘파’는 바위와 발음이 비슷하므로 ‘파회’도 ‘바윗돌’ 혹은 ‘바웃돌’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갈소회(乫所回)’의 속의 ‘소회’도 그렇다. ‘소(所)’는 ‘바’의 뜻이므로 ‘소회’ 역시 ‘바돌’ 혹은 ‘밧돌’로 읽힌다. 이것도 ‘바윗돌’ ‘바웃돌’과 비슷하다. 종합해보면 이 문서 속 노비 갈파회는 우리말 이름인 ‘바윗돌’, ‘바웃돌’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는 아마 줄여서 ‘바우야!’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럼 ‘바웃돌’ 앞에 붙은 ‘가(加)’나 ‘갈(乫)’은 무엇일까? 소리나는 대로 붙여 읽으면 ‘가바웃돌’, ‘갈바웃돌’ 정도가 되겠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加)’를 소리가 아니라 뜻으로 읽으면 ‘더할 가’이므로 ‘더’나 ‘덜’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름이 ‘덜바웃돌’ 혹은 ‘들바웃돌’이다. ‘들판에 있는 바윗돌’ 뭐 이런 뜻이 아니었나 싶은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렇게 이름 앞에 붙은 ‘가’나 ‘갈’의 뜻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앞으로 ‘갈파회’를 지칭할 때는 간단하게 ‘바웃돌’이라고 통일해 부르기로 하자.

    문서에서 바웃돌은 영암에 사는 황씨 집안의 외거노비였다. 사노비(私奴婢)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바웃돌은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철이를 낳았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 바웃돌 가족이 도망을 쳤고, 그들이 정착한 곳은 전라도 보성이었다. 호구단자에서 꾸준히 ‘逃居寶城(도거보성)’이라고 기록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외거노비라고만 적었기 때문에 이 바웃돌 가족이 원래 살았던 곳이 주인이 살았던 영암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인집에서 독립해 살았다는 것만 확인될 뿐이기 때문이다. 보성은 영암에서 동쪽으로 대략 70km 떨어진 곳이다. 도망가서 사는 곳이 보성이라면 원래 살았던 곳은 그곳보다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주인이 살았던 영암이나 영암 근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바웃돌 가족의 도망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2장 중 가장 오래된 1759년 호구단자를 보면 이미 도망가서 보성에 산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 문서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그렇다면 최소 1759년 이후부터는 도망 노비였다는 뜻이다. 황씨 집안에서는 이 도망 노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을 못했는지 100세를 훌쩍 넘긴 이후까지 그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웃돌과 철이 나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아들 철이는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문서까지만 나이가 적혀있고, 이후는 나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서인 1759년 문서에서는 17세, 1777년 문서에서는 31세, 1789년 문서에서는 43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냐하면 1759년에 17세면, 1777년에는 35세, 1789년에는 47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서가 맞다고 하면 이후 나오는 두 문서가 모두 맞지 않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인 1777년에 기록된 31세를 기준으로 보면 세 번째 문서 즉 1789년 문서에 나오는 43세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세 번째 문서 속에 기록된 나이가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철이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세 개의 나이 중 두 개의 나이가 일치하는 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문서가 작성된 1759년 철이 나이는 17세가 아니라 13세가 맞다. 1759년은 1777년으로부터 18년 전이므로 31세에서 18을 빼면 13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이는 몇 세까지 노비로 기록된 것일까? 위에 제시한 표의 제일 오른쪽 칸의 괄호 속 숫자는 호구단자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철이의 나이를 1759년에 13세였다고 보고, 이를 기준 삼아 문서 작성 당시 철이 나이를 추정해 본 것이다. 그 결과 마지막 문서가 작성된 1897년에는 151세였다. 이미 사망했음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황씨 집안은 철이를 자신들의 재산으로 계속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이 아버지 바웃돌의 경우는 더 심하다. 역시 앞의 세 번째 문서까지만 나이와 출생년 간지를 같이 기록했고, 이후에는 모두 ‘갑자생(甲子生)’이라고 출생년의 간지만 밝혀 놓았다. 그런데 아들 철이만큼이나 바웃돌의 나이 역시 제멋대로다. 1759년에 47세, 1777년에 60세, 1789년 76세다.

    만약 첫 번째 문서의 1759년 47세가 맞다면 1777년에는 65세, 1789년 77세가 되어야 하고, 두 번째 문서의 1777년 60세가 맞다면 1759년에 42세, 1789년 72세가 되어야 한다. 또한 세 번째 문서 1789년에 나오는 76세가 맞다면, 그 나이 기준으로 1759년에 46세, 1777년에 64세가 되어야 한다. 1759년 바웃돌의 나이가 다음 세가지 나이 42세, 46세, 47세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이 세 개의 나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1897년 마지막 문서가 작성될 당시의 나이는 각각 180세, 184세, 185세였다.

    바웃돌 나이를 더 정확히 추론할 수 방법이 하나 있다. 이 16장의 기록 중 흥미로운 점은 바웃돌의 나이를 기록할 때 첫 세 장(1759,1777,1789)의 경우에는 나이와 출생년의 간지를 같이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갑오생(甲午生)’, 즉 갑오년에 태어났다. 특이한 것은 이 갑오생이 네 번째 문서인 1807년 호구단자부터는 갑자기 ‘갑자생(甲子生)으로 바뀐다는 점인데, 이는 마지막 문서까지 이어진다. 왜 갑오생 바웃돌이 갑자기 갑자생으로 바뀐 것일까?

    이는 아마도 황씨 가문의 단순한 착각으로 보인다. ‘午’를 날려 쓰면 ‘子’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1789년 작성된 호구단자에 적힌 ‘갑오(甲午)’의 ‘오(午)’자를 보면 급하게 써서 ‘자(子)’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바웃돌이 살았던 시기와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갑오년은 1714년이다. 바웃돌이 1714년 갑오생이라면 그는 1759년에 46세, 1777년에 64세, 1789년에 76세가 되는데, 이는 첫 세 장의 문서에 각각 적힌 나이인 47세, 60세, 76세와 큰 차이가 없다. 이를 마지막 호적문서가 작성된 1897년까지 확장하면 그해 바웃돌의 나이는 184세가 된다. 다시 정리하면 영암의 양반 황씨 가문은 도망간 바웃돌 가족에 대해, 바웃돌은 184세까지, 그 아들 철이는 151세가 될 때까지 문서에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지적할 점은 황씨 가문이 바웃돌과 철이에 대해 보이는 지극한 관심과는 달리 바웃돌의 양처(良妻) 즉 철이의 엄마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신분을 양인이라고 밝힌 것 말고는 이 여성의 성씨는 물론이고 나이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황씨 집안의 재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 노비 바웃돌의 나이를 기록한 부분을 보면 갑오생이 갑자생으로 변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1777년 호적문서의 일부로 여기에는 바웃돌(‘갈파회’로 기록)이 ‘64세 갑오생’이라고 적어놓았다. 두 번째 사진은 1789년 문서의 일부로, 바웃돌(‘갈파회’로 기록)을 ‘76세 갑오생’이라고 썼는데, 날려 써서 ‘갑자생’처럼 보인다. 이후 이 집안 문서에서 바웃돌은 갑자생으로만 기록된다. 마지막 문서는 1843년 문서의 일부인데 바웃돌(‘가소회’)을 반듯한 정자로 ‘갑자생’이라고 써놓았다. (박건호 소장)

    노비 소생의 신분 귀속

    그런데 내가 이 문서들을 수집한 것은 바웃돌과 철이의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건 작년에 다른 류씨 집안 노비 갑덕으로 충분하다. 이 문서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바웃돌의 아들 철이의 신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바웃돌이 황씨 가문의 재산인 것은 분명하지만, 바웃돌의 아들 철이가 황씨 집안의 재산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는 당시 법으로 보자면 철이는 노비가 아니었고, 그러므로 황씨 집안의 재산이 아니었다. 특히 이 문서들이 1731년 이후에 작성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1731년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1731년이라는 연도는 꼭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어쨌든 황씨들이 철이에 대해 자신의 재산이 아닌데도 소유권을 주장하자 바웃돌 가족은 이에 저항하여 보성으로 도망간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노비에 대한 법이나 규정, 특히 노비의 결혼으로 생긴 소생에 대한 신분 귀속과 재산 귀속에 대한 규정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배경 지식을 알고 보면 바웃돌의 아들 철이의 신분이 명확해질 것이고, 저 황씨 가문의 16장 문서가 왜 이상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복잡할 수 있어 이번 글에서는 표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노비의 신분 귀속부터 따져보자.

    보통 남자노비는 노(奴), 여자 노비를 비(婢)라고 하고 이를 합쳐 ‘노비(奴婢)’라고 한다. 그래서 노비의 결혼을 설명할 때, 노비라는 단어를 성별로 분절하여 ‘노’와 ‘비’ 등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아래에서는 그냥 노(奴)는 ‘남자노비’, 비(婢)는 ‘여자노비’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노비와 결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노비상혼(奴婢相婚)이라 한다. 양인과 천민(노비)의 결혼인 양천교혼(良賤交婚)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라는 게 원칙대로 법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양인과 천인의 결혼도 드물지 않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노비의 결혼은 세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자노비와 여자노비의 결혼, 남자노비와 양인여자(良妻)의 결혼, 양인남자와 여자노비의 결혼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결혼의 결과로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 소생의 신분은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일반적으로 적용된 원칙은 일천즉천의 원칙이었다. 즉 부모 중 한쪽이라도 천민이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는 규정이었다. 이를 노비 소생을 기준으로 표로 정리해보자. 부모의 신분이 모두 노비인 경우, 아버지가 노비인 경우,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이다. 일천즉천의 규정을 따를 경우 자식A, B, C는 모두 노비가 된다.

    [표1] 일천즉천에 따른 노비 소생의 신분 귀속

    그런데 이런 일천즉천의 규정을 고수하다 보면 문제는 노비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10명의 결혼 적령기의 노비(남자노비 5, 여자 노비5)를 거느리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내가 양천교혼 금지의 국법에 따라 내 소유 노비끼리 결혼을 시켰고, 그 사이에 각각 2명씩의 자식이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내 소유 노비는 총 20명이 된다. 그런데 만약 내가 노비 수 증대를 위해 남자노비 5명, 여자노비 5명에게 각각 가난한 양인 신분의 여자, 남자와 결혼하게 하고, 그 사이에 2명씩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내 소유 노비의 수는 총 30명이 된다. 이렇게 일천즉천 규정하에서 노비 수는 꾸준히 늘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노비 수가 너무 늘어나면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양인 증대책이 모색되는 이유이다. 조선시대 태종은 1414년 양인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의 소생(위 표 기준으로는 자식B)를 양인으로 구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당시 예조판서 황희의 건의를 따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양인 신분를 따라 자식을 양인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이 법을 노비종부법이라고 부른다. 당시 양천교혼은 보통 양인 남성과 노비 여성이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경우를 주로 고려한 것이다. 결혼은 아니지만 양반 남자 주인이 자기 집 여자 노비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즉 노비 남자와 양인 여성이 혼인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지 이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별도로 처분하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노비종부법 시행 이전인 1405년(태종 5) 9월에 남자 노비가 양인 여자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면서 율을 어기고 혼인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이혼시키고 남녀와 소생자를 속공(屬公) 즉 공노비로 삼은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비종부법은 시행 후 생각지 못한 문제를 야기했다. 여자 노비가 자기 자식이 천인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주 남편을 바꾼 뒤 그 자식이 태어났을 때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이고미 사건처럼 이고미라는 자가 노비였던 자기 아비를 아비로 인정하지 않고 뺨을 때리는 패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성리학자 시각으로 이 법은 천륜을 어기는 법이었다. 다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런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도대체 천한 계집이 날마다 그 남편을 바꿔서 행위가 금수(禽獸)와 같으니, 그가 낳은 자식은 다만 어미만 알 뿐 아비는 알지 못합니다.

    – [세종실록] 14년 3월 15일-

    세종은 맹사성과 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1432년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였다. 태종 때 제정된 노비종부법이 세종 때인 1432년 노비종모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노비종부법은 고작 2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말았다. 세종 때 실시한 노비종모법에 따라 양인 남자와 노비 여자의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은 이제는 어미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었다. 이와 함께 세종은 양천교혼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세종 때 실시된 노비종모법에 따라 나타난 변화상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태종 때의 노비종부법이 세종 때의 노비종모법으로 바뀌면서 나타난 변화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세종 때의 노비종모법은 주로 양인 남자와 여자 노비의 결혼으로 태어난 소생의 신분 귀속에 대한 규정으로 이는 태종 때 실시된 노비종부법의 폐단 때문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후기 영조 때인 1731년 시행된 노비종모법과는 의미가 다소 다르다. 영조 때 시행된 노비종모법은 비록 아비가 노비라도 어미가 양인이면 그 소생 자식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한다고 규정한 법이다. 양천교혼이라도 남자 노비와 양인 여성의 결혼에 대하여 적용되는 규정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같아도 그 적용대상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후 세조 7년인 1461년 『경국대전』 형전이 반포될 때 노비의 일천즉천 규정을 다시 명확히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일천즉천의 원칙 하에 노비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특정시기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조선시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노비 비율을 대체로 30%정도로 추정한다. 어떤 이는 40% 혹은 그 이상까지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항상 지나친 것이 문제다. 노비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양인 수가 줄게 되고 그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정에서는 노비 일부를 양인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꾸준히 모색되었다. 중종 때 조광조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양인으로 구제하는 노비종모법(세종 때의 노비종모법과 개념이 다르다)을 주장하였고, 선조 때 율곡 이이도 역시 같은 내용의 노비종모법을 주장하였으나 모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종 때 송시열 등의 주도로 노비종모법이 일시 시행된 적이 있으나 서인과 남인의 권력이 바뀔 때마다 실시와 폐지를 반복했다. 이는 숙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영조 7년인 1731년에 이르러 이 노비종모법은 완전히 정착하였다. 『경국대전』 형전에 일천즉천이 명문화된 지 270년만이었다. 이로써 기존에 노비였던 양인 여성 소생의 자식들이 모두 어미의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비종모법이 시행되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표로 정리해보자.

    [3] 영조 때 노비종모법 시행으로 생긴 변화

    위 [표3]에서처럼 자식A와 자식B는 일천즉천의 경우이든, 노비종모법의 경우든 노비 신분에 변화가 없다. 그러나 자식C는 다르다. 일천즉천일 때는 노비였던 그는 영조 때 실시된 노비종모법에 따라 어머니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사실은 조선 초 태종과 세종 때 노비에 대한 논의에서는 주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결혼과 그 소생 자식의 신분 귀속 문제가 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양인 수 증대책을 고려할 때 주요 고려 대상이 되었냐는 점이다. 그것은 남자 노비와 양인 여자의 결혼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형태의 결혼이 많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아래 노비 소생의 재산 귀속을 설명하면서 다룰 것이다.

    노비 소생의 재산 귀속

    노비에 대한 규정은 노비 소생의 신분 귀속에 대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재산 귀속에 대한 규정도 이해해야 한다. 노비 소생에 대한 재산 귀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자. 노비 소생의 재산 귀속을 살필 때 양천교혼의 경우는 주 고려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비 상전이 한 명씩 밖에 없기 때문에 노비의 재산 귀속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래 표를 보고 설명하자. 자식B와 자식C 모두 양천교혼으로 태어난 자식이다.

    [4] 양천교혼 시 노비 소생의 재산 귀속 (붉은 글씨 부분)

    양천교혼의 경우 상전은 한쪽밖에 없다. 표 속의 상전3(여자노비의 주인)과 상전4(남자노비의 주인)가 그들이다. 그렇다면 양천교혼으로 태어난 자식B와 자식C는 누구의 재산이 되는가? 일천즉천의 경우 자식B는 상전3의 소유, 자식C는 상전4의 소유이다. 주인이 한 명이기 때문에 소유권 귀속은 간단하다. 그렇다면 일천즉천이 노비종모법으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재산상의 변화가 생기는가? 노비종모법이 시행되면 자식C가 기존 노비에서 양인이 되면서 상전4는 일천즉천의 경우에 가졌던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게 된다. 노비종모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는 사람은 남자노비를 소유한 상전으로 그 노비가 양인 여성과 결혼한 경우이다. 위 [표4] 속에 표시된 괄호 속의 붉은 글씨는 자식B, 자식C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표시한 것이다. 노비종모법으로 양인이 된 자식C는 당연히 상전이 없기 때문에 따로 붉은 색 표시를 하지 않았다.

    정작 소유권 귀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비끼리 결혼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남자 노비, 여자 노비 각각 상전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 노비와 여자 노비가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은 일천즉천, 노비종모법을 막론하고 무조건 노비가 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 소생은 누구의 재산으로 귀속될까?

    이럴 경우 여자쪽 상전의 재산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야 분쟁의 소지가 적다. 왜냐하면 여자는 열 달간 임신해서 낳기 때문에 누가 아이를 낳았는지는 명확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리기는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DNA를 판별하는 기술이 그 당시에 있었을 리가 없다. 만약 남자쪽 상전으로 했다면 노비 소생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소송이 계속 되었을 것이다. 고려 정종 5년인 1039년에 제정된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은 이렇게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소유권이 어머니쪽 상전에 있다고 규정한 최초의 법이었다. 그 이전부터 관행상 그렇게 해오던 것을 이때 법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표로 정리해보자. 노비 사이의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A는 일천즉천, 노비종모법 어떤 법이 적용되더라도 노비 신분이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쪽 주인인 상전2의 재산으로 귀속된다. 이를 붉은색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5] 노비상혼 시 그 소생의 재산 귀속 (붉은 글씨 부분)

    그렇다면 위의 [표4]와 [표5]를 하나의 표로 합쳐 정리해보자.

    [표6] 노비의 결혼으로 태어난 소생의 재산 귀속

    복잡하긴 해도 찬찬히 보면 이해가 되실 것이다. 그렇다면 심화학습으로 [표6]을 보고 퀴즈를 풀어보자. 노비 상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첫 번째 문제. 여자 노비를 거느린 상전의 경우(상전2, 상전3) 그 여자 노비가 어떤 신분의 남자와 결혼해야 재산상 유리한가?

    정답은 어떤 신분의 남자와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일천즉천이든 노비종모법이든 어느 법이 적용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여자 노비를 거느린 상전들은 자기 소유의 여자 노비의 결혼 문제에 있어서 가장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은 여자 노비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한 입장을 보였을 것이다.

    [사진] 조선후기 밀양 양반 안효연의 호구단자이다. 그는 노(奴) 봉이(奉伊), 비(婢) 선녀(先女) , 비(婢) 분이(分伊) 등 세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붉은 색 표시부분), 이 중 비 선녀는 양인 남자 김춘근과 결혼했고, 비 분이는 양인 남자 김한주와 결혼했다. 상전인 안효연의 입장에서는 이 집의 여자 노비들이 어떤 신분의 남자와 결혼해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그 소생은 자신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위 표6 기준으로 말하면 그는 ‘상전3’에 해당한다. 그러나 안효연은 남자 노비 봉이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봉이가 어떤 신분의 여자와 결혼하는가에 따라 재산의 변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박건호 소장)

    이어서 두 번째 문제다. 남자 노비를 거느린 상전의 경우(상전1, 상전4) 그 남자 노비가 어떤 신분의 여자와 결혼해야 재산상 유리할까?

    정답은 반드시 양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

    노비 상혼으로 자식이 생길 경우(자식A) 항상 여자 노비의 주인(상전2)의 소유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남자 노비를 거느린 상전의 경우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반드시 양인 여자와 결혼을 시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야 그 소생(자식C)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노비종모법이 시행된 영조 7년(1731년) 이후에는 그 재산권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남자 노비를 거느린 상전이 재산 증식과 관련해서는 가장 불리한 처지였다. 이것이 남자 노비 가격이 여자 노비 가격보다 싼 이유이며, 상전들이 그들 소유의 남자 노비로 하여금 가난한 처지의 양인 여성과 혼인을 강요했던 이유이자, 그 결과로 남자 노비와 양인 여자의 결혼이 꾸준히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이유였다.

    조선후기 호적문서를 보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노비의 결혼에서 가장 흔한 유형이 노비끼리의 결혼(노비 상혼)이라면 두 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결혼 유형은 남자 노비와 양인 여자가 결혼하는 유형이다. 이는 반대 유형 즉 양인 남자와 여자 노비의 결혼과 비교해서 더 많이 나타난다. 국법이 양천교혼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는 재산 증식을 바랐던 남자 노비를 소유한 상전의 재산 증식의 욕구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자 노비가 결혼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재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전은 자신의 남자 노비가 가난한 양인집 여자와 결혼하도록 적극적으로 주선하거나 강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노비가 주인의 이런 바람과 달리 여자 노비와 결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이런 결혼의 경우는 주인과 같이 거주하는 솔거노비보다는 주인과 거주를 달리하는 외거노비들에서 더 쉽게 나타났을 것이다. 이번 글의 주인공 바웃돌도 외거노비였다. 이런 결혼으로 노비 소생이 생길 경우, 그 노비는 여자 노비의 상전(상전2)의 재산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남자 노비의 상전(상전1)은 재산상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남자 노비는 주인에게 다른 무엇인가로 보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11대 중종 때인 1540년 노비 복만의 사례를 보자. 복만은 두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상속하면서 그 중 일부를 상전에게 바쳤다. 그 양은 다음 표와 같다.

    [7] 노비 복만의 재산 상속

    왜 복만은 일정 정도의 재산을 따로 주인에게 바쳤던 것일까?

    그 이유는 복만이 양인 여자가 아니라 남의 집 여자 노비와 결혼하여 주인에게 재산상 손실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복만은 76세가 되도록 주인으로부터 신공을 면제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구에 시달렸고, 심지어 재산 상속시 위와 같이 상전 몫을 따로 떼어 바쳐야만 했던 것이다.

    바웃돌은 왜 도망 갔을까?

    이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바웃돌 가족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바웃돌의 아내가 양인 여성이라는 점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설명한 내용에다가 바웃돌 가족을 대입해보자.

    [8] 바웃돌의 결혼과 철이의 신분

    이제 이해되실 것이다. 황씨 가문은 외거노비 바웃돌이 양인 여자와 혼인하여 철이를 낳았고, 이로 인해 재산이 늘어났을 것이다. 노비 바웃돌의 결혼은 황씨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황씨 가문은 이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노비종모법 시행 이전 즉 일천즉천 규정하에서만 그렇다.

    바웃돌은 왜 보성으로 도망쳤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럴듯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볼 수 있겠다. 우리는 황씨 가문의 첫 호적 문서의 연도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1759년!

    1759년 바웃돌이 40대 (갑오년생이라는 기록을 근거로하면 46세)이고, 그와 양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철이가 10대(13세 혹은 17세) 때 이미 도망간 상태였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연도가 1731년이다. 세조 이후 일천즉천의 원칙이 대체로 지켜져 오다가 영조 7년인 1731년부터 노비종모법이 시행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6년 12월 26일 기록이다.

    경기도 암행어사(暗行御史) 김상성(金尙星)이 군역(軍役)과 인족(隣族)의 폐해를 통절(痛切)히 진달하고 이어 금년 이후로는 모든 종[奴]의 양처(良妻) 소생은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여 양정(良丁)의 수효를 늘릴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힘주어 찬성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사(御史)의 진달한 바를 들으니, 양민(良民)의 날로 줄어든 폐단이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사소한 폐단 때문에 대체(大體)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금년부터 소생(所生)은 영갑(令甲)으로 정하여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라.”하였다.

    이 법의 시행으로 1731년 정월 초 1일을 기하여 이때부터 태어난 자들은 공노비, 사노비를 막론하고 모두 어미의 역을 따라야 했다. 이 법의 시행으로 바웃돌의 아들 철이도 양인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1731년으로부터 황씨 집안 첫 호적문서로 남아있는 1759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731년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을 때 바웃돌과 철이의 나이를 계산해보자. 1759년 바웃돌의 나이는 46세 정도였다. 그때를 기준으로 28년 전 노비 종모법이 폐지되었으므로 1731년 당시 바웃돌의 나이는 18세였을 것이다. 노비종모법이 시행될 당시에 바웃돌은 이미 혼인할 나이 근처에 있었다는 뜻이다. 철이가 언제 태어났는지도 계산해보자. 1759년 당시 철이가 13세였다면 그는 1746년생이고, 당시 17세였다면 1742년생이었다. 이렇게 바웃돌이 결혼해서 철이를 낳은 시기를 1742년 혹은 1746년으로 가정한다면 노비종모법이 시행된 지 이미 10년이 지난 후였다. 철이가 태어났을 때 바웃돌의 나이는 1742년 기준으로는 29세였고, 1746년 기준으로는 33세 정도였다.

    그렇다면 바웃돌이 양처와 철이를 데리고 도망갔던 이유는 노비종모법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노비종모법을 둘러싼 주인 황씨와의 갈등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비록 자신은 노비이지만, 노비종모법이 실시된 후 약 10년 후에 태어난 철이는 법에 따라 양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 입장에서는 이런 제도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 집안의 노비가 낳은 자식은 내 재산’이라는 오래된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득권이었다. 실제 조선 후기 호적 문서를 보다 보면 영조 때 노비종모법이 시행되고 한참 후에 작성된 문서에서 남자 노비와 양인 아내 사이의 자식을 그대로 자신의 노비로 기록한 문서를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관노비의 경우에는 노비종모법 적용이 비교적 쉬웠겠지만, 사노비의 경우에는 이렇게 법 적용의 맹점이 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웃돌은 여러 차례 주인 황씨에게 철이를 국법대로 양인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 황씨는 그리 큰 부자가 아니었다. 1759년 문서를 보면 거느리는 노비는 바웃돌 말고는 세태(世太)라는 이름의 앙역노비(솔거노비) 1명밖에 없었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세태 마저 다른 곳으로 도망 갔고, 그 이후 황씨 가문의 문서에서는 앙역노비로 노(奴) 득철(得哲)이 따로 등장한다. 어쨌든 주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비 3-4명 (세태, 득철, 바웃돌, 철이) 중 철이를 양인으로 인정하면 남는 노비가 몇 명 없다. 100명 정도 노비를 거느렸다면 그게 별거 아니었겠지만, 황씨 가문도 처지가 변변치 못하다 보니 여유를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주인 황씨는 바웃돌에게 철이를 결코 양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윽박질렀을 것이다. 만약 꼭 양인으로 만들고 싶다면 속량조로 얼마간의 돈을 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바웃돌은 가족들을 데리고 멀리 보성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주인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바웃돌은 자신의 이름처럼 주인에게 큰 바웃돌을 날려버린 것이다. 주인은 바웃돌 가족을 수소문해 그들이 보성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호구단자에 ‘도거보성’이라고 꾸준히 기록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황씨 집안이 바웃돌 가족의 행방을 이렇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 먹으면 하루 이틀만에 가서 잡아올 수도 있는 인근 지역 보성에 사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달려가 잡아오지 않고 도망으로만 기록해 두었다는 것인데, 노비를 잡아 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관청에 신고하기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웃돌은 자신의 노비가 맞지만, 그의 아들 철이는 국법상(노비종모법) 양인으로 인정해줘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발생한 이 사건이 어떻게든 관청에 알려지면 황씨 가문에게도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망한 바웃돌과 주인 황씨 가문 양측 사이에 엉거주춤한 타협이 이루어던 것은 아닐까?

    주인 황씨는 바웃돌에게 “너를 잡아 데려오거나 관청에 고발은 하지 않겠다. 다만 보성에서 바웃돌 네놈과 철이 놈의 신공(身貢;외거노비가 상전에게 매년 내는 몸값)을 바쳐라.”

    바웃돌은 주인에게 “이전 납부하던 신공은 계속 납부하겠습니다만 내 아들 철이 신공은 납부할 수 없소. 철이는 누가 뭐래도 양인이오.”

    황씨 입장에서는 아예 두 명의 신공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도망 가 사는 것을 묵인해주면서 바웃돌 한 명의 신공이라도 받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호구단자에 바웃돌 가족에 대해 ‘逃居寶城(도거보성)’이라고 기록했던 이유가 아닐까?

    이런 엉거주춤한 타협을 한 황씨가문은 그래도 소유권 포기가 힘들었던지 호적문서 속에서는 바웃돌과 철이를 계속 도망간 노비로 기록해갔고, 그것이 무려 1897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혹시 앞으로 노비종모법이 또 폐지되면 철이는 황씨 집안 노비로 부릴 근거는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대로 노비종모법은 폐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1886년에는 노비세습제가 폐지되고,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1894년 드디어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말았다. 마지막 문서인 1897년 문서는 이미 노비제도가 폐지된 지 3년 뒤에 작성된 것임에도 여전히 바웃돌과 철이는 이 집안노비로 기록되어 있다.

    기득권은 그렇게도 놓기 힘든 것이었다. 노비종모법으로 양인이 되어야 함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노비로 기록하고,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노비를 그대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 국가가 해방시킨 노비를 황씨 가문은 결코 해방시키지 않았다. 1731년 노비종모법이 시행되고 나서 150년이 지난 후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노비 철이가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16장의 황씨 가문 호적문서 속에서 우리는 노비 바웃돌과 그의 양인 아내가 아들 철이의 신분 해방을 위해 도주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절박함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와 함께 바웃돌과 철이를 자신의 재산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던 황씨 집안 나름의 절박함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웃돌 가족의 절박함과 황씨 집안의 절박함 중 어느 쪽이 더 절실했을까?

    [사진] 영암 황씨 집안의 16장의 호구단자 중 마지막 문서이다. 개국 506년인 1897년 문서인데 주호(主戶)는 황진호로 되어 있다.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고 3년이 지났음에도 이 집에는 앙역노비(솔거노비) 득철이와 도망가 보성에 거주하는 바웃돌(‘가암회’로 표기)과 철이가 기록되어 있다. 바웃돌과 철이가 살아있었다면 당시 나이는 각각 184세, 151세였을 것이다. 오래 전 도망간 세태(世太)도 도망노비로 기록하고 있다. 붉은 원으로 표시한 부분에서 ‘加巖回(가암회)’, 良妻(양처), 哲伊(철이), 世太(세태)라는 한자를 확인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1897년은 개국 506년이 아니라 건양 2년인데, 황진호는 1896년 1월부터 연호가 개국에서 건양으로 바뀐 것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은 이렇게 항상 시대의 변화를 제때 제때 따라잡지 못하고 한발씩 뒤처쳐 있었다. (박건호 소장)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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